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던 헤르나는 침대 옆 엔드테이블에 놓인 편지를 발견했다.
헤르나가 자주 읽던 책 아래에 놓여있던 편지는 모서리 일부만 나와 있어서 눈에 띄긴 어려웠지만, 책으로 눌러둔 탓에 창을 열어도 바람에 날아가지 않았다.
청소하는 사람이 몇 번이나 들락거렸을 텐데, 여기만 청소가 안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메이드가 청소하고 다시 이 모양으로 이 자리에 돌려놓은 건가?
나는 아니고… 스카드가 여기에 둔 건가.
헤르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수는 공작님께서 놓아두신 것이라 전했다.
통통한 체격의 집사 수는, 어릴 적 헤르나의 유모였는데 젖먹이 때부터 그녀를 돌봐서인지 가끔 그녀의 머릿 속이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매일 보면서 뭘 편지로…”
책을 들어 편지를 꺼내려던 그녀는, 봉투 겉면에 쓰인 이름을 보고 멈칫했다.
’토마스 카퍼‘
그녀와 함께 사건을 조사하고, 그녀의 배에 마검을 찔러 넣은.
열네 살부터 수많은 전장을 누비면서도 생사를 오갈 정도로 상처를 입은 적은 없던 그녀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남긴 남자.
“잭 스미스..”
헤르나가 알지 못할 것 같은 신원불명의 그 이름은, 그녀가 살면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
그날 밤.
니콜라스 랑을 죽이고 바이올렛 왕녀의 흔적을 찾고자 손을 잡게 된 두 사람은, 은밀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헤르나는 수하들의 옷을 빌려 남장을 하고 토마스와 함께 유곽에 잠입, 선불로 산 아가씨들에게 수면제가 든 와인을 권해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조세핀에게 받은 열쇠를 들고 몰래 유곽 안쪽에 위치한 비밀 문으로 향했다.
겉으로 보기엔 창고였던 자그마한 공간.
그러나 그녀의 말대로 모퉁이 벽을 밀자 숨겨진 계단이 드러났다.
조심스레 소리 내지 않고 내려가는 도중, 토마스는 알만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 찔리는 게 많은가 보군.”
“?”
무슨 말인가 싶어 헤르나가 쳐다보자, 그가 피식 웃으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렇게 안쪽에 숨은 공간을 두는 건 왕실이나 귀족들에게도 흔히 있는 일이니까 뭐가 문제인가, 싶지?”
“뒤를 돌아봐.”
뒤를 돌아 자신의 발자취를 확인하던 헤르나는 흠칫 놀랐다.
벽에 붙어 중간중간 있는 작은 기름 등불들이 전부인 계단.
그러나 어두운 시야에서도 확인 가능하게 만든 흔적들이 여실히 드러났다.
바닥에는 그들의 신발 밑창에 맞춰 얇게 발광 물질의 가루들이 깔려 자신의 발자취를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지? 어떻게…”
“아마 창고 가운데 깔려있던 카펫에 발려있던 거겠지.”
“…넌 알고 있었어?”
“보통 그런 팬트리 같은 창고에 카펫은 잘 안 두잖아? 더욱이 때도 잘 타는 밝은 색으로. 그건 살수집단에서 잘 쓰는 물건인데, 어두운 곳에 들어오면 빛을 내 거든.”
“카펫은 창고의 한가운데 놓여있었으니 랑이라는 남자는 그걸 피해서 벽 가까이 다니겠지.”
뭐야.
알면서 일부러 밟게 한 거야, 나만?
어이가 없어 쳐다보는 헤르나의 눈빛에 상관하지 않고 토마스는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당신 주변엔 이런 걸 하는 놈이든, 이런 걸 읽는 놈이든 위험한 놈들밖에 없으니까 조심해.”
지금 그런 위험한 놈과 동행중이라는 건 알고 하는 소리겠지?
바닥의 가루들을 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그녀에게, 그는 재차 찾아올 것은 아니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어차피 죽이고 나갈 거잖아.”
“………”
계단은 생각보다 깊었다.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탁한 공기가 느껴졌고, 미약과 담배가 섞인 향들에 불쾌감이 느껴졌다.
미간을 찌푸린 그녀의 얼굴을 본 토마스는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건넸다.
“고마워.”
피비린내는 익숙해도 이런 냄새는 낯설다는 게.
우스울까, 다행일까.
내가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인다는 게.
역겨울까, 당연할까.
이런 모순 안에 네가 함께 있어서 다행이란 건.
동맹의 성공일까, 실패일까.
“헤르나.”
“…….”
“헤르나!”
깜짝 놀란 헤르나가 옆을 돌아보자 토마스가 팔로 자신의 앞을 막고 있었다.
“이 이상 접근하는 건 위험해. 이제 소리가 제법 잘 들리거든.”
“……안에 여럿인가?”
“일단 가까운 곳은 서너 사람. 안쪽엔 더 많을 거야.”
그 안에 확실히 랑이 있을까.
이 거래를 위해 니콜라스 랑만 죽이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보호하는 세력도 처리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랑을 제외한 나머지는 죽이진 말자.”
“……..”
다소 나약한 소리처럼 들릴 수 있는 헤르나의 말.
토마스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승낙했다.
그는 죽이지 않고 여러 명을 제압하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고 있음에도, 살상은 최소한으로 하고 싶다는 그녀의 욕심을 거절하지 않았다.
니콜라스를 죽이고 조세핀과 하는 거래.
이 행위는 기적을 기대하는 것과도 같았다.
행방이 묘연한 왕녀와 희귀품을 찾아내는 일.
그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사기를 쳐야 하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
살아남기 위해 너와 이 서커스 같은 모험 안에 뛰어든 이상 더 이상 불필요한 기싸움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현명하지.
네가 그저 입만 산 귀족이라면 거절했겠지만, 어차피 너도 일대 다수를 상대하며 제압하는 건 많이 해봤을 테니까.
“헤르나. 네가 밟은 그 가루들, 불이 잘 붙는 거니까. 네 쪽으로 등불이라도 던진다면 몸 전체에 옮겨 붙을 수 있다는 거, 기억해.”
“흐엑.. 뭘 깔아놓은 거야, 이 미친놈은..”
계단 끝, 긴 복도의 첫 번째로 문 없이 자리한 안쪽 공간에서는 신음소리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을 가리고 안으로 들어간 헤르나와 토마스는 순식간에 약에 취한 채 여자를 품고 있던 두 사람을 제압했다.
역시나 약에 취해 정신이 없는 여성 둘을 한쪽에 앉혀두고 그들의 나신을 천으로 덮어준 뒤, 혹시 복도의 다른 공간에서 사람이 나오지 않는지 조심스레 내다보았다.
“…….”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헤르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
“그렇다고 생각은 하는데… 뭐, 설령 눈치챘어도 안 나올 거야. 잡으러 나오는 것보다 이쪽에서 오길 기다리겠지.”
토마스는 당연한 듯이 말했다.
‘자기들이 익숙한 공간으로 낯선 사람을 끌어들이는 쪽이, 훨씬 안전할 테니까.’
눈짓을 한 그가 앞장서서 걸으며 바닥과 천장, 벽을 살폈다.
함정이 설치되어 있지는 않은지, 따로 위험한 것은 없는지.
이런 위험하고 어두운 곳을 살피는 데는 헤르나보다 자신이 더 익숙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
“?”
희미하게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소리에 헤르나의 귀가 쫑긋 섰다.
토마스도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듣고 있었는데, 이내 고개를 갸웃하더니 씨익 웃었다.
“뭔데. 왜 좋아해. 변태처럼.”
“……..”
변태처럼 좋아하다니.
사람을 어떻게 보는 거야, 정말.
토마스는 헤르나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브리텐드 말이 들려.”
“!”
헤르나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기대하는 단서를 잡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너도 변태 같네.”
“……..”
미간을 찌푸린 그녀의 얼굴을 보고 그가 피식 웃었다.
어느새 이런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걸까.
두 사람은 마치 오래전부터 함께 해온 친구나 전우 같았다.
이야기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다가섰을 때, 순간 정적이 흘렀다.
갑작스레 이야기가 멈춘 것에 당황한 두 사람도, 그때까지 숨겨왔던 발소리와 더불어 숨소리도 죽였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일까.
저 안에 든 사람은 몇이나 되는 걸까.
금방이라도 맞붙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계산하던 헤르나의 앞에 토마스가 엄지손가락만 접은 채 양손을 펼쳐 보였다.
‘여덟’
생각보다 많은 수였다.
물론 수하는 그보다 훨씬 많겠지만, 이런 비밀리에 사용하는 공간에 들이는 사람은 기껏해야 서넛 일 거라 여겼기에 부담이 커졌다.
“..어떻게 여덟이라고 생각해?”
“보통 이런 비밀 장소에 끌어들이는 사람은 다수는 아니야. 두목을 제외하고는 열 명, 많으면 열 두 명까지가 계약의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 인원이거든.”
“계약의 테이블?”
“그런 게 있어.”
토마스는 손에 든 마검의 검집을 빼며 호흡을 고르고 문 앞에 서서 조심스레 귀를 갖다 대었다.
……………
“……..”
편지를 보고 한참을 말이 없던 헤르나는 자신의 상처 부위에 손을 가져다 대고 눈을 감았다.
그와 했던 대화, 그의 얼굴, 그의 손길.
그와의 마지막이 진짜 마지막이 되지는 않기를 바랐던 순간까지.
창 밖의 바람이 실어다 주는 바닐라 향이 섞인 차가 빠르게 뛰던 가슴을 진정시켰다.
“난 집사가 타주는 홍차가 제일 좋아.”
“네, 잘 알지요. 그래서 다른 일은 맡겨도, 이 일만큼은 꼭 제가 하잖아요.”
수는 웃으며 그녀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바람이 차진 않으세요? 창을 닫아드릴까요?”
“괜찮아. 바닷바람만 맡다 와서 그런지, 이 공기가 그리웠어.”
집사의 따뜻한 홍차와 생각나는 사람의 편지가 오늘 하루 고됨을 잊게 해 준 좋은 부분이라는 걸 알게 된 헤르나가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