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남긴 경이로운 유산, 개방의 DNA 1
검붉은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 큰 코와 긴 주걱턱 모습의 탈을 쓴 다섯 명의 남자가 오방(五方)을 나타내는 각기 다른 색상의 의상을 입고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하늘을 향해 새하얀 한삼 자락을 힘차게 떨쳐내기도 하고 두 손을 모아 악귀를 때리는 것 같은 동작을 취하기도 하지요. 이 춤은 유일하게 탈을 쓰고 추는 궁중무용인 ‘처용무(處容舞)’입니다. 본디 궁중 연회나 악귀를 몰아내고 평온을 기원하는 의식에 행하던 춤으로 우리나라의 중요 무형문화재이자 2009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 무형문화유산입니다.
처용무는 천연두와 같은 역병으로부터 백성과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염원으로 천년 이상 전승되어 왔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염병이 창궐한 시대에 인간은 그저 유행병이 멈추기만을 속수무책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학과 의학 기술이 크게 발달한 오늘날에도 COVID-19와 같은 새로운 전염병의 등장은 여전히 인류에 크나큰 위협일 수밖에 없는데요. 의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 이 땅의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을 그린 부적을 대문에 붙이는가 하면, 역신과 맞서 싸우는 처용이 등장하는 처용무를 보면서 잠시나마 불안을 잊고 용기와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 기괴한 처용탈의 주인공인 처용은 누구일까요? 처용의 존재는 『삼국유사(三國遺事)』(1281, 일연) 처용설화에 처음 등장합니다. 처용은 역신(疫神, 전염병을 옮기는 신)에게 자신의 아내를 빼앗기고도 아니 심지어 그 현장을 목격하고도 허허실실 노래를 부르며 물러가는 매우 통(?)이 큰 남자이지요. 역신이 그 모습에 감복해 줄행랑을 치고 만다는 어찌 보면 좀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삼국유사』에 실린 이 대범한 남자, 처용의 설화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볼까요?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 때의 일입니다. 왕이 개운포에 놀러 나갔다가 구름과 안개로 길을 잃게 되자 일관(日官, 천문 관측과 점성을 담당한 관원)을 시켜 점을 치게 합니다. 일관은 이것이 동해 용의 조화이니 좋은 일을 행해 풀어야 한다고 말하죠. 이 말에 왕이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명하니 구름과 안개가 순식간에 걷힙니다. 이곳이 개운포(開雲浦)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동해의 용이 기뻐하며 일곱 아들들을 데리고 나타나 왕의 덕을 찬양하고 춤추며 노래를 불렀는데, 이 들 중 한 명이 왕을 따라 서울에 와서 정사를 도우니 그가 바로 처용입니다. 왕은 그의 마음을 잡아두려고 미모의 여인을 주어 혼인시키고 급간의 관직까지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처용의 아내를 흠모하던 역신이 사람으로 변신하여 아내와 몰래 동침합니다. 처용이 그 현장을 목격하고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나자, 역신이 처용의 너그러움에 감탄해 무릎을 꿇고 사죄하면서 앞으로는 처용의 형상만 봐도 그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이후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 나쁜 기운과 역병을 물리쳤습니다. 다음은 처용이 아내의 불륜 현장에서 부른 노래인 향가 「처용가(處容歌)」입니다.
서울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하리.
참으로 달관의 경지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대문에 붙였다고 전해지는 처용의 얼굴 모습이 무척 독특합니다. 『악학궤범(樂學軌範)』(1493)에는 처용의 생김새에 대해 ‘넓은 이마, 무성한 눈썹, 우그러진 귀, 붉은 얼굴, 우묵한 코, 밀려 나온 턱, 숙어진 어깨’라고 표현하면서 처용 가면의 모습을 아래와 같이 그려놓았습니다.
『고려사(高麗史)』(15C)와 『용재총화(慵齋叢話)』(1525, 성현)등에 표현된 처용도 ‘기이한 몸짓과 복색, 붉은 피부에 흰 이’ 등 신라인의 모습이라 보기에 하나같이 거리가 있는 이국적인 모습입니다. 일부의 견해처럼 처용은 단지 독특한 외모를 가진 기인에 불과할까요? 또 처용설화는 현실과 거리가 먼 허구이자 가공의 이야기에 불과할까요?
그렇다면 『삼국유사』보다 140여 년 앞서 쓰인 『삼국사기』(1145, 김부식)에는 처용이 어떻게 기록되었을까요? 우선 처용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헌강왕 5년(879) 3월에 왕이 동쪽 지방의 주와 군을 두루 돌아다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어전에 나타나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모양이 괴상하고 의관도 이상야릇해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산이나 바다에 사는 정령(精靈)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설화가 아닌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이러한 사실적 기록은 140여 년이 흘러 가공, 윤색되어 『삼국유사』에서 처용설화로 둔갑하게 됩니다. 네 사람에서 일곱 아들로 바뀌는 등 내용상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삼국사기』의 사실적 기록이든, 『삼국유사』의 설화든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등장인물들의 외관이 신라인이 여태 보지 못한 생소한 모습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외국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외국인이라 가정한다면 그들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요? 처용이 출연한 개운포에 나타날 수 있는 외국인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개운포는 수도인 경주로부터 40여 km 떨어져 있는 천혜의 항구이자 내륙교통의 요지라는 입지를 갖춘 당시 국제무역항입니다. 지금의 울산광역시 남구 성암동 개운포 좌수영성(左水營城) 일대입니다. 당시 중국 남쪽 지방에는 당나라의 외국인에 대한 개방적인 정책에 힘입어 많은 서역인들이 교역을 위해 상주하고 있었고, 신라인들 역시 남해와 서해, 동중국해를 휩쓸며 이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기에 서역의 상인들이 개운포를 통해 신라로 입국한다는 가정은 그리 억측이 아닙니다.
아! 서역이 어디냐구요? 서역은 원래 중국인들이 막연하게 중국 서쪽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7세기 당대에 이르러 중앙아시아와 인도뿐 아니라 페르시아(이란)와 대식(아랍)까지 망라하는 넓은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분명 이렇게 반문할 겁니다. ‘그렇다면 그 기괴하고도 생소한 모습의 외국인이 이란이나 아랍의 상인이란 말인가요?’, ‘어떻게 그렇게 쉽게 단정 지을 수 있지요?’ 자, 지금부터 여러분께 들려드릴 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는 결코 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님을 먼저 밝혀두고 시작해야겠습니다.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