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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Jun 27. 2022

나가사키에는 짬뽕만 있는 게 아닙니다.

하멜은 왜 나가사키로 갔을까 3

조선은 왜 세계를 향한 호기심을 잃고 문을 닫아버렸을까 (brunch.co.kr)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자, 이제 다시 하멜 일행의 조선 탈출 사건으로 돌아가 봅니다. 여기에서 하나의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조선을 탈출한 하멜 일행의 배는 왜 하필 일본 나가사키로 향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스페르베르호가 난파되기 전 그들의 목적지가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였음을 나가사키 부교(태수)의 심문 때 밝힌 바 있습니다. 그들이 애초에 가고자 했던 곳 바로 일본 나가사키 만의 작은 섬 데지마(出島)였습니다. 나가사키와 데지마, 그곳 어떤 곳일까요? 가사키로 떠나봅니다!

     

높은 지대인 다테야마(立山)에 숙소를 정하길 잘했습니다. 나가사키만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멋진 뷰를 선사해주었으니까요.

나가사키시(長崎市)는 일본 규슈(九州) 나가사키현의 현청 소재지입니다. 유서 깊은 무역항이자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미쓰비시 중공업을 위시한 조선업과 방위산업이 발달해왔기에 태평양전쟁  히로시마에 이어 미국에 의한 두 번째 핵공격의 타깃이 된 도시입니다.


나가사키는 일본에서 가장 먼저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곳이기도 합니다. 축구장 두 개 크기의 작은 섬인 데지마를 통한 제한적인 교역이긴 하지만 일본이 서양에 알려지고 서양문물 정치· 사회 상황이 일본으로 쏙쏙 전해집니다. 이 좁은 공간을 통해 일본은 넓은 세상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곳은 일본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입니다.


일본에 첫 발을 내디딘 서양인은 포르투갈인이었습니다. 1543년 규슈(九州) 사쓰마번(薩摩藩, 지금의 가고시마현) 타네가시마에 도착한 중국 상선에 타고 있던 포르투갈 상인이 일본에 조총을 판 것을 시작으로 포르투갈의 상인은 물론, 예수회 신부들이 크리스트교 포교를 위해 일본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급속도로 크리스트교가 확산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1597년 나사키에서 키리시탄(크리스천)을 집단 처형하기까지 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막부) 역시 금교령을 내리고 가톨릭 신부를 추방하거나 처형하며 쇄국정책을 이어갑니다.


나가사키만의 데지마(왼쪽 붉은색 부분)와 1904년 항만 개량공사를 통해 주변이 매립되어 섬으로써의 기능을 상실한 현재의 데지마(붉은색 부분, 데지마 전시관 제공)

1636년에는 막부의 명령으로 나가사키의 유력 상인들이 출자하여 나가사키만에 부채꼴 모양의 인공 섬 데지마를 건립합니다. 시내에 흩어져 사는 포르투갈인들을 한 곳에 수용해 무역을 장악하고 크리스트교가 퍼지는 것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데지마가 완공된 이듬해에 일어난 '시마바라의 난'(1639)을 빌미로 크리스트교 전파를 지나치게 앞세운 포르투갈인의 일본 내항(來航)은 완전히 금지되어 버립니다. ('시마바라의 난'은 규슈 서쪽의 시마바라 반도와 아마쿠사 제도에서 벌어진 대규모 반란으로 대부분 크리스트교도인 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막부는 크리스트교 금교령을 강화하고 포르투갈과의 국교를 단절하게 되는 사건입니다.)    


포르투갈 상인이 들고 온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의 빵을 현지화한 카스테라. 쇼오켄(松翁軒)의 초콜릿 카스테라에서는 장인정신이 느껴집니다. 매장 간판에 적힌 since 1681!


쫓겨난 포르투갈을 대신해 지금의 나가사키(長岐)현 히라도시(平戶市)에 상관을 가지고 있던 네덜란드가 1641년 데지마로 옮겨옵니다. 크리스트교 전파가 아닌 무역이 목적이었던 네덜란드에 대해서만 교역이 허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일란화친조약(日蘭和親條約, 1855)으로 네덜란드인이 나가사키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상관을 폐지(1859)하기까지 200여 년간 데지마는 에도막부의 쇄국정치 기간에도 유일하게 서구를 향해 열린 곳이었고, 네덜란드는 서구의 나라 중 유일하게 일본으로 드나들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데지마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관 직원들이 머물던 주택, 무역품을 보관하던 창고, 일본인 관리인의 대기실 등이 들어서 있었고, 원칙적으로 공무상 출입이 허용된 일본 관리 외에는 출입이 금지되었으며, 네덜란드인도 1년에 한 번 에도에 있는 쇼군에게 국제 흐름을 설명하러 가는 일 외에는 일본 체류 기간 동안 좁은 데지마 안에서만 지내야 한다는 엄격한 규칙이 존재했습니다.  


도로표지판에 데지마와 차이나타운 가는 방향이 한글로도 안내되어 있네요. 데지마에 입장하면 옛 데지마의 축소 모형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데지마에서의 교역을 통해 서구의 새로운 학술과 문화가 일본으로 전해집니다. 이곳을 통해 입수된 서양서적들을 통해 일본의 의학, 천문 역학, 지리학 등의 연구가 촉진되었습니다. 난학(蘭學, 일본 에도시대에 유입된 네덜란드 학문)을 통하여 탄생한 합리적 사고와 인간평등사상은 막부 말기의 일본에 커다란 사상적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또한 네덜란드를 통해 일본은 서양 사회에 잘 알려지게 되었고 막부의 쇼군은 에도(江戶, 도쿄(東京))에 가만히 앉아 국제 정세까지 덤으로 들을 수 있는 이익을 챙겼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일본은 이 네덜란드와의 무역에서 톡톡히 재미를 보았습니다. 대마도를 통해 조선에서 수입한 인삼이나 호피, 면포나 마포 등을 네덜란드 상관에 되팔아 이익을 냈을 뿐만 아니라, 나가사키에서 가까운 아리타(有田)에서 만들어진 아리타야키(有田燒)라 불리는 도자기를 유럽으로 수출해 커다란 호평을 받습니다.      


아리타야키가 유럽에 소개되기 전, 중국 장시성(江西省) 징더전(景德鎭)의 청화백자는 유럽 왕실과 상류층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귀한 교역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명(明)에서 청(淸)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혼란한 시기에 징더전은 폐쇄되고 외국으로의 도자기 수출도 일시 중단됩니다. 고수익을 가져다주던 시장을 포기할 수 없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징더전자기 대신 아리타자기를 수입하기 시작니다. 1659년 첫 수출 이래 70년간 700만 개의 아리타야키가 유럽으로 팔려 나갑니다. 이것은 네덜란드와 일본 두 나라에 대단한 성공을 안겨주었습니다. 특히 일본에 있어서 도자기 수출로 벌어들인 방대한 수입이 근대화를 위한 든든한 자금이 되었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그 아리타야키의 시조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도공, 이삼평이라는 사실은 앞선 글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지요.


복원된 데지마 골목과 선장이 머물렀던 방, 그리고 데지마의 역사와 발굴된 유물을 전시해 놓은 데지마 전시관 모습입니다.


그러니 이제 하멜 일행이 데지마로 탈출한 까닭이 명확해지지요? 하멜 일행을 태운 스페르베르 호는 온갖 무역품을 싣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관이 있는 데지마를 향해 가던 상선이었고, 그들이 목숨을 걸고 조선을 탈출해 데지마로 간 이유도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장을 만나 고국으로 무사히 돌아가기 위해서였던 것다. 그렇다면 천신만고 끝에 조선 탈출에 성공해 데지마에 도착한 하멜 일행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 후로도 고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가는 길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좁은 데지마에서 1년 하고도 1개월을 더 억류되어 있어야만 했으니까요! 일본 막부는 그들이 크리스천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 이유에 불과했습니다. 조사를 이유로 하멜 일행을 억류시켜 네덜란드 상관을 압박하고, 난파선이나 표류민이 발생했을 시 통보해주기로 한 약조를 들고 나와 조선 조정에 항의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최대한 이용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에도막부는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조선과의 무역을 일임하고 있었는데, 대마도주는 큰 이익을 주는 조선과의 교역량을 늘리기 위해 늘 안간힘을 썼고, 조선은 현상 유지만을 고집했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궁지로 몰아넣어 무역량과 품목에 있어서의 쿼터를 늘리려는 궁리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은 40년 전 벨테브레이 일행이 조선에서 잡혔을 때 나가사키로 가려한다는 것을 알고 동래에 있는 왜관에 인도하려 했는데 일본이 거부한 사실을 환기시키며 위기를 모면합니다. 조선에 남은 7명(하멜 탈출 시 8명이 남아있었으나 그 사이 또 1명이 줄었습니다.)의 네덜란드인을 모두 나가사키로 보내는 것으로 이 일은 일단락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스페르베르 호의 선원 64명 중 하멜을 비롯한 15명은 조선에서 장장 13년, 나가사키에서 1년, 모두 14년간의 억류를 끝내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 네덜란드로 돌아가게 됩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한편의 이야기이지요!      


그 유명한 나가사키짬뽕을 맛보지않을 수 없겠지요. 데지마에서 나와 근처 차이나타운으로 갑니다.19C 말 유학 온 중국학생들의 저렴한 한 끼를 위해 고안된 일본식 중화요리라고 합니다


하멜 이후 200년, 근대로 가는 길에서 조선과 일본은 어떻게 달랐을까요? 다음 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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