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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Dec 08. 2023

유럽발 자포니즘 광풍을 일으킨 사쓰마야키 그리고 심수관

규슈에 새긴 한국사 11

얼마 전, 2030년 세계박람회의 부산 유치 불발 소식은 참 안타까웠지요. 우리나라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세계적 행사였기에 아쉬움은 컸습니다. 결과와 무관하게 전방위로 힘을 모은 민관, 그리고 기업의 수고에 감사를 전하며, 오늘은 1867년 세계박람회(만국박람회, World’s Fair, EXPO 등으로 불림)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장이 마련된 센 강변의 마르스광장입니다. 그 유명한 에펠탑이 세워지기 전이군요.(Isidore Laurent Deroy(1797~1886)의 채색 석판화)


 1867년, 파리 센 강변, Champ de Mars(마르스 광장)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장이 술렁입니다. 까다로운 유럽의 지식인들과 예술감정가들이 도자기, 칠기, 금세공, 우키요에, 기모노, 차 등과 같은 예술품과 특산품을 전시한 일본관에 완전히 압도당했기 때문이지요. 5년 전 런던 박람회 때만 해도 일본인들이 입고 온 옷이 초라하다고 혹평했던 그들이었는데 말입니다.    

   

파리 만국박람회에 파견된 전통 복장을 한 일본 대표단의 모습입니다.


전시품 중 그들의 눈을 더욱 휘둥그레지게 한 것은 화려한 대형 채색 도자기였습니다. 정백·박정관 부자(박평의 후손)가 출품한 사쓰마야키(사쓰마도자기)였지요. 일본 측은 이 도자기로 최고 영예의 금메달을 안았습니다. 예상치 못한 성과를 올린 일본 대표단은 네덜란드에서 군함 한 척을 주문한 뒤 의기양양하게 귀국합니다.   


사쓰마번은 별도의 사쓰마관을 마련해 입이 떡 벌어지는 사쓰마야키를 전시했지요. 시마즈 가문의 십자가 문장도 눈에 띄는군요.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1873년 오스트리아 빈, 1876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서도 사쓰마야키의 심수관(심당길의 12대손)이 대상을 수상하면서 명성을 이어갑니다. 다시 파리에서 열린 1878년 만국박람회, 1883년 암스테르담 박람회에서도 연달아 금메달을 획득하며 사쓰마야키는 일본 도자기의 대명사로 자리잡습니다. 


빈 만국박람회(1873) 일본관 로비입니다. 심수관(12대)에게 대상을 안긴 155cm 大화병이 보이는군요.(사노 쓰네타미가 편찬한 일본 박람회 보고서 발췌)


물론 이보다 앞서 규슈 사가(佐賀) 번의 이마리야키(아리타야키라고도 부름)가 이미 유럽에서 대히트를 쳤다는 것을 이전 글에 소개한 바 있습니다. 비싸고 유통이 원활치 않던 중국 도자기를 대신해 유럽에 팔려나갔던 이마리야키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일본에 큰 이익을 남겨주었지요. 하지만 200년이란 시간이 흘러 중국 도자기를 흉내 내던 수준을 완전히 벗어난 사쓰마야키가 등장했으니 일본 도자기를 중국 도자기의 아류 정도로 인식하고 있던 유럽인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사쓰마야키의 장대한 크기와 금채로 빛나는 화려함, 문양과 색채의 다채로움 등은 이제 최고의 예술품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전 글 https://brunch.co.kr/@storybarista/17 참고)


일본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도예 산업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일본서 큰 대접을 받지 못하던 우키요에(다색 목판화) 등 일본 미술 전반에 대한 절찬은 이전까지 서구가 일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야만적인 민족이라는 선입견 대신 고급문화를 지닌 문명국의 이미지를 갖게 해 주었지요.      


한발 더 나아가 이를 계기로 유럽은 일본 문화와 예술에 심취하기 시작합니다. 1860년대부터 프랑스를 중심으로 불기 시작한 자포니즘(Japonism)이 20C 초반까지 유럽 사회 전반에 광풍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서양보다 뒤떨어진 기계제품보다 전통적인 정교한 미술 공예품을 중심으로 박람회에 참가하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의 예상이 적중한 것입니다. 일본 미술품과 공예품에 대한 해외 주문이 쇄도했고, 수출은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지요. 이렇게 벌어들인 돈은 메이지 유신 이후 제국의 든든한 자금이 됩니다.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심수관(12대)의 사쓰마야키의 화려하고도 섬세한 모습은 유럽인들의 감탄을 불러옵니다. (높이 77㎝,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1873년 오스트리아 빈 만국박람회에 대형 화병(높이 155cm)을 출품하여 호평을 받으면서 세계 무대에 등장한 심수관(12대)의 사쓰마야키들입니다. 무척 호화롭지요?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만국박람회에서 유럽인들을 매료시키고 자포니즘 광풍을 일으킨 사쓰마야키 도예가들의 이름이 박정백·박정관 부자, 그리고 심수관이라니요? 어딜 봐도 한국식 이름입니다. 그럼 그들은 한국인일까요? 그들은 분명 일본 규슈 사쓰마(지금의 가고시마)에서 태어나고 사쓰마에서 자란 일본인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인인 그들이 한국식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데에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한국 사람이라면 '심수관'이란 이름쯤은 많이 들어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언론학계, 심지어 정치인들이 심수관 가문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은 심수관을 알고 있을까요? 일본 대중이 심수관을 알게 된 것은 일본의 저명한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1923~1996)의 소설,『고향을 어이 잊으리까(故鄕忘じがたく候)』(1965)를 통해서입니다.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 번역출판된 시바 료타로의 책을 중고사이트에서 어렵게 찾아냅니다. 누렇게 바래고 섣불리 줄긋기하다가는 종이에 구멍이 뚫리는 세로읽기 책이 당도했습니다!


이 소설은 신문사의 도쿄 지국 기자인 화자가 일본 최남단 사쓰마(지금의 가고시마)의 조선인 도공마을 나에시로가와(苗代川, 지금의 미야마 마을)를 찾아가 심수관을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쓰여집니다. 여기서의 심수관은 1873년 빈만국박람회에서 대화병으로 대상을 수상한 심수관(12대)의 손자, 14대 심수관입니다. 자랑스러운 이름을 아들, 손자 대에 걸쳐 계속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미야마(美山) 마을 답사여행은 이 소설의 화자인 기자의 발걸음을 쫓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들이 한국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연유를 찾아서 말이지요. 가고시마 시내에서 30여 분 서북쪽으로 달려 미야마의 심수관요(沈壽官窯)에 도착합니다. 시바는 미야마 마을에 들어서며 그 풍광이 '틀림없는 조선 산하다'라고 했지요. 마음이 참 편안해지는 고풍스러운 마을입니다.


심수관요라는 현수막이 멀리서도 내 눈에 들어옵니다. 문패에 15대 심수관이라 적혀있네요. 소설에 등장하는 14대 심수관은 2019년 돌아가셨고, 그의 아들이 가업을 물려받았지요.
집안으로 들어서니 시바 료타로가 보았던 바로 그 벚나무와 와룡매(臥龍梅)가 수줍게 꽃망울을 틔우고서 손님을 맞습니다.^^


조선인 도공마을 미야마 답사여행이 다음 글에도 이어집니다. 함께 가실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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