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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Jun 09. 2022

『하멜표류기』‘Q & A’로 보는 사건의 전말

하멜은 왜 나가사키로 갔을까 1

하멜이 탈출에 성공한 여수 구항 방파제 끝단에 2004년 빨간색 하멜 등대가 세워졌습니다.   


1666년(현종 7년) 9월 4일 여수 앞바다.

달이 지고 고요히 썰물이 시작됩니다. 세상 모든 것이 잠든 시간, 이제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졌습니다. 잔뜩 긴장한 채 숨을 죽인 푸른 눈의 남자 여덟이 작고 허름한 배 하나에 겨우 의지해 전라남도 여수 아니 조선을 탈출합니다. 이번이 세 번째 탈출 시도입니다. 목숨을 건 탈출, 이들은 과연 성공하였을까요? 배는 순항하여 6일에 일본 히라도(平戶) 섬 부근에 도착합니다. 8일에는 일본 배의 추격을 받아 붙들렸지만, 14일에 이르러 그들이 가고자 했던 나가사키(長岐)의 데지마(出島)에 드디어 도착합니다! 일행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나가사키 부교(奉行, 태수)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습니다.     


Q: 너희는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디서 오는 길인가?

A: 우리는 화란(네덜란드)인이며, 코레아에서 오는 길입니다.     


Q: 너희는 그곳에 어떻게 가게 되었으며, 어떤 배로 갔는가?

A: 1653년 8월 16일 우리는 닷새 동안이나 계속된 폭풍우 때문에 우리가 타고 간 스페르베르 호(號)를 잃게 되었습니다.   


Q: 배가 난파한 곳은 어디며, 승무원은 몇 명이었고 대포는 몇 문이나 있었는가?

A: 난파한 장소는 우리가 퀠파트(가파도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범선의 한 유형인 Quelpart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라 부르고 코레시안(Coresian은 하멜 일지에만 나타나는 표기법, 당시는 코레아(Corea)에 대한 표기법이 아직 확립되지 않은 때였음. 코레아는 고려에서 온 것으로 추정)들이 제주라 부르는 섬입니다. 승무원은 64명, 대포는 30문이었습니다.     


Q: 배에 실린 짐은 무엇이었으며, 어디로 가는 길이었는가?

A: 우리는 대만에서 출항하여 일본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배에 실린 것은 녹비((鹿皮), 설탕, 용뇌(龍腦) 및 기타 물건들이었습니다.      


Q: 구조된 승무원과 화물, 대포는 어느 정도였는가?   

A: 28명의 승무원이 죽었습니다. 물품과 대포는 소실되었습니다. 뒤에 하찮은 물건들을 약간 건졌지만 이 물품들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Q: 너희는 그 섬에 얼마나 체류했으며, 그곳에서 어디로 끌려갔는가?

A: 섬에 표류한 지 10개월이 지나 우리는 국왕의 소환을 받고 서울이라는 도성의 대궐로 불려 갔습니다.     


Q: 너희는 도성에서 얼마나 살았으며 거기서 무엇을 했는가? 국왕은 너희에게 생활하라고 무엇을 주던가?

A: 우리는 그들의 풍습에 따라 3년간 살았으며, 훈련대장의 호위병으로 일했습니다. 우리는 급료로 달마다 70캐티(말레이어 ‘카티’, 1캐티는 약 600그램) 쌀과 약간의 의복을 지급받았습니다.     


Q: 무슨 이유로 국왕은 너희를 도성에서 내보냈으며, 어디로 내보냈는가?

A: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일행 중 일등항해사와 다른 선원 하나가 중국을 경유해 고국에 돌아가려고 만주 사절단에게로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국왕은 우리를 전라도로 추방했습니다.  


Q: 너희는 전라도에서 몇 년을 살았으며 어디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얻었는가, 그곳에서 너희 중 몇 명이 죽었는가?

A: 우리는 병영(兵營, 전남 강진)이라는 고을에서 7년가량 살았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매달 50캐티의 쌀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입을 것과 부식을 너그러운 사람들에게 얻어 썼습니다. 그동안 11명이 죽었습니다.  


Q: 너희는 왜 다른 고장으로 보내졌는가, 그리고 그 고장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A: 1660년, 1661년, 1662년에 비가 내리지 않아서 한 고을만으로는 우리가 먹는 식량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국왕은 작년에 우리를 3개의 다른 고장에 분산 배치했습니다. 좌수영(여수에 전라 좌수영이 있었음)에 12명, 순천에 5명, 남원에 5명을 배치했는데, 이 고을들은 모두 전라도에 있습니다.        


Q: 너희는 그때 모두 몇 명이 살아있었는가,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알리고 달아났는가 아니면 안 알리고 달아났는가?

A: 그때 살아 있었던 사람은 모두 16명입니다. 그중 우리 8명은 나머지 동료들에게 알리지 않고 탈출을 결심했습니다.      


Q: 너희는 전에도 탈주한 적이 있는가, 왜 두 번이나 탈주에 실패했는가?

A: 이번이 세 번째 시도였습니다. 처음 두 번은 실패했습니다. 맨 처음은 퀄파트 섬에서였는데, 우리는 그들의 배 구조를 알지 못했고 돛대가 두 번이나 부러지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두 번째 시도는 도성에서 만주 사절단에게 호소하여 탈주하는 것이었으나, 사신이 국왕에게 매수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Q: 너희는 국왕에게 내보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는가, 국왕은 왜 그 요청을 거절했는가?

A: 국왕과 조정 대신들에게 여러 번 요청했으나, 그들은 자기 나라 사정을 다른 나라에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외국인을 나라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고 늘 대답했습니다.


이외에도 그들의 무기와 군사 장비는 어떠하던가, 성이나 성채가 있는가, 그들이 바다에 띄우는 전선(戰船)은 어떤 종류인가, 그들은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가, 쌀과 다른 곡물들은 많이 생산되는가, 무역을 하기 위해 코레아에 오는 외국인이 있는가 또는 다른 어떤 곳에서 교역을 하는 코레시안이 있는가, 그들은 중국과 무슨 교역을 하는가, 은광이나 기타 광산이 있는가 등 54개 질문이 쏟아집니다.    

 

이 Q&A는 8명의 네덜란드인 중 한 명이었던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1630~1692)의 보고서, 일명 『하멜 표류기』(1668, 원제는 『야하트 선 데 스페르베르 호의 생존 선원들이 코레 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켈파트 섬에서 1653년 8월 16일 난파당한 후 1666년 9월 14일 그중 8명이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할 때까지 겪었던 일 및 조선 백성의 관습과 국토 상황에 관해서』)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1653년 인도네시아 바타비아(Batavia, 지금의 자카르타)를 출발해 타이완을 거쳐 나가사키로 교역을 위해 떠났던 네덜란드 동인도 연합 회사 소속의 스페르베르(Sperwer) 호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합니다. 이때 살아남은 서기 헨드릭 하멜이 13년간 조선에서 생활하며 보고 겪은 일들을 기록한 책이『하멜표류기』입니다. 원래 억류된 기간 동안의 밀린 월급을 회사로부터 받기 위해 쓴 보고서이지만 조선을 서양에 알린 최초의 문헌이라는 가치를 갖고 있지요.

여수 하멜전시관의 『하멜 표류기』(1668) 육필원고 복제본으로 진본은 네덜란드 국립공문서보관소 소장, 오른쪽은 1934년 이병도가 영·불역본을 번역해 실은『하멜 표류기』


그런데 말입니다, 위 인터뷰에서 조선에 대한 정보를 집요하고도 구체적으로 질문하고 있는 일본 관리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일본 관리는 조선의 무기와 군사 장비, 요새의 위치와 식량 실태, 정치적 상황, 조선인의 종교와 생활 모습까지, 중요한 정보에서부터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까지 꼬치꼬치 캐묻습니다. 정보를 수집하려는 치밀함이 엿보입니다. 또한 근대 서구식 행정절차에 익숙한 모습도 보입니다. 하멜 일행이 표류하다 도착한 제주에서 제주 목사에게 받은 질문이나, 한양으로 압송된 뒤 효종의 심문에서도 이와 같은 논리적인 인터뷰는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지를 물었을 뿐 왕과 대신들은 하멜 일행에게 그들의 춤과 노래를 부르게 하며 그저 신기한 재밋거리로만 대했습니다. 일본 관리의 인터뷰와는 대조적입니다.


통역의 어려움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들보다 26년 먼저 조선에 도착해 조선인으로 살고 있던 같은 네덜란드인 얀 얀스 벨테브레이(Jan Janse Weltevree, 1595~?)가 통역관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기 때문입니다. 벨테브레이는 1627년 오버커크호를 타고 일본으로 가다가 조선 해안에서 사로잡혔는데, 동료 2명은 1636년 병자호란에서 전사했고 그는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중국에서 수입된 홍이포의 제작과 조정법을 지도하며 조선인 박연으로 살다 조선에서 숨을 거둔 인물입니다. 원산 박 씨의 시조이기도 하지요.      


하멜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에서 탈출한 일행 중 서양식 배를 만들 수 있는 선박 제조 기술자와 장거리 항해에 필요한 기술을 가진 사람 등 다양한 기술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스페르베르 호에서 살아남은 애초의 36명을 조선의 조정은 왜 충분히 조사하지 않았는지, 왜 그들로부터 정보를 얻어 활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들로부터 당시 국제 정세를 듣고 교역을 통해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1668년 암스테르담에서 간행한 스티히터 판본에 실려있는 8장의 삽화(목판화) 중 일부-유럽 출판인들의 상상력이 가미된 조선의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효종이 유럽 왕의 모습이군요^^


조선이 세계를 향한 호기심을 잃고 문을 꽁꽁 닫아버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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