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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Jan 06. 2022

헤이그의 별이 된 한국인

헤이그로 향하다.


이른 아침, 출근길 인파로 북적이는 Amsterdam 중앙역으로 향합니다. 화려한 역사(驛舍)가 과거의 영화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른 아침, 유럽의 2월 공기는 여전히 차갑습니다. 단단히 여며 입고  Amsterdam 중앙역으로 가 기차에 오릅니다. 헤이그(The Hague, 네덜란드에서는 Den Haag) 중앙역에 도착하기까지 1시간 남짓, 조바심을 냅니다. 21세기의 나에게 조차 네덜란드는 먼 나라이고 헤이그는 생소한 도시입니다. 정말 헤이그의 비밀 특사를 만날 수 있을까? 전화를 해볼 걸 그랬나? 만약 문이 닫혀있으면 어떻게 하지? 마음은 더욱 초조해집니다.     


드디어 헤이그 중앙역에 도착합니다. 헤이그는 짙은 회색빛 하늘과 흩날리는 싸리비로 나를 맞이합니다. 네덜란드의 행정 수도답게 말끔한 모습이지만 어쩐지 차갑게 느껴집니다. 다행히 이준 열사 기념관(Yi Jun Peace Museum)은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15분 남짓 걸어 골목으로 들어서자 저 멀리 반가운 태극기가 눈에 확 들어옵니다. ‘아~ 잘 찾아왔구나!’ 슬쩍 문을 밀어도 보고 초인종을 눌러도 봅니다. 오픈 시간인 10시 30분보다 약간 일찍 도착했기에 반신반의하지만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덜컹 문이 열립니다. ‘오, 감사합니다!’   


외교권을 강탈당하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결국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회유와 강압에 의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내어주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됩니다. 을사조약(乙巳條約) 혹은 제2차 한일협약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불평등 조약임을 강조하고자 ‘억지로 할 늑(勒)’ 자를 사용해서 을사늑약이라 흔히 부릅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은 대한제국 시기 덕수궁 영역 안에 있었지만 일제가 덕수궁을 축소하면서 궁궐 경내에서 제외됐습니다. (중구 정동길)
중명전 내부에 전시된 을사늑약 문서(일부)입니다.


외교권 강탈 사실이 알려지면서 거센 반발이 일어납니다. 조약 체결 당시 외부대신이던 박제순을 비롯해,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와 시위가 거세게 일었습니다. <황성신문(皇城新聞)>은 조약 체결 다음 날, “수십 인의 군중이 학부대신 이완용의 집에 돌입하여 불을 질렀다”라고 보도했습니다. 주필 장지연은 “이 날을 목 놓아 통곡한다.(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는 논설을 실어 항의했습니다. 조병세는 “박제순에게 방형(사형)을 실시하고 나머지 대신들도 매국의 율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청하고 일본 헌병에 의해 강제 추방되던 중에 가마 안에서 음독자살했습니다. 시종무관 민영환, 주영 서리공사 이한응, 학부 주사 이상철, 시위대 군인 김봉학 등 자결 소식은 끝없이 들려왔습니다. 김구는『백범일지』에 자결한 민영환의 집에 조문 갔다 나오면서 목격한 자살 미수 사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어떤 사람이 흰 명주 저고리에 갓망건도 없이 맨 상투 바람으로 옷에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채 여러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인력거에  실려 가면서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누구냐고 묻자 참찬 이상설인데 자살미수에 그쳤다고 한다.

     

을사늑약 체결 후, 일제는 초대 통감에 이토 히로부미를 임명하고 본격적인 통감정치를 시작했습니다. 일본인 경찰을 늘리고 경찰기구를 강화했으며 통신과 철도 등 기간산업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1907년 정권을 장악한 이완용 내각은 이토 히로부미에 충성하고 고종을 축출할 임무를 띤 내각이었습니다. 궁지에 몰린 고종의 승부수는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는 일이었습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함과 무효를 알리고, 독립을 호소하려 한 것입니다.      


고종헤이그로 특사를 파견하다.    

 

1907년 4월 20일,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정하고 수결과 위임장을 내어주었습니다. 검사이자 외교관인 이준(李儁, 1859~1907.7.14)은 서울을 출발해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李相卨, 1871~1917)을 만나 합류합니다. 그리곤 다시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위종을 만납니다. 이위종(李瑋鍾, 1884~?)은 당시 러시아 제국 주재 대한제국 공사였던 이범진의 아들로 공사관의 참서관으로 임명되어 아버지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삼엄한 감시를 뚫은 장장 64일간의 험난한 여정 끝에 그들은 헤이그에 도착하게 됩니다.             

                                         

아.. 이렇게나 먼 길을! 헤이그 특사 3인이 각각 헤이그로 이동한 경로입니다. (이준 열사 기념관 제공)


평화회의 기간(1907.6.15~10.18) 동안 각국 외무대신과 위원들, 언론사를 방문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 회복을 역설했지만 세 특사를 맞이한 것은 일본의 방해와 열강의 냉대뿐이었습니다. 회의장인 비넨호프(Binnenhof)의 기사의 저택(De Ridderzaal)에는 한 발짝도 들여놓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사실상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일본은 카스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을 맺은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이미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은 상태였기 때문이지요.       


참담하고도 비통했을 특사들의 마음으로 Binnenhof를 바라봅니다. 특히 기사의 저택(De Ridderzaal)은 Binnenhof 건축물들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된 홀란트 백작 플로리스 5세(13C)가 건설한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성입니다. 현재 국회 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지요. 하지만 특사들의 눈에 Binnenhof의 아름다움 따위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겠지요. 문 앞을 서성이며 차오르는 비탄의 눈물을 참아야 했을 테니까요.     


나는 당장이라도 저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데... 갑자기 무언가에 베인 듯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옵니다. 싸리비는 계속 내리고 나는 우산도 없이 멍하게 광장 한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몽롱하게 들리고 문 앞 계단에 넋 놓고 앉은 세 명의 특사가 흐릿하게 보입니다. 싸리비인지 눈물인지 볼을 타고 흐릅니다.                                                       

Binnenhof 입니다. 정면에 보이는 기사의 저택(De Ridderzaal)이 회의장이었지요.


회의장에 들어갈 수 없었던 대한제국의 특사들은 만국평화회의 협회 회보인「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ference de la Paix」에 호소문을 보냅니다.          


(중략) 국가의 법률과 권리들을 침탈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일본인의 소행을 각하 제위께 알리고자 합니다. 보다 명료히 하기 위해 아래 세 가지 경우로 나누어 진술드리고자 합니다.

1. 일본인들은 대한제국 황제폐하의 승낙 없이 행동을 취했다.

2. 일본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황실에 대항하여 무장병력을 사용했다.

3. 일본인들은 대한제국의 모든 법률과 관습을 무시한 채 행동했다.    

각하 제위께서는 공명정대함으로 위에 언급한 세 가지 항목이 국제협약에 명백히 위반되었는지 여부를 판별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략)     


이어 특사들의 사진과 함께 ‘축제의 해골(La squelette de la fete)’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것은 당시 최고 언론인이었던 윌리엄 스테드와 특사 사이에 이루어진 기자회견 형식의 기사입니다. ‘축제의 해골’이란 축제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집트인들이 잔칫상에 해골을 올려두는 관습을 일컫는 말입니다. 평화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있는 '축제' 와중에 비참하게 사라져 가는 '해골'과 같은 운명의 대한제국과 특사를 말하려 한 것이었을까요? 


기자협회의 도움으로 대한제국의 억울한 입장과 일본의 야만적인 침략 행위를 규탄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곳은 회의장 밖이었고, 정작 44개국 239명의 대표들이 모인 만국평화회의는 기사의 저택(De Ridderzaal)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ferance de la Paix」7월 5일 자에  실린 특사 3인의 사진(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은 잘 알려져 있지요.


특사 이준헤이그의 별이 되다.    

 

7월 14일, 지금은 이준 열사 기념관으로 바뀐 드용(De Jong) 호텔의 2층 방에서 이준이 순국합니다. 사망 원인은 분분합니다. 통분의 한을 삭히지 못해 돌아가셨다는 설과 자결설, 독살설 등이 있습니다. 국내에는 대한매일신보가 자결설로 보도해 독립운동에 더욱 불을 지폈습니다.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지고 두 달 넘는 긴 여정 끝에 낯선 도시에 도착했는데, 방해와 무관심 속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얼마나 깊은 절망에 빠졌을까요? 그 절망감과 슬픔은 분명 육체의 병이 되어 그의 생명마저 앗아갔을 것입니다. 

          

평화회의 기간 동안 특사들이 머물렀고 이준 열사가 순국한 역사적인 장소인 드용(De Jong) 호텔이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합니다. 교민 이기항 씨와 그의 부인 송창주 씨가 헤이그시 당국을 설득해 철거를 막고 사재를 털어 건물을 매입했습니다. 그리고 1995년 ‘이준 열사 박물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유럽에 있는 유일한 독립유적지를 국가가 아닌 개인이 나서 만들고 지키고 있는 실정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무관심이 만든 일입니다.                                    


이준 열사가 마지막 숨을 거둔 드용(De Jong) 호텔 2층 방입니다.

     

이준 열사의 시신은 헤이그의 공원묘지에 묻혔다가 1963년이 되어서야 모셔와 국민장으로 서울 수유리에 안장했습니다. 뜻을 이루지도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지도 못한 이준 열사가 쉽게 눈을 감을 수 없었으리라 생각 하니 마음이 더 무거워집니다. 


이제 56년간 이준 열사의 유해를 모셨던 묘역지로 향합니다. 이기항 원장님이 주신 공원묘지 가는 길을 꼼꼼히 적어놓은 안내지를 받아 들고 트램을 탑니다.  Kamperfoeliestraat역에 내려 Nieuw Eykenduinen 공원묘지에 다다릅니다. 공원 앞 작은 꽃집에서 소담스러운 국화 한 다발도 삽니다. 공원묘지로 들어서는 내 마음은 무척이나 두근거립니다. 아! 열사의 흉상과 비석이 멀리서도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꽃에 둘러싸여 있는 아름다운 당신이기에. 조국에 대한 그의 애틋한 마음은 분명 헤이그 하늘의 별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준 열사가 처음 묻혔던 묘역지에 그를 기리는 꽃이 끊이질 않습니다. 


헤이그 특사, 당신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7월 19일,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을 빌미로 벼르고 벼르던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함께 군대도 강제 해산합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에 저항할 마지막 수단마저 상실하게 됩니다. 헤이그 특사 3인에 대해서는 발 빠르게 궐석재판을 엽니다. 이상설에게 사형,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하여 체포령을 내렸지만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준 열사를 헤이그에 묻은 뒤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미국 대통령에게 면회를 신청, 거절당하고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의 지원을 요청한 후 다시 헤이그로 돌아오지요. 만국평화회의에 끝까지 주력하기 위해서였습니다. 


9월 5일에는 헤이그를 떠나 파리, 베를린, 런던 등지를 돌며 구국 연설회를 개최한 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갑니다. 이위종의 아버지 이범진으로부터 1만 루블을 받아 연해주의 의병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두 사람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갑니다. 모든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남은 두 특사는 자신들의 임무를 포기하지 않고 눈물겨운 노력을 이어간 것입니다.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이상설은 1910년에 중·러 접경지역 한흥동(韓興洞)에 최초의 독립군 운동 기지를 세웠고, 1914년 이동휘, 이동녕 등과 함께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일본과 러시아가 연합국으로 동맹하여 한인의 정치·사회 활동을 엄금했기 때문에 활동을 하지 못한 채 해체되었고 이상설은 1917년 망명지인 니콜 리스크에서 한을 품은 채 병사합니다.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워졌습니다.      


한편, 이위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시 돌아가 주 러시아 공사였던 아버지 이범진을 도와 한일병합(1910년) 직전까지 공사 업무를 지속했습니다. 한일병합 직후 아버지 이범진이 망국의 슬픔을 이기지 못해 권총으로 자결했고, 그에 앞서 형 이기종은 헤이그 특사 사건 직후 일제에 체포당해 고문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었다가 객사하고 맙니다. 


아버지의 죽음 후 이위종은 러시아 블라디미르 사관학교에 입교했고 사회주의자로 변모합니다. 그간 이위종의 행적이 잘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장교로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러시아 내전 당시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군에 가담해 싸웠습니다. 내전 종결 후에는 소련 공산당의 간부로 활동하였다는 것이 우리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헤이그 특사 사진 속 앳된 스무 살 청년의 삶은 이토록 파란만장했습니다.   


몇몇 기록만을 남기고 기껏해야 100여 년 전 역사는 그렇게 묻혔습니다. 그러나 헤이그는 분명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동양의 먼 나라에서 온 세 남자를 말입니다. 낯선 땅에서 결코 환대받지 못했고 구국의 외침은 공허하게도 사라졌지만 그것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제 당신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독립국의 열망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어느 나라에도 기대지 않고 우리의 실력을 키우는 일, 그것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나라를 위한 고결한 당신들의 마음,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 고령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암스테르담에서 헤이그로 출근해 이준 열사 기념관(Yi Jun Peace Museum)을 지켜내고 계시는 이기항 이준 아카데미 원장님과 기념관 관장님이신 부인 송창주 님의 노고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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