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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하 Sep 09. 2024

35. 작은 걸 주십시오

“끼리끼리라더니.”



헤르나가 침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혀를 쯧 찼다.


리온이나 이사벨이나.

엘레나와 아론을 처리하는 방식에 있어선 죽이 잘 맞았다.


아니.

자기들끼리 맞든 아니든.

처음부터 그 두 사람은 그런 식으로 ‘처리’ 되어서는 안 됐다.

두 사람의 생을 멋대로 결정지을 권리는 그들에게 없으니까.


‘왕족’ 이라거나, ‘군주’ 라는 되지도 않는 명분 따위가.

다른 이유도 아니고 그들의 신분이.

어떻게 사람의 생과 사를 결정지을 수 있을까.


세상은 법을 만들었다.

법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의 규칙을 지켜 살아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법을 어긴 사람을 법으로 단죄한다.


하지만 그 두 사람 모두.

법에서 생명을 앗아도 된다고 결정될 만큼 악인이 아니었는데.


스카드는 바이올렛이 가진 분노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마음을 바꿨다.

서로의 깊은 상처를 들여다보게 된 순간, 상대에게 연민을 느낀 거겠지.



“아직 정복을 입으실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옆에서 불안해하며 장신구가 든 쟁반을 손에 든 노(老) 집사 수가 말했다.



“내가 죽기를 바라는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예에?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감히 누가…!”



헤르나는 미소로 돌아서서 침실 밖으로 나섰다.

집무실에 들러 마검을 챙기고 밖으로 나와 말에 올라타려다, 역시 무리인 것 같아 마차에 오르는데 뒤에서 큰소리가 들려왔다.



“헤르나!!!!”



화가 나서 달려오는 스카드를 보니 이 상황이 즐거웠다.


그러게.

누가 나 없을 때 쓸데없는 일을 벌이래?


헤르나는 마부를 재촉시키고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얼마 뒤 그 자리에 달려온 스카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구에 서 있는 경비들을 불만스러운 눈길로 흘겼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 쉰 그의 마음이 무거웠다.



“몸도 안 좋으면서 눈치만 좋아가지고.”




리온은 후작이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소식에 의아했다.

그가 예상한 시점에서 한참 앞당겨진 지금이 맞는 것인가 싶어 곰곰이 날짜를 되짚어봤다.



“후작이 마검에 찔렸다고 하지 않았나?”


“네.”



이안도 빠르게 찾아온 그녀의 방문이 어떻게 된 일인지 당황스러웠다.

리온은 들고 있던 서류를 턱끝에 대고 마녀들을 떠올렸다.



마검에 찔린 상처…

치료를 위해 마녀들을 몇 보내긴 했다만.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을 정도라니.

마녀들이 저주뿐 아니라 치유에도 확실히 재능이 있다는 얘긴가?



“어떻게 할까요?”


“만나야지. 날 보겠다고 힘들게 찾아왔을 텐데. 받을 것도 있고.”



리온은 회의실에서 반가운 얼굴로 헤르나를 맞이했다.

내정 문제로 회의가 소집된 탓에 직위가 있는 귀족들은 모두 모인 날이었다. 

그녀의 기분을 달래줄 겸, 다른 이들 앞에서 헤르나의 공을 크게 치하하며 원하는 것을 상으로 주겠다 말했다.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만, 전하께서 저에게 상을 하사하신다니 기쁘게 받겠습니다. 감히 청하건대, 이 검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그 검을?”



그 자리에 모인 귀족들 모두 수군거렸다.

눈이 튀어나올 만큼 고가의 검.

많은 금화와 보석들로도 갖기 쉽지 않은 마검을 받겠다니.


후작의 배짱이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되레 리온의 분노를 사지 않을까 모두 마음을 졸였다.



“….줘야지. 후작이 그토록 원한다면.”



모두들 태연한 척 말을 뱉은 리온을 보며 모두 놀랐지만, 그녀는 감사가 아니라 거절을 내밀었다.



“…하지만, 전하께서 애용하시는 거라면 받지 않겠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전하의 것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변덕이라..’



리온은 헤르나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자유로운 말과 같은 그녀였지만, 그래도 고삐는 자신이 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예의를 벗어나 마검을 요구하더니, 한 발 물러선다는 게 수상했다.


그럼에도 상을 주겠다고 먼저 대신들 앞에서 입을 연 것은 자신이니 뭐든 원하는 걸 주는 수밖에.



“그럼 따로 원하는 것은 없어?”


“실은.. 왕비님께서 주최하시는 모임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귀부인들의 티파티에?”


“후작이라 불가합니까? 명색이 저도 귀족 여인인데.”


“…..상관없어. 다음 모임부터 명단에 올려두라고 얘기하지.”


“감사합니다!”



헤르나는 만족스러워 보였고, 아주 기뻐 보였다.

태연한 척 미소 짓는 리온의 눈은 의심과 불신으로 이글거렸지만.


그녀가 고작 귀부인들 티파티에 친분 쌓고자 참여할 성격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리온이었기에, 그 요구는 수상했지만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들어도 별 무리 없이 들어줄 사항이었기 때문에.


큰 것을 먼저 요구하고, 작은 것으로 받는다.


헤르나는 리온이 대신들 앞에서 체면 깎이게 두 번이나 거절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더욱이 자신이 요구한 것은, 공적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것이었으니까.



‘더 준다고 할 수는 있어도, 안된다고 할 수는 없지.’



예상대로 리온은 상벌이 분명한 본인의 성격에 따라, 헤르나가 관리하는 지역과 해역 인근의 세금을 3년 동안 감면해 주었다.




<진입에 성공했습니다>



“뮐러 후작님이?”


칸나는 헤르나가 성에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회의실을 나오는 그녀를 불러 세워 상처를 염려하며 안부를 물었다.



“보내주신 연고, 잘 썼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서 스카드가 성분조사를 따로 하긴 했지만.



“다행이네요.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까?”


“전하께서 말씀하시겠지만… 다음번에 있을 티파티에 저도 동석하려고요.”


“후작께서요?”


“네. 혹, 싫으신가요?”



칸나는 전혀 싫지 않다며 밝게 웃었다.

후작을 더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좋다는 말도 덧붙이며.



“아, 이걸 바이올렛 왕녀님께 전해주셨으면 해요.”



칸나는 작은 보석함 하나를 건넸다.

은으로 세공된 뚜껑이 달린 동그란 함은 화려한 문양과 보석들이 세공되어 있어 한눈에 봐도 고급품처럼 보였다.


뭐야 이건……?

선물로 마음을 살 것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



“?”



잠시 멍하게 있던 헤르나는 이내 칸나의 눈치를 살피고 멋쩍게 웃었다.



“아, 너무 고급스러워 보여서요. 이런 귀중한 걸 그냥 제 손에 들러보내도 괜찮으신지..”


“걱정하지 마세요. 왕녀님을 부담스럽게 할 뇌물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니까요. 잠을 편하게 주무실 수 있도록 마법석을 하나 넣어두었습니다.”



아~

악몽에 시달린다는 소리를 듣고 준비한 거구나.


당신 참..



“왕비님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왕녀님의 밤이 편안해질 것 같습니다.”



헤르나는 칸나의 선한 성품에 진심으로 감탄했고, 칸나는 딱 맞게 전해줄 수 있어서 기뻤다.



“아….. 무리긴 무리였어…”



헤르나가 성을 빠져나오며 휘청였다.

서둘러 마차에 올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상의 통증에 괴로워했다.

심상치 않은 그녀의 기색을 느낀 마부가 서둘러 마차를 몰았다.


창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스카드는, 마차가 당도한 것을 발견하고 달려 나갔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인 그녀를 보자 발끈한 그가 걱정을 포함한 잔소리를 쏟아냈다.


예상은 했지만.

훨씬 시끄럽군…


헤르나는 침실에 도착해 소파에 눕듯이 기댄 채 그만하라며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자, 이거나 받아.”



그녀는 칸나에게 받은 보석함을 스카드의 가슴팍에 던져주었다.



“뭐야, 이건.”
 

“왕비가 준비한 거야. 바이올렛 왕녀가 악몽에 시달린다고 하니까.”



스카드는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하고 화를 냈던 칸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들고 방 밖으로 나가려는데, 헤르나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안 열어봐?”


“괜찮을 거야. 이상한 거 보낼 사람은 아니거든.”


“…….”



뭐래.

나한테 보냈던 연고는, 아는 마녀 불러다 이상한 거 안 넣었는지 꼼꼼하게 확인해 놓고.



“안 물어봐?”


“회복도 안된 몸으로 급하게 갔다는 건, 오늘 회의가 잡힌 거 알고 있었단 거잖아. 모두가 모였을 때, 체면 중요시 하는 리온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간 거고. 공적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크게 남아있을 때 얘기하면, 그게 뭐든 안된다고는 못할 테니까.”


“알아~ 알아. 그런 것쯤은 눈치챌 너라는 거. 그래서 너 오늘 회의에 불참했잖아. 참여자격이 있는 귀족 전체 소집인데. 내 눈 속이고, 내가 서두르는 거 막으려고.”



근데 스카드..

내가 물어본 건, 뭘 달라고 했는지 안 물어보냐는 거였어.

이런 몸으로 개처럼 달려가서 꼬리 흔들며 뭘 받고자 했는지 안 궁금해?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는 헤르나를 외면 하며 불평했다.



“뻔히 알면서 거길…”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며 한숨을 쉬는 스카드의 앞으로 그녀가 다가가 천진하게 웃었다.


스카드가 좋아하는.

엘레나와 닮은 미소.

철없는 자신을 몇 번이고 용서해 주던 그의 관대함을 이용했다.



“됐으니까 누워서 치료나 받아.”



그는 이번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헤르나에게 져주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는 만족스러워하며 스카드를 칭찬했다.



“집에서 얌전하게 잘 참았어.”


“참은 게 아니야. 바이올렛이…”


“알아. 내가 부탁한 거야.”


“?!”



넌 바로 달려올 사람이라는 거.

그렇게 날 붙잡아서 침대에 눕혀둘 사람이라는 거.

나 역시 누구보다 잘 아니까.


바이올렛에게 네 발목을 잡아달라 부탁한 거지.

아픈 척 연기해서.

보아하니 잘 된 모양이네.



“너 진짜…!!!!”


“귀부인들의 티파티에 초대받았어.”


“!”


“정확히는 기어들어갔어, 가 맞는 표현이려나?”


의기양양한 그녀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의 측근이었던 남작부인이 건강 악화로 몇 달째 티파티에 참석하지 못했다.

부인들을 만남을 통해 들을 수 있었던 각 집안의 내부사정은 어느 순간 디테일이 막혀버렸다.


가장 큰 지위로 그곳을 장악할 수 있는 공작부인은 현재 공석.

후작 부인 역시 헤르나가 승계하면서 계속될 공석.

백작인 데인은 미혼이었다.



“리온이 허락했어?”


“사력을 다해 일을 해결하고 받은 것치고는 수상하겠지만, 당장은 방법이 없을 걸. 헤르온이 결혼하고 안사람이 초대장을 얻어낼 때까지는 뻔뻔하게 버틸 생각이야.”



게다가 자기 나름대로 치하했으니 깊이 파고드는 건 나중 문제일 걸, 하며 헤르나는 호탕하게 웃었고, 스카드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수고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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