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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May 18. 2022

밥그릇과 개 사슬을 금으로?

신라가 남긴 경이로운 유산, 개방의 DNA 2

부리부리한 눈, 덥수룩한 수염의 그들은 누구일까? (brunch.co.kr)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단정한 봉분과 수준높은 석조물이 인상적인 원성왕릉의 모습입니다.(798년)


경주 시내를 벗어나 불국사 방향으로 가다가 더 남쪽으로 내려가 외동읍에 이르면 잘 갖추어진 호젓한 왕릉 하나가 사람들을 반깁니다.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능으로 추정됩니다. 괘릉(掛陵)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는데요, 이곳에는 원래 절의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을 메워 왕의 능을 조성했다고 전합니다. 샘이 솟는 곳이다 보니 물이 고여 왕의 시신을 바닥에 그대로 안치하지 못하고 양쪽으로 관을 거는 장치를 만들고 거기에 시신을 안치했습니다. 그래서 걸 괘(掛) 자를 써서 괘릉이라 불렀습니다. 좀 낯선 매장 풍습이긴 합니다만 지금도 능 주변이 축축한 것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괘릉의 십이지신상은 '아~~~역시 8세기!'라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섬세하고 완성도가 높은 예술 작품입니다. 하나하나 감상해보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또 단정하게 솟은 봉분 앞에는 돌사자 두 쌍,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 그리고 무덤임을 표시해주는 화표석(華表石) 각 한 쌍씩이 서로 마주 보고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그중 특히나 눈에 띄는 것은 단연 무인석상입니다. 깊숙한 눈에 우뚝 솟은 매부리 코, 귀 밑에서 턱으로 흐르는 수염과 머리에 쓴 둥근 터번, 헐렁한 상의에 치마 같은 하의까지 매우 사실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신라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호방한 기상이 느껴지는 이 무인상은 서역인의 풍모를 풍깁니다.

봉분 아래 호석(護石)에 새겨진 십이지신상의 섬세하고도 화려한 조각기법이 눈길을 끕니다.(왼쪽부터 뱀, 말, 양입니다^^)
서역인의 풍모를 풍기는 원성왕릉(왼쪽)과 흥덕왕릉(오른쪽)의 무인상입니다 .  


이와 비슷한 생김새의 무인석상을 볼 수 있는 곳이 또 있습니다. 경주의 북쪽 안강읍에 위치한 신라 제42대 흥덕왕릉(재위 826~836)입니다. 안강읍은 경주의 북부 외곽지역으로 경주 중심지에 비해 인지도가 낮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여행이나 답사를 하기에 무척 매력적인 지역입니다. 보기 드문 층수의 통일신라 정혜사지 13층 석탑은 이색적인 분위기를 뿜어냅니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서원’ 9곳 중 하나인 이언적(1491~1553)을 배향한 옥산서원(玉山書院)과 이언적이 지은 독락당(獨樂堂)에는 마치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하는 독특한 정취가 있습니다.


아쉽지만 아름다운 경주 북부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고, 소나무가 빽빽한 그림 같은 숲을 지나 흥덕왕릉으로 향해야겠습니다. 애처가로 유명한 흥덕왕은 즉위한 해에 정목왕후가 죽자 죽은 부인만 생각하며 왕비를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11년 뒤 눈을 감으며 부인과 합장하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합장릉이어선지 신라 후대의 다른 왕릉에 비해 봉분의 크기가 큰 편입니다. 우람한 모습의 무인석상은 원성왕릉의 무인석상에 비해 약간 더 크기는 하지만 조각 수법의 세밀함은 원성왕릉의 무인석상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지 않아도 흥덕왕릉의 무인석상 역시 서역인의 외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하나같이 방망이를 하나씩 들고 있는 모습도 같습니다. 이 방망이는 페르시아에서 유행했던 폴로(격구)가 실크로드와 당을 거쳐 신라에까지 상륙한 것으로 9~10세기에 아시아에서 대유행한 폴로 게임의 스틱으로 추정됩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원성왕릉과 흥덕왕릉의 무인석상에서 본 서역인의 모습은 경주 구정동 돌방무덤의 모서리에 세웠던 돌기둥에서도, 서악동 고분의 묘실 문에서도, 용강동 고분의 문관 토용상에서도 발견됩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실제로 서역인들이 신라로 들어와 조정의 문·무관 관리로서 상당한 지위를 차지하며 살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석공들의 상상의 산물일까요? 그도 아니면 당나라로부터 전래한 문물의 영향이었을까요?                                                           

경주 구정동 돌방무덤의 모서리 돌기둥에서도,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에서도 서역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서역 측의 기록에서 신라와 관련된 혹은 신라를 언급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면 의문이 풀릴지도 모릅니다. 그런 기록이 있을라고!라고 생각했다면 놀랄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신라를 언급한 기록은 한 두 개가 아니니까요. 우선 846년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dhibah, 820~912)가 쓴 『도로 및 왕국 총람』에 언급된 신라를 보면,     


중국의 맨 끝 맞은편에 산이 많고 왕들이 사는 곳이 있는데 바로 신라이다. 신라는 금이 많고 기후와 환경이 좋다. 그래서 많은 이슬람교도가 신라에 정착했다.         


966년 아랍의 역사학자, 알 마크디시의 『창세와 역사서』에는,


신라인들은 집을 비단과 금실을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밥 먹을 때 금그릇을 사용하고 개 사슬도 금으로 만든다.


또, 10세기 아랍의 헤로도토스라 불리는 알리 알 마수디(Ali al-Masudi, ?~957)의 지리서『황금 초원과 보석광산』에는,     


중국 해안의 맞은편 지역에 대해서는 신라와 그 부속 도서들을 제외하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라크인과 다른 외국인들이 그곳에 정착하여 조국으로 삼았다. 그들은 신선한 공기, 깨끗한 물, 기름진 토지, 늘어나는 이익과 수입의 증대, 풍부한 광물질과 보석류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곳을 떠난 자는 매우 적다.

        

이처럼 이슬람권에서 전해지는 신라와 관련된 기록은 20여 건이나 됩니다. 주목할 점은 17명의 무슬림 학자가 남긴 20여 건의 저술 중 9명이 쓴 10건이 무슬림의 신라 진출 사실과 활동을 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무슬림들이 교역이나 어떤 목적을 위해 신라에 왔다가 처용설화의 처용처럼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머물면서 신라사회의 구성원으로 융화되어 살았다는 의미이지요. 신라 왕릉을 지키는 무인석상이 단지 상상의 산물이거나 양식화된 예술품이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신라 사회가 생김새와 언어, 종교가 다른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데에 얼마나 열려있는 사회였는지를 함께 말해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이 시기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어울림이 이보다 수백 년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4~6세기, 지구 반대편 로마에서 온 제품들이 신라의 수도, 서라벌(지금의 경주)의 지배계층 사이에서 대유행했습니다. 특히 로마산 유리제품(로만 글라스)은 지중해~흑해~중앙아시아 초원길을 거쳐 만주와 한반도로 들어온 먼 길을 여행한 아주 귀한 교역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황남대총이나 천마총, 금령총과 같은 왕릉급 고분에서 출토됩니다.


7~8세기 통일신라시대에는 고리 무늬가 특징인 사산조 페르시아 계통의 유리잔이 주로 발견됩니다. 지중해와 로마~페르시아~중앙아시아~중국 시안(장안)~한반도를 관통하는 실크로드(비단길)가 그 교역의 장이었을 것입니다.

경주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로만글라스 계통의 아름다운 봉수(鳳首)형 유리병과 유리잔입니다.(4세기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왼쪽부터 그리스·로마 혹은 이에 영향받은 페르시아 계통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제 장식 보검, 금동 신발 바닥판, 금팔찌와 은잔이 놀랍습니다.(5~6세기,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또한 우리나라 고대 유리 유물 중 주종을 차지하는 엄청난 양의 유리구슬은 로마~인도~태평양(동남아)~중국~한반도로 가는 해양 교역로를 통해 대부분 전래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명 ‘인도-태평양 유리구슬’로 불립니다. 이처럼 다양한 통로를 통해 타 문명과 만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신라 사회의 큰 특징입니다. 신라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나갈 수 있었으니까요.                                      

미추왕릉 C지구 4호 무덤에서 출토된, 해로를 통해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감 유리 목걸이입니다.(5세기, 국립경주박물관)


바다를 종횡무진 넘나든 개방적이고도 진취적인 신라 국제인들의 활약이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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