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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Jul 20. 2022

제주, 강진, 여수, 그리고 호린험(Gorinchem)

하멜은 왜 나가사키로 갔을까 5

17C 유럽의 베스트셀러 『하멜표류기』21C에 읽기 (brunch.co.kr)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최근 하멜 일행이 머물렀던 곳마다 그들을 기억하려는 지자체들의 노력과 열정이 뜨겁습니다. 스페르베르 호가 표착한 것으로 알려진 제주도 안덕면 용머리 부근에는 하멜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표착 지점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스페르베르 호를 재현해 하멜상선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어 제주를 방문한 관광객의 이목을 끕니다.       

                                         

하멜의 이동경로 (동아닷컴 <길 역사를 따라 문화를 따라> 제공)
제주 용머리해안에 복원된 스페르베르 호의 모습입니다.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2리해안부터 고산리해안까지 여러 곳이 하멜 표착지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하멜상선전시관(스페르베르 호)은 17C 유럽 최고의 해양 강국으로 발돋움한  네덜란드 상선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곳입니다. 당시 네덜란드 상선 바타비아 호를 모델로 했으니까요.


제주에서 한양으로 이송되어 훈련도감 호련대(임금이 행차할 때 가마나 수레를 호위하던 군대)에서 근무하던 하멜 일행은 두 번째 탈출 사건의 실패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33명 전원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으로 쫓겨납니다. 그곳에서 7년이라는 가장 긴 시간 동안 머물렀지요. 그러니 작은 흔적 하나쯤은 남겨두지 않았을까 기대를 안고 강진으로 향합니다!


강진군은 한반도의 맨 아래 전라남도 서남쪽 바닷가에 위치합니다. 바다가 육지로 깊숙이 파고들어 온 강진만을 사이에 두고 마치 바지를 탁 펼쳐놓은 듯한 아름다운 고장이지요. 지금은 길이 좋아 서울에서 370여 km를 차로 쉼 없이 달리면 4시간 반 만에 도착하는 거리입니다. 물론 화장실도 들르지 않고 호두과자도 없이 마냥 달렸을 때의 얘깁니다만. 조선시대에는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480km에 달하는 멀고도 먼 길이었습니다. 하멜 일행은 이 길을 두 번 걸었습니다. 제주에서 한양으로 호송될 때, 또 한 번은 한양에서 강진으로 쫓겨날 때였지요. 하멜은 이 길을 지날 때 각 고장의 지명뿐 아니라 전라도 남단에서 한양까지 14일이 걸렸다는 것을 보고서에 기록했습니다.


여러 가지 궁리 끝에 나는 서울에서 광주까지 고속철도를 이용하고 광주에서 자동차를 빌려 영암을 거쳐 강진으로 들어가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습니다. 광주에서 차로 1시간 남짓 달리다 보면 전라남도의 보드랍고  능선과 잘 정돈된 농촌마을의 풍요롭고도 정겨운 풍경 덕분에 도시 빌딩에 지친 눈과 마음이 어느새 편안해집니다. 영암에서 강진으로 넘어가는 길목의 월출산을 만나기 전까지는 참으로 둥글둥글 동글동글합니다.


월출산의 모습은 놀랍습니다. 와~하고 탄성이 나옵니다. 주변의 산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가파른 암반이 살점을 드러내듯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쩍슬쩍 보이고 산세는 삐쭉쭉 까칠 위엄느껴집니다. 아쉽지만 수려한 산세에 빼앗긴 눈길을 거둬들이고 이제 월출산의 동쪽을 끼고 목적지인 강진군으로 들어갑니다. 다시 재 하나를 허위허위 넘으면 그제야 짠~하고 평지 마을이 나타나지요. 드디어 강진군 병영면입니다! 한양에서 강진까지 이 멀고도 험한 유배길을 감시 속에서 걷고 또 걸었을 하멜 일행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집니다.(이 길은 후에 강진으로 유배온 정약용 선생이 걸었던 길이기도 합니다!)     

하멜 일행이 풀 뽑기 등 잡역을 한 것으로 전해지는 강진의 전라병영성은 현재 발굴과 복원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하멜 일행은 이곳의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에 소속되었습니다. 전라병영성은 조선 태종 때 설치한 전라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의 병영성이었고, 이는 전라도와 제주도를 총괄한 육군의 총 지휘부였습니다. 그러나 병영성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불탔고, 곧 이은 갑오개혁으로 폐영(廢營)되어 지금은 병영면이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최근에 병영성 발굴과 복원 공사가 한창입니다.(부디 테마 파크가 되지 않길..)    


마을 골목에 하멜 일행이 품팔이한 것으로 보이는 층별로 돌을 어긋나게 쌓아 만든 네덜란드식 돌담의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우리의 전통 돌담과는 확연히 다르군요.

하멜 일행은 관청 앞의 풀을 뽑거나 생계를 위해 잡역을 하고 나막신을 만들어 팔았으며 춤판을 벌여 삯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중에는 결혼을 해 가족을 꾸린 사람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멜의 보고서에는 적혀있지 않지만 탈출 후 네덜란드에서 인터뷰가 진행될 때 다른 선원들은 그들 중 일부가 조선에서 처와 자식을 두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22살에 조선에 와 39세에 고향 집으로 돌아간 하멜은 이후 다시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여생을 보내다 62세에 눈을 감았습니다. 하멜이 정말 조선에 처자를 두고 온 것은 아니었을까요?ㅠ 마을에는 그들이 쌓았을 것이라 전해지는 네덜란드 스타일의 돌담이 건재하고, 심지어 그들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병영 남씨)이 살고 있다는 뒷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이곳에 살 때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를 보았다고 적고 있는데 성동리의 800년 된 이 은행나무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단한 하멜 일행에게 그늘을 만들어주었을 고마운 나무네요.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2007)과 앞마당의 풍차와 하멜 동상입니다. 동일한 모습의 동상이 하멜의 고향 네덜란드 호린험 시에 기증되었습니다.


강진에서 하멜 일행은 조선인으로서 적응하며 제법 안정을 찾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선을 덮친 대기근으로 그들은 여수 12명, 순천 5명, 남원 5명으로 나누어져 흩어지도록 명 받습니다. 하멜은 몹시 절망하며 보고서에, ‘우리는 서로 떨어진다는 사실에 몹시 슬펐다... 이 모두는 엄청난 수고로 얻은 것들이었는데, 이제 이것들을 다 두고 떠나야 하는 것이다.’라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요금 청구서 같은 메마른 내용이라 평하는 하멜의 보고서에서 유일하게 감정이 실린 부분입니다. 이때 하멜은 전라좌수영이 있는 전라남도 여수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고, 결국 탈출을 결심하게 됩니다.


하멜을 비롯한 12명이 조선에서 마지막으로 머문 여수시로 그 흔적을 찾아 떠나봅니다. 여수시에서는 하멜이 탈출한 구항 방파제 끝에 빨간색 하멜등대를 세우고 하멜동상과 전시관을 세웠습니다.         

하멜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된 하멜 등대(2004)와 여수시의 하멜전시관(2012)입니다.


보시다시피 지자체들의 하멜 일행과 『하멜표류기』에 대한 관심이 굉장합니다. 애정과 관심은 높이 살만 합니다. 하지만 이런 기념관을 비롯한 시설물들이 자칫 지자체의 겉만 요란한 마케팅이 되어 단순한 관광지로 전락해버린다면 애써 공들인 보람이 사라지겠지요.


기념관마다 스토리가 중복되어 각 지역 기념관들 간의 차이점을 느낄 수 없는 부분은 아쉽습니다. 비슷비슷한 스토리인데 굳이 지역마다 전시관을 만들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전체적인 스토리는 통합적인 관점에서 관리해야겠지만 각 지역별로 하멜 일행과 관련된 특색 있는 스토리를 발굴해 차별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또한 사실을 단순하게 나열하기보다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어떤 중대한 의미를 갖는지를 되새겨 오늘의 교훈으로 삼아야겠지요. 그런 노력이 없다면 350년 전 이방인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이 이제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호린험은 중세 무역도시로 시작했으며 네덜란드가 독립전쟁(1567~1648)으로 스페인에서 독립한 후 해상무역을 통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됩니다.  

하멜에 대한 궁금증은 암스테르담(Amsterdam)에서 남쪽으로 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호린험(Gorinchem)으로 이어집니다. 호린험은 하멜의 고향입니다. 암스테르담 스키폴(Schiphol) 공항으로 들어가 1시간가량 운전해 호린험으로 가는 것이 정석이지만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독일 마인츠(Mainz)의 구텐베르크 박물관(Gutenberg Museum)을 들러 가겠다 마음먹었기에 프랑크푸르트(Frankfurt) 공항으로 들어가 마인츠까지는 기차, 마인츠에서 차를 빌려 호린험까지 400여 km를 운전해 가기로 합니다. 하멜이 한양에서 강진까지 걸었던 거리와 비슷하군요. 그래도 난 차로 가니 이건 고생도 아니다 다독이며 단숨에 달렸지요.


링어(Linge) 강을 끼고 있는 아담하고 평화로운 도시, 호린험입니다.
도심 광장에 1860년에 지은 구시청사 건물이 눈에 띕니다. 지금은 시립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지요.(왼쪽)  사람들이 몰려있는 광장주변의 마켓 광경입니다.(오른쪽)

호린험은 곳곳에 강과 운하를 끼고 있는 작고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드는 광장과 마켓의 풍경이 정겹습니다. 바로 이 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하멜의 집이 있습니다.

골목 안에 하멜 하우스와 하멜박물관이 나란히 들어서 있습니다. 이 모습을 하멜이 본다면 아..참...뭐라고 할까요? 감격스러워하길 바라 봅니다.

2013년 하멜의 집(Hamelhuis)이 새롭게 단장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하멜박물관(Hendrik Hamel Museum)으로 꾸몄습니다. 하멜이 태어나 자라고, 조선에서 네덜란드로 돌아가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눈을 감은 곳이기도 합니다. 원래의 집은 사라졌고 2011~13년에 걸쳐 재건되었습니다. 한국과 네덜란드 양국의 공동노력의 결실입니다.  


하멜은 작은 마을 호린험의 자랑이지만 우리나라에서의 인기와는 달리 그를 기억하는 네덜란드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조선이 잊혔듯 하멜 역시 잊혔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하멜박물관을 찾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호린험의 지역 주민들과 인근 학교의 어린 학생들이 하멜과 한국을 배우러 온다고 박물관 직원이 말해 주었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생각해 봅니다.

하멜이 살던 17C 네덜란드인의 집을 재현한 박물관 1층의 바닥타일(베르메르 그림에도 등장)과 하프시코드(호린험의 하프시코드 장인의 손에 의해 7개월에 걸쳐 제작됨)가 인상적입니다
조선에서의 스토리를 재현한 2층과 하멜의 흉상이 있는 정원입니다. 한국식 정원이라는 소개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사각에 가운데 둥근 섬(천원지방)을 둔 형태는 아닌데 말입니다
호린험 시의 하멜 동상입니다. 그가 어디를 가리키는지 다들 아시겠지요? 그가 '조선으로 가자!'하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만.. 단지 끔찍한 기억이었을까요? 하지만.. 그래도..


K-Culture의 붐을 활용해 제주, 강진, 여수 등지에 있는 전시관과 호린험의 하멜박물관을 연계한 이벤트나 전시, 콘서트를 기획해보아도 좋겠습니다. 서로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상호 이익으로 이어질만한 아이템을 개발해도 좋겠지요. 멀리 떨어져 있는 한국과 네덜란드에게 공유할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작은 연결점이지만 이를 통한 연구와 교류가 더 활발히 이루어져 네덜란드와 한국의 현재와 미래로 이어진다면 하멜 일행의 극심한 고생과 고통이 마냥 허무하진 않을 테니까요.


<하멜은 왜 나가사키로 갔을까> 시리즈를 마칩니다. 넘치는 지적 호기심과 궁금증에 이끌려 다섯 편의 긴 글을 끝까지 탐독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 보답으로 하멜 초상화를 드릴게요.^^

하멜의 초상화(Portrait of Hendrick Hamel by Marc boom,  출처는 호린험 하멜박물관)입니다. 곱상한 얼굴이군요. 그저 상상일 뿐이지만 말입니다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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