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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Jun 03. 2022

수용하고 융합하는 능력자들

신라가 남긴 경이로운 유산, 개방의 DNA 4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brunch.co.kr)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신라의 국제인은 장보고뿐만이 아닙니다. 2013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여 시진핑 주석을 만났을 때 시진핑이 신라 말의 대석학 최치원(崔致遠, 857~?)의 ‘범해(泛海)’라는 시로 말문을 열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인연이 깊고 교류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겠지요. 최치원은 겨우 12세에 당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조기유학인 셈입니다. 놀랍게도 18세에 외국학생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급제하고 관리가 됩니다. ‘범해’는 최치원이 고향을 떠난 지 17년 만에 귀국하는 배에서 읊은 시로 추정됩니다.     


돛 걸고 바다에 배 띄우니

긴 바람  만 리나 멀리 불어온다.

...(중략)

봉래산이 지척에 보이니

나는 또 신선을 찾네.      


최치원을 모신 전북 정읍의 무성서원입니다. 2019년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지요. 강당과 누각(현가루) 뒤에서 바라본 풍경이  이토록 소박하고 정감이 갑니다.
무성서원이 소장하고 있는 최치원 영정입니다.(채용신 作, 1924년)


외국인과 외국 문물에 개방적인 당의 분위기를 타고 최치원처럼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아시아 각국의 학생들이 수도 장안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신라에서는 640년(선덕여왕 9) 최초의 유학생을 당으로 보낸 후 주로 6두품 이하의 지식계층이 대거 유학을 떠났습니다. 국비 장학생을 선발해 당의 국자감에서 수학하도록 했는데 수학기간은 약 10년이었고, 서적구입비는 신라가, 체류 경비는 당이 지불했습니다. 신라 전성기에는 200명이 넘는 신라 학생들이 국자감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 외국인은 모두 90명이었는데, 그중 80명이 신라인이었으니 신라인의 독무대였습니다. 합격생들은 당에서 관직을 받아 활동하거나 신라로 돌아와 신라의 학문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했습니다. 최초의 빈공과 급제자인 김운경을 필두로 신라 3최로 불리는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등이 모두 빈공과 급제자들입니다. 그들을 통해 신라는 학문의 융성기를 맞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신라의 승려 역시 일반 유학생 이상으로 당에서 명성이 높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층이었던 승려들 역시 당으로 공부하러 가기 위해 과감히 바다를 건넜습니다. 일부 승려들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당을 거쳐 부처의 나라인 인도로 구도의 길을 떠났습니다.           


1908년 프랑스의 탐험가 폴 펠리오(Pelliot P.)는 중국의 간쑤성(甘肅省) 둔황 막고굴에서 희귀한 고서들을 사들였는데 그중에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라는 책이 끼어있었습니다. ‘5 천축국으로 여행 갔던 기록’이라는 뜻으로, 천축국은 인도이고 인도를 다섯 지방으로 구분해 5 천축국입니다. 당나라 승려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다가 1915년에 이르러 일본의 사학자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가 저자인 혜초(慧超, 704~787)가 신라 승려임을 입증합니다. 이 책은 비록 일부만 남아있지만 8C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기록이라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된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과 디지털 복원된 혜초(정수일, 박진호 제작)입니다.


혜초는 16세에 광저우(廣州)로 건너가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密敎, 실천 위주의 대중불교운동)를 배우고, 그의 권유로 723년경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인도의 불교 유적을 순례하고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일대까지 답사하면서 그들 나라의 종교, 정치, 문화, 풍습을 기록하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727년 당으로 돌아옵니다. 8세기 신라인이 육로와 해로를 동시에 이용해 당을 거쳐 인도와 중앙아시아까지 구도의 길을 떠났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불교의 구도자로서 종교적 열망이 주된 동기였겠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 신라인의 진취성과 국제적인 마인드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8세기 신라인, 혜초의 놀라운 여정입니다.


이 책에 그가 남긴 다섯 수의 시는 그 여행길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며 심지어 목숨마저 잃을 수 있는 위험한 길이었는지 보여줍니다. 혜초가 같이 여행하던 동료가 죽자 깊은 슬픔에 빠져 쓴 '비명로(悲冥路, 저승길을 슬퍼하다)'라는 시를 감상해보겠습니다.   


고향의 등불은 주인을 잃어

타향에서 보배로운 나무가 꺾어져 버렸도다.

신성한 영혼은 어디로 가버렸기에

옥 같던 모습은 이미 재가 되었는가?

잊지 못하고 그리워서 슬픈 감정 간절하지만

그대 소원을 따르지 못해 가슴이 아프다오.

고향으로 가는 길 누가 알고 있는지

흰 구름 돌아감을 헛되게 바라본다.     


나머지 시들도 끝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멀고 먼 타향에서 육신의 고단함과 향수로 눈물 흘리는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어 120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립니다.        


혜초에 앞서 15세 어린 나이에 당으로 건너가 경전 번역에 참여한 6개 국어에 능통했던 원측(圓測, 613~696)은 뛰어난 인품으로 여제(女帝)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존경을 받았다 전합니다. 한국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義湘, 625~702), 성덕왕의 장남으로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은 지장(地藏, 696~794) 등 수많은 신라 승려들이 당으로 건너가 활약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학을 떠나지 않은 순수 국내파 원효(元曉, 617~686)의 『십문화쟁론(十門和爭論)』은 산스크리트어로 번역되어 인도에 소개되기까지 했으니 신라 불교의 세계적 수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외래문화에 대한 개방성과 국제성은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발전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통일전쟁이 시작되기 전, 백제 의자왕의 끈질긴 공격과 여성으로서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에 대한 불신으로 신라 국내 정세는 매우 어지러웠습니다. 나라 안팎으로 위기를 겪던 중 김유신과 손잡고 정권을 잡은 김춘추(金春秋, 604~661)는 상대등 비담의 난을 제압하고 마지막 성골 왕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을 왕위에 올리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는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은 신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당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는 당 태종으로부터 백제를 공격할 군사를 얻는 데 성공합니다.


당의 복식을 수용하기 전과 후의 토용입니다. 확연히 차이가 나는군요.(국립경주박물관 소장)


한반도의 동남쪽 외진 곳에 위치한 나라, 신라에서 온 김춘추는 어떻게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극한 당 태종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을까요? 김춘추는 대뜸 군사부터 청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공자에 제사 지내는 의식과 경전의 강론 듣기를 청하고 관리들의 공복(公服)을 고쳐 중국의 제도를 따르겠다고 해 신라가 그저 무지한 변방의 국가가 아님을 어필합니다. 또 귀국해서는 중국의 의관, 책봉, 연호를 받아들이는 등 중국 문화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이러한 문화 외교가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치세라 불리는 ‘정관의 치’(당 태종 이세민의 치세를 일컫는 말)를 이뤄낸 태종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끔 저자세의 굴욕 외교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시의 국제 외교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오해라 볼 수 있습니다. 근대 이전의 동아시아의 외교는 '조공과 책봉'이라는 말로 대표되는데요, 이것은 중국의 주변국이 조공과 책봉이라는 공식적인 교류를 통해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고 중국의 침략을 사전에 방지하려는 외교정책입니다. 김춘추의 외교를 굴욕 외교로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또 간혹 신라의 삼국통일을 두고 외세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 국가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의 옛 땅인 만주를 영원히 잃게 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이 시기를 지금의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신라에게 백제와 고구려는 이웃의 위협적인 경쟁 국가였을 뿐이니까요. 오히려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바다를 건넌 국제적 감각을 지닌 김춘추와 같은 지도자가 백제와 고구려에는 없었음이 안타까울 뿐이지요. 김춘추의 이러한 영리한 외교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태종무열왕릉(왼쪽) 한편에는 비신(碑身)이 사라진 귀부와 이수(오른쪽)가 남아있습니다. 이수에 '태종무열왕지비'라 새겨져 있어 이 무덤의 주인을 확실히 알게 되었답니다. 국보입니다
MBC 드라마 <선덕여왕>(2009)의 김춘추 -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등은 김춘추의 용모가 아름답고 언변이 매우 뛰어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승호 배우처럼 말이지요~^^


마침내 신라는 당과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한반도의 통일을 이룹니다. 그러나 당은 약속을 어기고 한반도 전체를 복속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지요. 고뇌 끝에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과 신라 조정은 전쟁을 치르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이것이 바로 나당전쟁(670~676)입니다. 처음부터 엄청난 국력과 군사력의 차이가 존재하는 전쟁이었지만 신라의 무모하기만 한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신라는 당의 서쪽에 강성해진 토번(吐藩, 7C 초~9C 중엽에 활동한 티베트 왕국)이 당의 목을 죄고 있어 양쪽에 전선을 두기는 어려울 것이며, 국경을 접하고 있는 토번에 군사력이 집중되리란 것을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676년 토번이 공격해오자 신라에서의 군대 철수가 논의되기 시작하였으니 이는 신라가 얼마나 국제 정세에 민감하고 정보에 밝았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될 것입니다. 결국 신라는 7년에 걸친 당과의 장기전을 치렀지만 한반도를 지켜냈고 화려한 통일신라시대로의 문을 열게 됩니다.  


202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20여 년간 주둔하던 미군이 철수하고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인 탈레반이 정권을 잡으면서 많은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한국군이 주둔할 때 도움을 주었던 380여 명의 아프간인이 들어왔습니다. 6·25 전쟁 때 우리 역시 난민이 되어 많은 나라의 원조와 도움으로 성장했기에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여론과 무슬림은 한국인과 절대 어울려 살아갈 수 없다며 난민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도 서유럽 국가처럼 테러에 노출될 것이라는 여론이 팽팽히 맞섰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타 문화에 개방적인 신라의 역사에서 보았듯이 우리가 무슬림과 어울려 사는 것 자체가 위험이고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이질적 문화라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인도주의적 차원을 넘어 국익의 기회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미 200만 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산업현장에서 기여하고 있는 현실에서 인구 절벽에 맞닥뜨린 한국 사회가 부족한 인구와 노동력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해결책이 아닌지 고심해 보아야겠습니다. 비단 경제적 차원의 이익만이 아니라 그들의 다양한 문화가 우리의 문화와 버무려지고 융합되어 우리 문화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미 신라의 역사에서 증명된 일이기도 합니다.      


폐쇄적인 한국 역사의 이미지는 조선 중기 이후의 기억 때문일 것입니다. 조선 중기 이후 바다를 잊고 문을 꽁꽁 틀어 닫은 채 반도 안에서만 머문 우리에게 돌아온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긴 원인을 밖으로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DNA에는 신라로부터 이어온 뛰어난 외래문화 습득 능력과 개방성, 문화를 융합(Fusion)하는 능력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인이 긴 시간 동안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었던 저력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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