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의 조선 조정은 화포 기술 외엔 관심이 없었고 무엇보다 중국과 일본을 제외하고는 국제 정세를 너무 몰랐습니다. 특히 서양 세계에 대한 지식과 이해는 일반 백성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배계층조차도 한참 부족하여서 하멜은 그의 보고서에 ‘조선 사람들은 세상에 12개의 나라, 혹은 왕국뿐이라고 생각한다.’, ‘조선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남반국이라 부르는데, 일본인들이 포르투갈을 부를 때 쓰는 말과 같다. 조선 사람들은 우리 네덜란드인이나 네덜란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적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토록 외부세계에 폐쇄적인 조선의 모습은 조선 이전 왕조들의 대외관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신라의 통일 직전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그 개방성과 국제성은 최고조에 이릅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얼마나 외부세계를 향해 열려있었는지는 지난 시리즈 '신라가 우리에게 남긴 경이로운 유산-개방성의 DNA'에서 이미 소개를 했었지요.
해로와 육로를 이용해 인도와 서역에 다녀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라는 여행기를 남긴 혜초 스님(704~787)과 서·남해를 제패해 동아시아 문명교류를 주도한 해상왕 장보고(790~846), 바닷길을 통해 이슬람 상인과 활발히 교류해온 신라에 많은 무슬림들이 들어와 정착했다는 이슬람 측의 많은 기록들이 무색해집니다. 신라가 뛰어난 항해술과 조선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고려는 더 나아가 고려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려 지금의 코리아(COREA)라는 이름의 어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와 민족, 심지어 무슬림까지 다양한 귀화인들을 품은 다문화의 나라였습니다. 이런 다문화의 기록은 역사서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의 흔적은 조선 전기의 기록을 끝으로 더 이상 발견되지 않습니다. 하멜조차 ‘조선의 고문서에는 세상에 8만 4천 개의 나라가 있다고 쓰여 있지만, 그들은 그것을 허구하고 생각한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17세기 풍속화로 보는 조선입니다-왼쪽 위부터 윤두서의 < 쑥 캐기>, 조영석의 <목기 깎기>와 <새참>
하멜이 온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 헤릿 다우 <Astronomer>, 얀 베르메르 <The Milkmaid>, 얀 스텐 <Festival Family Meal>
호기심과 열정으로 가득 차 세계를 넘나들던 국제성과 개방성은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다 어디로 숨어버린 것일까요? 조선은 왜 이다지도 외부 세계와 담을 쌓고 바깥세상에 눈을 감아버린 것일까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1653년(효종 4년) 하멜 일행이 조선에 도착하기 직전, 조선은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이라는 큰 전쟁을 연달아 치렀습니다. 이 두 번의 전란은 조선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변화시켰습니다. 인구의 삼분의 일이 줄고, 농경지는 황무지가 되어 경작이 어려워졌습니다. 궁궐을 비롯한 국가의 중요한 건물과 사찰이 불타고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청나라로 끌려갔습니다. 무엇보다도 조선을 더욱 피폐하게 한 것은 병자호란 후 청의 무리한 조공의 요구와 착취였습니다. 조선의 국력은 쇠약해졌고, 도둑이 들끓는 등 사회는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습니다.
하멜 일행이 억류되었던 13년간은, 청나라 선양에 왕자의 신분으로 포로가 되었다 돌아와 왕위에 오른 효종대와 극심한 흉년과 유래 없는 추위로 대기근이 3년(1659~1661) 간 조선을 휩쓴 현종 대였으니, 신항로 개척의 물결을 타고 상업과 금융의 호황과 그에 따른 경제적 황금기를 누리고 있던 나라에서 온 이방인으로서 하멜 일행이 겪어야 했던 고초는 상당했으리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조선은 이 두 번의 전쟁으로 외부 세계에 대해 극도로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입니다. 야만족으로 무시하던 일본과 청나라에 차례로 짓밟혔기에 외국인에 대한 의심과 반감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조선을 세상에 알리려고도 세상을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확 줄어들었습니다. 게다가 효종과 지배 계층의 현실성 없는 북벌론(北伐論,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고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기 위해 청과의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미 중국 대륙을 지배하게 된 청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아 중국 선진 문화의 수입 통로를 막는 결과를 낳습니다.
남도(南道)의 해안가와 섬에는 적이 침략해 올 것에 대비해 공도(空島) 정책을 강화하는 등 방어적이고 폐쇄적인 대응이 주를 이룹니다. 공도정책은 원래 태종이 '죄인들이 섬으로 도망쳐 숨어버리고, 주민들이 세금을 내놓지 않는다.'는 이유로 울릉도 및 독도 지역에 시행한 정책인데, 점차로 왜구의 침략에 방어하기 위해 남쪽 해안가나 섬의 백성들을 내륙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으로 강화되어 갑니다.
또 전쟁 전에는 외국의 배가 표류해 조선에 도착했을 때 인도적 차원에서 자국으로 돌려보내 준 것과는 달리 조선의 군사 상황이 알려질 것을 극도로 경계하여 감시하고 심지어 억류하기까지 합니다. 바로 이 시기에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와 하멜 일행이 조선에 오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것으로 조선이 중기 이후 고립을 자처한 이유가 충분할까요? 우리 역사상 전쟁은 늘 존재해왔고 그때마다 용감히 싸워 외적을 물리친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기에 단지 두 번의 전쟁이 조선을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교가 심화되면서 상업을 멸시하는 풍조가 조선 중기 이후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린 것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하여 조선의 선비, 농부, 장인, 상인 등 네 가지 신분을 아울러 부르는 말이 있습니다. 이 양인 신분 네 직업군 중 유독 장인과 상인은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특히 상인과 상업을 매우 멸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세상을 바꿔놓은 위대한 활동과 이동은 모두 상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과거로부터 위험천만한 사막길(비단길)과 바닷길을 통해 용감한 상인들이 동서 세계를 연결해 나갔고,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 무역의 이익을 얻기 위한 유럽의 모험은 신대륙 발견으로 이어졌습니다. 신라와 고려의 상인들 역시 교역과 이익을 위해 주저함 없이 외국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백성들은 기본적으로 조선 밖을 나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외국으로 가는 사신이나 통역관처럼 조정의 허락을 받은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지요. 외국과의 교역은 주로 관(官)의 주도하에 이루어집니다. 조선의 상업을 경시하는 풍조와 교역을 지나치게 관의 주도하에 둔 폐쇄적인 교역이 조선이 점차로 외부로 향해 난 문을 닫게 된 주요한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하멜 일행이 조선을 탈출해 곧장 일본의 나가사키로 간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일본의 사정은 조선과는 달랐을까요? 그 궁금증을 다음 이야기에서 풀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