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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Jul 06. 2022

17C 유럽의 베스트셀러 21C에 읽기

하멜은 왜 나가사키로 갔을까 4

나가사키에는 짬뽕만 있는 게 아닙니다. (brunch.co.kr)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하멜 일행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조선에 억류되어 받지 못한 13년간의 임금을 청구했습니다. 그러나 회사는 배가 난파한 이후의 시간에 대한 월급을 지불하는 것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하멜은 끈기 있게 난파부터 귀국까지의 긴 시간에 대한 일지를 작성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는지를 어필하고, 코레아의 정치, 사회, 문화, 기후, 지리, 자연, 풍습, 종교, 민족성, 그리고 교역할만한 물품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1668년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에서 하멜의 보고서는 출간되었고 회사는 돌연 입장을 바꿉니다. 그들에게 13년간의 밀린 월급을 지불하기로 결정한 것이지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하멜의 보고서는 출간되자마자 전 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순식간에 프랑스의 파리, 독일의 뉘른베르크, 영국의 런던에서 각자의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유럽 사회를 휩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지요. 그만큼 조선이라는 나라는 유럽인들의 호기심의 대상이었지만 조선을 찾아가기는 길은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정보의 부재 때문에 말입니다.


1668년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최초 출간된 하멜표류기 스티히터판(Stichter version)의 표지(왼)와 1670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간된 프랑스어판 표지입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귀국한 하멜 일행들과 하나하나 인터뷰한 뒤 조선과 직거래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습니다. 일본이 조선에서 면포, 마포, 인삼, 호피를 가져다가 큰 이윤을 보고 있고, 조선이 일본에서 수입하는 녹비, 후추, 설탕, 백단향(白檀香) 같은 물품의 대부분은 일본이 네덜란드로부터 수입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는 통 큰 결정을 내립니다. 일본을 통하지 않고 조선과 직접 교역하기 위해 1669년 ‘코레아(Corea)호’라는 1천 톤급 배를 건조한 것이지요.


그러나! 코레아호는 조선으로 단 한 번의 출항조차 해 보지 못했습니다. 중계무역으로 쏠쏠한 이익을 보고 있던 일본이 조선과 직교역을 하면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을 폐쇄해야 한다는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여러 모로 조선에 불운한 시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운 중에서도 가장 큰 불운은 조선 스스로가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고 교역할 의지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겠지요.     


하멜 일행이 조선과 일본에 다녀간 지 200년이 지나 19세기에 이르렀을 때, 서구인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세계로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다른 대부분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나라들처럼 조선과 일본도 서구 제국주의의 개국 위협에 직면하게 됩니다.


일본의 에도 막부는 1854년 미국과 ‘미·일 화친조약’을 맺고, 4년 뒤인 1858년에는 ‘미·일 수호통상조약’을 강제적으로 체결함으로써 200여 년 간의 쇄국 체제를 끝내고 문호를 개방하게 됩니다. 조선은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겪으며 쇄국을 더욱 강화하였지만 운요호 사건(1875)을 계기로 서구가 아닌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나라의 문을 열게 됩니다. 1876년 ‘조일 수호조규’ 일명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부터입니다. 불과 일본이 20여 년 앞서 개항했을 뿐인데 우리는 왜 일본처럼 잘 대응하지 못했느냐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과연 일본이 우리보다 불과 20년 앞서 문호를 개방한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일본의 나가사키는 개항하기 200년 전에 이미 네덜란드인에게 교역을 허용했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배가 나가사키만의 데지마를 쉴 새 없이 드나들었습니다. 그러니 일본은 개항하기 훨씬 전부터 서양에 대한 맷집을 키워온 셈입니다.

  

일본은 1863년 사쓰에이전쟁(薩英戰爭)에서 영국에 패했습니다. 전쟁에 패한 규슈(九州)의 사쓰마번(薩摩藩, 지금의 가고시마현)은 서구의 군사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구 문명을 더욱 받아들이려고 노력합니다. 사쓰마번은 독자적으로 19명의 청년들을 영국으로 유학 보내 선진문물을 배워오도록 합니다. 이들 청년들이 돌아와 일본 근대화의 주역들이 됩니다. 사쓰에이전쟁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입니다.


그리고는 발 빠른 근대화로 힘을 키운 사쓰마번은 조슈번과 힘을 합해 막부를 무너뜨리고 왕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시대를 선포합니다. 이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1868)입니다. 어쩌면 메이지유신은 일본 근대화의 시작이 아니라 결과였습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하고 서구세력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됩니다.       


불행히도 조선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멜 일행이 다녀 간 이후로도 줄곧 서양에 무관심한 채 문을 닫고 살았습니다. 구한말에 선교사들이 조선에 도착하기 전 읽고 온 책이 『하멜표류기』였다니, 당시 서구인들이 조선을 ‘은둔의 나라’라 칭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네요. 조선 조정이 취한 쇄국정책이 그 자체로는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보아야겠습니다.ㅡ.ㅡ


조선은 쇄국정치와 문화적 폐쇄주의에 빠져 제국주의 침략 물결이 당도했을 때 당혹스러워만 했습니다. 고종과 조정의 뒤늦은 개혁은 자신감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국제 정세에 대한 위기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시대를 앞선 근대 개혁을 추진한 사쓰마의 개명(開明)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齊彬, 1809~58)와 같은 지도자도 조선에는 없었습니다. 삼면이 대양을 향해 열려있는 나라가 바다 너머의 세계에 호기심과 관심을 거둬들여 버린 대가는 무척이나 컸습니다.




우리는 왜 지금 자그마치 350년 전 이 땅에 왔던 이방인인 하멜을 기억해야 할까요? 왜 21세기에 이 오래전에 써진 『하멜표류기』를 읽어야 할까요?

17세기 조선이 빠르게 변해가는 세계를 보지 못해 훗날 낭패를 보았듯이 지금의 우리도 역사적 교훈을 간과하고 더 넓은 세계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역사에 또다시 큰 우를 범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세계는 급변하고 세계화·국제화의 모토 속에 빠르게 하나로 연결되고 있지만, 반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요구 또한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주변 환경을 명확히 인식하고 잘 대응하고 있나요? 관의 지나친 간섭으로 개인과 산업이 발목 잡히는 일은 없나요? 세상을 향해 두려움 없이 열려 있고 끊임없이 미지의 세계에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 도전하고 있나요? 이러한 질문은 개인, 회사, 국가, 모든 분야에 던져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멜 일행이 조선에서 머물렀던 곳곳과 하멜의 고향 네덜란드 호린험(Gorinchem)으로 떠나는 답사 여행이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함께 가실 거죠?^^ (표지 사진은 호린험의 하멜하우스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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