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온을 만나고 돌아온 헤르나는, ‘상처가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외출을 금지’ 시키라는 스카드의 명령을 받은 집사 수의 감시를 받았다.
그녀는 마음대로 손님을 끌어들여 남의 집에서 진 치고 있으면서 구금이라니 뻔뻔한 거 아니냐며, 내 집 밖을 나가는 것도 허락이 필요하냐고 날뛰었지만, 가볍게 제압당했다.
스카드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헤르나의 측근에게 캐낸 정보로 압박해 왔다.
“네 몸에 칼을 박은게 브리텐드의 카퍼 백작이라며? 그런데도 네가 잠잠하다는 건,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뭔가 있는 거겠지. 내가 그것까지 캐서 널 곤란하게 만드는 걸 원치 않는다면, 이번에야말로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그의 눈길은 협탁에 놓인 편지로 향했다.
“...읽었어?”
당황한 그녀가 눈치를 살폈지만, 스카드는 내가 남의 편지를 몰래 읽는 놈으로 보이냐며 얼굴을 찌푸렸다.
대체 뭐가 쓰여있길래 그러는 거냐고 다가오는 그를 향해 손을 휘젓고서, 얌전히 있겠다는 말로 이야기를 끝냈다.
떠밀리 듯 방 밖으로 나간 스카드를 보고 헤르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빚은 없어도, 널 위해서라면 기꺼이 갈 테니까.’
편지의 마지막, 고백 같은 토마스의 글귀가 생각난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열세 살, 풋사랑에 설레었던 나이처럼 열이 오른 자신의 얼굴에 연신 부채질하며 물을 들이켰다.
“도와준다고 해놓고, 부르기도 전에 죽는 건 아니겠지..”
물론 사건은 브리텐드에 손해가 되지 않도록 이쪽에서 알아서 잘 수습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괴팍한 이사벨이 그를 어떻게 대할지 걱정이 됐다.
죽으라고 내몬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이번 일.
살아 돌아온 그를 환영할까? 아니면 자신의 손으로 처리할까.
혹은 또 이런 일에 엮어서 내다 버릴까.
……
“너 일 잘하는데? 이번 기회에 제르만으로 망명하는 거, 어때?”
“……”
문에 대고 귀를 기울이던 토마스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말을 속삭일 수 있는 여유라니.
바보 아니면 미친 거겠지..
안쪽에서 나는 소리에 대해 파악한 그가 헤르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지금 저 안에 니콜라스 랑은 없는 것 같아.”
“…그럼 일단 잡아서 캐보자. 족치면 뭐라도 나오겠지.”
두 사람은 검을 들고 문을 부술 듯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놀란 다수의 사람들은 당황함에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칼을 빼어서 그들에게 겨눴다.
“이쪽은 왕실의 조사원이다. 순순히 투항한다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눈에 흉터가 있던 남자는 왕실에서 왔다는 말에, 이 자리에서 죽으면 왔는지 안 왔는지 알게 뭐냐고 비웃었다.
그리고 익숙한 듯 자신의 뒤쪽 벽에 있는 횃불을 꺼내 들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들의 발로 향했다는 것을 눈치챈 토마스가 재빨리 그에게 달려들어 몸을 부딪혔고, 그런 토마스를 저지하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헤르나의 빠른 움직임이 이어졌다.
“이 자식이!!”
“아악!”
적들을 죽이지 않고자, 찌르지 않고 베는 것에 집중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아 결국 칼집으로 머리를 후려쳐가며 발길질을 포함한 난투극이 벌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소동을 벌인 끝에 토마스와 헤르나는 그들을 제압했다.
그 과정에서 부상도 있었지만, 두 사람 다 큰 상처는 아니었다.
겨울 끝의 메마른 장작들처럼 널브러진 그들을 꿇어 앉히고, 얼굴을 살펴보았다.
여기저기 깊은 상처들 위로 새로 생긴 상처들이 피가 흐르고 부어있어 멀쩡하다 할 만한 이목구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알고 모르는 사이를 식별하기엔 충분했다.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느라 말도 꺼내기 어려웠던 헤르나는, 너희들 때문에 입도 못 떼겠다며 한 사람씩 머리를 쥐어박고는 불평을 털어놓았다.
“……투항하면 살려준다니까..”
“……”
“이 조직 전체를 와해할 마음은 없어. 어차피 후계자도 있잖아? 두목 하나쯤 잡혀 들어가도 괜찮지 않아?”
“니콜라스가 나라에 수배가 될 만한 일은 하지 않았을 텐데.”
“안타깝지만, 외교 문제라 대충 수습되진 않을 거야.”
“……”
브리텐드 사람을 살피던 토마스는 고개를 저으며 안면이 없는 자라고 알려주었다.
그들에게 여기서 무엇을 하던 중이었는지 묻더니, 단순히 무역 거래를 하려고 했다는 말에 풀어주려다 그들이 가져온 물건이 있는지 확인했다.
“..저 상자 안에 있습니다.”
토마스는 단풍나무로 만들어진 상자를 열어 살펴보았다.
보석, 문서, 희귀품 등 일관성 없는 물건들은 정상적인 루트에서 온 것이라기보다 장물임을 잘 알 수 있었다.
“…이건…”
그의 눈이 커졌다.
무슨 일이냐며 다가오는 헤르나의 눈앞에 그는 화려하게 세공된 다이아 목걸이를 손에 걸어 보여주었다.
“다이아? 이렇게 고급품이 장물로 나온다고?”
“…이사벨꺼야.”
“!”
헤르나와 토마스는 서둘러 제르만 사람들을 입단속 시키고 손을 결박한 뒤, 브리텐드 사람 둘과 물건이 든 상자를 챙겨 나왔다.
“만약 너희가 정보를 흘려 우리 일이 틀어지게 된다면, 그때는 너희 모두에게 지명수배를 내릴 거야.”
“손만 뒤로 묶어뒀으니 시간이 걸려도 서로 풀어줄 수도 있고. 살아 나오는 건 어렵지 않지?”
짧은 경고와 인사를 마친 둘은, 여전히 조용한 복도를 확인하고 브리텐드 사람들을 앞세워 밖으로 걸어 나갔다.
“……”
토마스는 상자 안에 든 다이아 목걸이에 대해 생각했다.
수십 개의 다이아와 에메랄드가 섞여 한여름 햇살이 나뭇잎 사이사이 들어오는 모습처럼 반짝이고 아름다운 목걸이는 데반스 공작의 모친이 결혼 선물로 받은 유명한 물건이었다.
공작의 아들이 이사벨에게 선물했던 물건이었고, 자신이 직접 전달했으니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눈을 피해 그녀와 사랑을 나누던 필립 데반스.
이용당하는 줄 모르는 청년의 열정은, 집안의 가보를 훔쳐 그녀에게 바치게 만들었다.
데반스 공작은, 서자였지만 왕자였으며 칼라이 백작 가의 후손이었던 아론을 지지했다.
그건 그를 향한 왕의 마음이나 충정보다도, 왕재로서 적합한 아론의 명철함과 온화한 품성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론은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공작은 사건을 재조사할 것을 강하게 요청했었다.
이후, 왕실의 일방적인 권한으로 묻혔지만 데반스 가문을 필두로 몇몇 가문은 뒤에서 사건을 재조사하며 증거가 될만한 것을 모으고 있었다.
“건방진 놈!”
이사벨은 분노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명망이 높은 데반스 공작 가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래. 한 편이 될 수 없다면, 보험이라도 들어놔야지.”
이사벨은 다른 수를 꾀했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공작을 설득하는 것보다, 아직 어리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그의 아들을 꾀기로.
……방법은 먹혀들었다.
필립은 그녀의 사랑(이 담긴 것 같은 육체)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버지를 배신하고 가문을 위험에 빠뜨리게 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위험한 선택을, 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여왕의 남자’
어쩌면 그 타이틀이 필립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해관계인지 사랑인지.
혈기가 넘치는 젊은 시기.
몸으로 나누는 대화도 잘 맞아떨어진 둘은, 남들 눈을 피해 한밤중에 몰래 성에서 만났다.
“잘 알겠지?”
“예, 여왕님.”
필립을 성으로 데려오는 것은 토마스의 일이었다.
백작가에서 공작가를 거쳐 성으로 가는 길, 그를 몰래 자신의 마차 안에 실어 성의 뒷문으로 들어간 뒤, 커다란 상자를 이사벨의 앞에 배달해 주었다.
눈을 피하기 위해 조용하게 몰래 행동했다고는 하나, 본 사람이 없을 리는 없었다.
다만 누가 본다고 해도 겉으로 볼 때는 마차 뒤에 평범하게 짐을 싣는 상자였기에, 그 안에 든 게 왕실에 선물할 물건이나 정치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상자를 핑계로 한밤중에 성에 왕래하는 토마스에게 ‘여왕의 남자’, ‘밤시중을 드는 귀족’이란 아명까지 붙었지만, 세 사람 다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토마스는 가십에 휘둘릴만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런 심부름을 하기에 적합했다.
그에게는 사실이 아닌 소문보다, 두 사람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침실 옆 응접실에서 불편한 잠을 자는 일보다, 점점 대범해진 필립이 나신으로 가운만 걸친 채 상자에 들어가고 나오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힘들고 역겨웠다.
“내 생일 파티에 이렇게 다들 와주시니 참 기쁘네요.”
이사벨의 연기는 여왕이 아니라 배우에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낮에는 모든 미혼 귀족들의 예비 신부로, 밤에는 필립의 요부로 활약하며.
속으로는 모두 자신이 여왕의 남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한심한 기대로 가득한 젊은 귀족 남성들.
그들의 눈과 소문에 토마스가 아무리 밤에 불려 간다고 해도 라이벌로 여기지 않았던 건, 그의 출생 신분 때문이었다.
그들의 표현을 빌자면, 어디서 굴러 먹다 왔는지도 모를 놈이 백작 타이틀 하나 달았다고 달라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토마스가 받은 ‘백작’ 지위란, 낮에 평범하게 만나도 문제가 되지 않을 귀족이면서, 온갖 일을 다 시키기에 전혀 부족함 없는 신분과 물질, 더 이상 욕심내지 않을 수 있는 충분한 지위였으니까.
욕은 한 사람이 먹고, 기쁨은 둘만 나누는, 셋 다 어그러진 관계.
그러나 토마스는 자신의 쓸모와 사용처를 잘 알고 있었기에 불평하지 않았다.
그리고 둘 역시, 남들 눈에 드러낼 수 없는 관계라고 해도 만족도가 높았다.
언제든 자신의 뒤를 칠 수 있는 데반스 가의 약점을 틀어쥔 이사벨도.
무서운 아버지의 눈을 피해, 헛된 욕망을 쫓는 귀족들 사이에 유일한 진짜 애인이 된 필립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