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하 Sep 01. 2024

34. 누구랑 손을 잡아?

바이올렛은 지난밤의 악몽의 기억 때문에 오늘 밤은 쉽게 잠들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곳이 브리텐드 수도의 성이 아닌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카드…”



그는 자신을 소중히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일회성으로 쓰다 버릴게 아니라 정말 같은 편이었으면 해서.

그렇기에 쉽게 관계를 갖지도 않았다.


성으로 데려가며 공작으로서 왕녀를 호위하는 거라고 온갖 예의는 다 차리더니.

한 편이라는 자신을 악몽 속에 넣어두고 트라우마에 가둬 죽일 뻔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찬물인지 뜨거운 물인지.”

“보통 미친놈은 아닌 것 같다가도, 잘해줄 때 보면 상냥한 미친놈 같으니까 헷갈리잖아.”



시중도 물리고 혼자 옷을 갈아입던 바이올렛은, 그가 가져온 고급 실크 잠옷의 가슴 부근에 빛나고 있는 자수정을 들여다보았다.



“………..”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과 닮은 예쁜 보석이라며 생일 때마다 선물해 주셨던 자수정.

어떻게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름 모를 전당포 주인에게 모두 팔아넘기고, 지금 남은 것은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는 작은 반지 하나뿐이지만.


수많은 꽃들과 선물, 여러 보석이 세공된 액세서리를 받았어도 항상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버지의 선물뿐이었다.


아마 스카드는 그 의미를 몰랐어도, 자신이 은연중에 이 반지를 소중히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거겠지.



“보통은 아니라니까…”



옷을 갈아입고 긴장이 풀린 바이올렛은, 침실 안을 하나씩 둘러보며 집주인이 깨어날 때까지 잠시 평화를 즐기기로 했다.




…………



-리온을 만나러 성으로 출발하기 전 날, 두 사람의 회담이 있던 때



“협력. 이건 사실 헤르나의 의견도 묻질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거야.”


“그래서?”


“네가 그녀에게 상처 입힌 건, 네가 직접 책임져야 돼.”



바이올렛의 얼굴이 굳었다.


한 편이 되라면서. 내 서사를 듣더니 자기의 서사를 들려줄 땐 언제고.

같은 편이 되려면 네가 보호해 줘야지.


그녀의 속마음을 읽은 듯한 스카드가 덧붙였다.



“내가 널 보호해야 할 세력은 이사벨과 그 측근들이지, 내 측근이 아니야.”


“이런 얘기를 한 편이 되기도 전에 한다는 건, 그 선택지를 피하란 소리처럼 들리는데?”



불만스러운 얼굴로 눈을 째려보는 바이올렛을 보면서도 그는 덤덤했다.


넌 남들에게 말하지 않는 내 서사를 들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복수할 대상이 명확한 우리에게 그건 위험한 일이야.

우리에겐 그 서사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한편으로 만들거나 입막음을 해야 된다고.

바이올렛, 눈치 빠른 네가 그걸 모르지 않겠지?



“넌 잘 이해할 거라 생각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지금 우리 대화가 무슨 의미인지.”



스카드는 불만이 섞여있지만 침착한 그녀의 얼굴을 보아하니, 잘 이해된 것 같아 기뻤다.

피우지 않는 담배라도 입에 문 듯 숨을 길게 뱉은 바이올렛은 다리를 꼬고 앉아, 말투도 꼬아 물었다.



“그럼 이런 독단적인 리더의 행동은 괜찮아?”


“당연히 그 책임은 내가 져야 되고.”


“흐응~ 일이 틀어지면 우리 둘 다 후작 손에 죽는 거네?”



뭐가 그리 재밌는지 빵 터져서 웃는 그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난 바이올렛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방을 벗어났다.



……….




일주일 뒤, 깨어난 헤르나가 의식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스카드가 그녀의 방으로 찾아갔다.



“확실하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뭘..”


“네 몸의 상처 말이야.”



헤르나는 바이올렛을 공격하는 토마스 앞에 뛰어들었다가 벌어진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를 보호해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으니 어리석다고 한소리 들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녀가 널 찌른 건 아니라는 거지?”


“그래. 애초에 무거운 마검을 휘두를 만한 손모가지도 아니잖아.”


“다행이군. 할 말이 있는데…”



헤르나는 당황을 넘어서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스카드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욕설과 비난을 포함해 자신이 이미 죽었거나 꿈을 꾸는 것은 아닌가 하는 현실 거부도 섞여있었다.



“….다시 말해줘.”



스카드는 태연하게 힘겹게 입을 뗀 그녀의 입가에 은스푼에 담긴 수프를 건네며 짧게 덧붙였다.



“손을 잡았어.”


“…..손을 잘랐다고?”



그래.

차라리 그 편이 네 바람인 건 알지만.

아니, 너 그렇게 잔인한 성격은 아니었잖아?

데인 입에서 그 말이 나오면 모를까.


스카드는 피식 웃었다.

하긴 온갖 고생 다 하고 배에 구멍이 난 채로 왔는데, 깨어나자마자 이런 소릴 들으면 어이없고 화도 나겠지.



“걱정 마. 다시는 너한테 함부로 하는 일 없을 테니까.”


“내가 아니라, 우리 계획에 함부로 할까 봐 걱정하는 거야.”



나 참, 어이가 없네.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바뀌었다.

물론 내 세상뿐이지만.


헤르나가 알던 스카드는, 인질로 잡혀온 바이올렛 자작극의 전모를 밝히고 나면, 목줄을 매어 이사벨에게 던져줄 사람이었다.

아니, 브리텐드에 당도하기 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앨지도.

그리고 오히려 그걸 만류하는 게 자신일 거라 생각했는데.


칼 맞고 기절해 있는 틈을 타서 집으로 데려온 것도 모자라 한 편이 되기로 했다고?

이게 정말 우리에게 득이 되는 선택이라는 거야?



“힘도 권력도 없는 왕녀가 무슨 쓸모가 있다는 거지?”



헤르나는 자신의 상처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누군가 복수 같은 감정은 낭만과 사치라 말했지만, 그건 힘없는 사람이거나 용서와 화해를 말하는 사제들에게 해당되는 얘기다.


‘복수’는, 프로이센과 뮐러의 성장과 발전에 크게 기여해 온, 가장 원초적이고 확실한 감정이고 방법이었다.


물론 자신의 몸에 칼을 박아 넣은 건, 그녀가 아니라 토마스였지만.

바이올렛이 헤르나에게 쭉 무례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이 당한 무례만 계산한다 해도 가만히 있을 리 없을 그였는데…


얻어맞고 온 자식을 대신해 아버지가 꿀밤이라도 한 대 쥐어박아주길 바랐던 딸이 실망한 것처럼, 헤르나의 마음 일부는 불편하고 혼란스러웠다.



“세력은 없지만, 동기는 확실하거든. 더군다나 성격의 일부분은 나랑 같고.”


“?”


“죽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끈기. 그 밑바탕이 되는 명확한 목적.”



말없이 스카드를 보던 헤르나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이제 더는 볼 수 없는 엘레나의 미소라든가.

입에서 피를 토할 정도로 괴로워했던 순간들이라던가.

짐작 가능한 바이올렛의 원한 같은 것들.



“쓸 만은 해?”


“지위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일단 하나의 패니까.”


“쳇, 그놈의 왕녀, 왕녀.”



됐다, 됐어. 헤르나는 그제야 그의 손에서 수프 그릇을 가져와 먹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용서와 화해가 이번 일의 핵심이라는 거지?”



그녀의 질문에 스카드는 음식에 시선이 고정된 헤르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살짝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핵심은 복수와 이용이고. 그를 위한 화해는 했어도, 용서는 네 몫이지.”


“? …네 맘대로 한 편 먹어놓고 또 뭔 소리 하는 거야?”



그는 의문을 표하는 헤르나에게 몸을 기울인 뒤 속삭였다.



“우리가 언제, 대가 없는 용서를 한 적이 있던가?”


“…….”



아하. 도움이 안 된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 된다는 거군?


헤르나는 그럼 그렇지, 하며 아픈 배도 잊어버리고 웃었다.



“난 또 갑작스레 일이 진행돼서 네가 왕녀랑 침대에서 뒹굴기라도 한 줄 알았잖아.”


“!”



순간 얼굴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스카드를 본 그녀가 베개를 집어던졌다.



“…야 이 미친놈아!! 아악..!”


“아니야! 아니라고.”



그는 움직임 탓에 아파하는 헤르나를 부축 하며 ‘너 아니었으면 위험하긴 했지..’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2차 회담>



정신적 가해자이면서 상처의 가해자라고 말하기 애매한, 그래서 대하기 멋쩍은 얼굴의 바이올렛과 그녀를 사냥감처럼 노려보는 헤르나가 응접실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깨어났네?”


“왕녀님은 그 사이 저희 집에 계시네요?”


“초대받았거든.”


“한 적이 없는데요?”


“아~ 대리가. 집주인 대리.”



웃으며 태연하게 반박하는 바이올렛을 본 헤르나가 스카드를 째려보았다.


그래. 능글능글한 게 둘이 꼭 닮았네.



“기억하시죠? 저 칼 맞은 거.”

“아니.. 정확히는 왕녀님을 공격하는 칼을 온몸으로, 목숨 걸고, 막아드린 거.”


“당연하지.”


“그런 저를 어떻게 취급하셨는지도 기억하시죠?”


“그러엄~ 그래서 네 옆에 앉은 미친놈이 내 목을 졸랐잖아?”


“?!”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당황한 헤르나가 스카드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차를 홀짝였다.


목을 졸랐..? 이 미친놈이..? 왕녀인데? 중요한 증인을?

아니, 뭐.. 평소 이 자식을 생각하면 무리는 아니지만.


바이올렛의 기세를 눌러 우위를 점령하려던 헤르나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불만을 속사포같이 쏟아냈다.



“너 그렇게 됐다고 죽인다고 협박하던 놈이 갑자기 같은 편이 되자고 오는데~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그뿐이야? 같은 편이라고 안전한 데에 두겠다더니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진~짜 죽을 뻔했거든.”



바이올렛은 내가 겪은 일도 만만치 않다는 뉘앙스로 말하며 소리 높여 웃었다.

우리 둘 다 편을 잘못 고른 것 같은데, 그냥 너랑 나랑 손잡지 않겠냐는 말도 덧붙이며.



“…..그래요. 지금은 일단 넘어가죠.”


“용서는 안 하는 거네?”


“우리 모두 계획이 성공하면, 그때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미안했어, 라는 말과 함께 가볍게 악수하고 응접실을 나가는 바이올렛의 뒷모습을 보던 헤르나가 의문이 생긴 듯 물었다.



“자세한 내막은 몰랐다고 해도 네가 저 왕녀의 대략적인 사정을 모르진 않았을 텐데. 부모도 잃고, 여왕과는 적대관계에 있는 왕족. 그녀의 분노를 패로 쓰려면 진작에 살펴봤어야 하지 않아?”


“그렇긴 한데, 타국에 있는 왕녀라 현재 눈에 들어오는 패는 아니었지.”


“그런데?”


“왔잖아. 스스로. 제르만으로.”



그게 다야? 하면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을 보는 헤르나를 향해 스카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독살당할까 봐 매 식사도 직접 챙겼더라고.”


“……..”


“그녀의 아버지인 아론 역시 독살이었다고 해.”



헤르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누군가가 떠오르는 이 살해 방법.

스카드의 깊은 상처이자 트라우마를 헤집어놓을 이 못된 수를, 그는 그냥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 이해했어.”


매거진의 이전글 33. 빼돌리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