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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May 26. 2022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신라가 남긴 경이로운 유산, 개방의 DNA 3

 밥그릇과 개 사슬을 금으로? (brunch.co.kr)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두목(杜牧, 803~852)은 자신의 저서 『번천문집(樊川文集)』에,  “OOO는 동쪽 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는 말을 남겼는데요, 여기에서 OOO에 들어갈 인물은 누구일까요?


정답은 바로...

신라의 장보고입니다!                                    


신라인의 개방적이고도 진취적인 기상은 동아시아의 국제교역을 주도한 장보고(張保皐, 790?~846)라는 국제적 인물을 탄생시켰습니다. 장보고는 지금의 전남 완도에서 평민의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장대한 꿈을 가진 사람이었지요. 일찌감치 당으로 건너가 강소성 서주(徐州)의 군중 소장(軍中小將)이 되었고, 시대의 흐름을 읽고는 군에서 나와 무역업에 뛰어듭니다.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는 8세기의 정치적 안정과 이로 인한 문화 전성기가 점차로 쇠퇴해 가고 있는 시기였습니다. 신라, 당, 일본 3국 모두 중앙 정부의 힘과 통제력이 약해지고 지방 토호들이 할거하자 공무역은 차츰 밀려나고 사무역이 성행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이에 장보고는 이미 산둥반도와 장쑤성(江蘇省) 일대에 대거 형성되어 있던 지금의 코리아타운과 같은 신라방의 신라인들을 한데 모읍니다. 그곳의 신라인들은 공부를 하러 온 유학생과 승려, 상인 등 계층과 직업도 다양하였지만 대부분은 굶주림을 피해 혹은 경제적 이유로 서해를 건넌 사람들이었습니다. 장보고는 이들을 유기적으로 연계하고 무역을 통해 부를 쌓아 나갔습니다. 중국을 다녀가는 신라인들에게는 숙소와 중국 현지의 정보를 제공했고, 심지어 백제 멸망 후 신라를 통하지 않고서는 당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했던 일본의 견당사나 승려, 학생들을 실어 나르기까지 했습니다.                            


장보고는 당나라의 중요한 무역항 중 하나였던 산동성 적산포(赤山浦)를 해상 무역의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중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항로였으니까요. 한국과 불과 94해리(약 174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하늘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천공항에서 웨이하이 공항까지는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습니다. 가깝다고 한들 천년 전 신라인들에게는 매번 목숨을 건 항해였겠지만 말입니다.   

중국 산둥성 석도항(적산포)과 신라방으로 추정되는 마을 전경입니다. 당항성(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서 출발해 중국으로 가는 최단거리 항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824년 장보고는 적산포 부근에 법화원이라는 절을 건립하고 불교를 통해 민심의 안정을 도모했습니다. 매년 500석의 곡식을 수확할 수 있는 사전(寺田)을 마련해 스님을 공양하고 손님을 대접하기도 했지요. 신라방의 구심점이었던 법화원에서 추석과 같은 명절이 되면 신라인들은 고국을 그리워하며 3일 밤낮 먹고 마시고 춤을 추었다고『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는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는 일본 천태종 3대조, 엔닌이 9년간(838~847) 당나라에 머물면서 자신의 행적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는 적산법화원에 2년 반 동안 머물며 장보고의 도움을 받았는데요, ‘신라인 해상왕 장보고의 통치 아래 있던 중국 내 신라방이 자신에게 베푼 배려가 아니었다면 해적의 위협으로 돌아가기 힘들었다.’며 고마움을 표현합니다. 돌아가서도 그 은혜를 잊지 못한 엔닌은 교토의 북동쪽 히에이 산에 적산선원(赤山禪院)을 짓고 적산대명신을 모셔 적산법화원에서 진 신세에 보답코자 했습니다.

현재의 산둥성 웨이하이 시 적산법화원 전경입니다. 붉은 표시한 부분이 적산법화원이고, 앞쪽으로 기념관과 동상 등 부속 건물들이 지어졌습니다.

   

몹시도 추운 12월, 돌다리를 건너 적산법화원으로 들어갑니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에 온통 붉은 소원리본이 달려있어 마치 단풍잎처럼 보이는군요^^:
지금도 상인들이 많이 찾는 교토 시의 적산선원은 재물신 적산대명신을 모신 작은 절로 적산대명신의 뿌리는 바로 장보고에 있습니다. (사진 중앙일보 제공)


1990년 중국 산둥성(山東省) 웨이하이(威海)시 석도(石島)에 적산법화원이 복원되었습니다. 8m에 달하는 장보고 동상의 거대함에 깜짝 놀랍니다. 기념관도 건립되었습니다. 이는 중국 정부가 공식 승인한 최초의 외국인 기념관으로 중국에서의 장보고의 위상을 드러냅니다. 규모도 대단하지만 전시된 패널의 내용도 무척 놀랍습니다. 한글과 한자로 병기되어 있는데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장보고의 활약상이 『신당서(新唐書)』등의 중국 측 기록을 통해 세세히 밝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인 관광객 유치의 일환으로 적산의 지역 기업이 대규모 자본을 투자해 복원한 관광지의 느낌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연간 10만여 명의 한국인이 이곳 적산법화원을 찾는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기념관의 서언에서 밝히고 있듯이 한국과 중국 양국의 유구한 교류의 역사를 장보고를 통해 재현하고자 한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적산법화원에서 내려다보이는 저 멀리 바닷가에 석도항과 옛 신라방으로 추정되는 마을이 평화롭게 펼쳐져 있습니다. 석도항을 드나들던 위엄 넘치는 장보고의 무역선과 물건을 싣고 내리는 활기찬 신라인들을 상상해봅니다. 신라인에게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터전이자 더 나은 삶을 꿈꾸는 희망으로 향하는 문이었겠지요.

적산법화원 장보고기념관 앞의 입이 떡 벌어지는 거대한 8m짜리 장보고 동상입니다.


이처럼 무역으로 승승장구하던 장보고는 828년(흥덕왕 3) 돌연 신라로 귀국해 흥덕왕을 알현합니다. 그리고는,   


중국을 널리 돌아다녀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노비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원하건대 저에게 청해(완도)를 지키는 일을 맡기시면 적으로 하여금 사람을 끌고 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라고 아룁니다(『삼국사기』). 흥덕왕은 군사 1만을 주었고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건설해 대사로 부임합니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상활동을 펼쳐 무법천지였던 서남해안 일대의 해적과 노예상을 소탕하고 당, 신라, 일본 세 나라를 연결하는 무역 네트워크를 형성해 청해진을 인적·물적 자원이 오가는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시킵니다.


동남아시아, 페르시아, 아랍의 화려한 물건들을 직접 거래하고 그것을 재수출하는 중계무역까지 도맡았던 장보고의 무역선은 당시로서는 입이 쩍 벌어지는 수준이었습니다. 한 척당 140여 명의 사람과 250톤가량의 물건을 실을 수 있는 당대 최고의 선박이었다니 믿어지시나요? 장보고의 선박은 날렵하고 밑이 뾰족한 형태를 하고 있어 파도에 강하고 빠른 속도로 항해가 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방수 격벽 13개실로 나누어져 있어서 암초에 의해 어느 한 부분이 파손되더라도 가라앉지 않고 항해를 지속할 수 있었지요. 또 튼튼한 돛을 지그재그 방식으로 움직여 역풍이 불어도 항해를 할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븐 쿠르다지바의 『도로 및 왕국 총람』에 기록된 아랍 상인이 신라로부터 수입한 품목 중에 ‘범포(帆布)’ 즉 돛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 이미 신라의 조선술과 항해술의 높은 수준은 널리 알려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완도군의 장보고기념관에는 청해진선박연구소가 제작한 장보고 무역선이 실물의 1/4 크기로 제작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장보고의 해상왕국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846년 중앙귀족들의 왕위쟁탈전에 휘말려 장보고가 피살되면서 청해진은 순식간에 해체되고 맙니다. 같은 시기 당나라에서는 독실한 도교 신자였던 무종(武宗, 814~846)의 불교 억압정책에 의해 전국의 사원이 해체되고 강제로 승려의 환속, 사찰 토지의 몰수가 이루어지면서 적산포의 법화원 역시 무참히 헐려버리고 맙니다. 이로써 화려했던 장보고의 해상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장보고의 해상왕국이 남긴 흔적들은 8~9세기 신라가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로 동중국해, 서해, 남해를 사실상 지배한 해양대국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지요.


국내에서는 천 년의 시간을 훌쩍 넘긴 1959년 태풍 사라호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청해진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전라남도 완도에서 썰물로 바닷길이 열릴 때만 건널 수 있던 작은 섬 장도(將島)가 청해진으로 추정되면서 10여 년간의 발굴조사를 마쳤고, 2008년에는 장보고기념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장도에 가기 위해 썰물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완도에서부터 180m의 목교를 연결해 장도 아니 청해진으로 언제든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해졌으니까요.

한반도의 거의 남쪽 끝인 완도로 가 다시 장도(청해진)까지 가기 위해서는 이제 180m 목교를 걸어서 건너기만 하면 됩니다.


서쪽 해안에서 시작해 청해진 입구까지 331m에 이르는 갯벌 속에서 당시에 박은 목책도 발견되었습니다. 방어용이었거나 선박이 안전하게 화물을 처리하도록 만든 접안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자연지형을 이용해 성벽을 쌓고 성의 높은 지점에는 연안의 상선과 해적을 감시하기 위한 고대(高臺)를 세웠습니다. 언덕 위 고대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무엇하나 막힘없이 시야가 툭 터지며 가슴은 뻥 뚫립니다. 맑디 맑은 푸른 바다와 섬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풍광은 쉽게 잊기 어렵습니다. 지긋이 눈을 감고 이 작고 아름다운 섬을 근거지로 거친 바다를 향해 두려움 없이 나아간 장보고와 신라인들을 그려봅니다. 돛을 올리고 노를 저어 중국과 일본으로 바다를 헤쳐 나아가던 그들의 힘찬 구령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습니다.               

야호!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에서 목책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신라의 놀랄만한 또 다른 국제인들의 이야기가 다음 글에 펼쳐집니다.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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