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고 촘촘한, 통영의 바다

그 바다와 나란히 걷기

by BOKI

나는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빨간 대문을 밀고 나가 서른 걸음만 가면 바다가 있었다. 구멍 숭숭 뚫린 시커먼 바위와 폭우라도 내리는 날이면 집을 통째로 집어삼킬 듯 철썩이던 거친 파도, 아름답고 낭만적인 여느 바다와는 거리가 멀지만 이만큼 보고 싶고 그리운 것이 또 없다.


통영의 바다는 투박하다. 또한, 무엇에도 유난스럽지 않다. 그곳 사람들의 삶을 밀고 썰고 들어 올리는 제 몫에만 열심이다. 파도 한번 높게 휘몰아치는 걸 볼 수가 없다. 그저 우리의 일상처럼 조용히 흐를 뿐이다. 그래서, 통영의 바다는 나란히 걷기에 좋다. 천천히 함께 걸으며 고달픈 한숨을 마음껏 내쉬어도 너그러이 받아줄 것만 같아서.


01. 일몰 무렵의 강구안, 그리고 해 저문 통영대교 길목

강구안에서 바닷길을 따라 삼십분쯤 느리게 걷다 보면 충무교와 통영대교를 만날 수 있다. 일몰 무렵에 출발하면 서서히 해를 감추고 빛을 밝히며 시시각각 변하는 아름다운 통영의 바다를 볼 수 있다. 미리 준비한 달콤한 꿀빵 두어 개와 좋은 음악 서너 곡만 있다면 이보다 행복한 산책길은 없을 것이다.


02. 안갯속 한려수도

미륵산-미륵봉 정상에서 바라본 한려수도. 안개 때문에 저 멀리 있는 섬들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야기를 잔뜩 감추고도 조용히 입을 다문 듯한 그 진중함이, 가볍지 않은 운치가 참 좋더라.


03. 한산도, 고뇌를 간직한 스루

400년 전 이순신 장군이 고뇌 어린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바라보았던 한산도의 바다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늘 궁금했다. 그리곤 바다가 이토록 고요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배 시간이 정해져 있음에도 걸음을 늦출 수밖에 없던 이유다. 저 검은 심연의 바다에 잠재운 시끄러운 속들이 내 부산한 발소리에 깨어날까 미안해져서.


바다에도 색과 질감이 있다. 검고 무겁고 촘촘한, 그래서 쉽사리 속을 내비치지 않는 통영의 바다는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함도, 에메랄드빛 아름다움도 없다. 그저 조용히 흐를 뿐이다. 그렇기에 찾아볼만하다. 그 앞에 서면 누구든 카메라 대신 바다를, 아니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자신을 바라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묵혀둔 내 마음 한 조각 흘려보내는 것, 이것이 바다를 찾는 이유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