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시간은 잘도 흘렀다.
특별한 일정이 없어 다소 나태해질 수 있는 하루가 있어서 칸나에게는 다행이었다.
그녀가 스스로 하는 생각과 답이 맞는지 고민하던 중, 며칠 전 새로 배정된 주홍빛 머리의 어린 여관 하나가 칸나의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왔다.
“왕비님, 전하께서 함께 차를 마시자고 청하셨어요.”
“그래.. 어디서?”
“두 분께서 결혼식을 올렸던 정원에 준비되어 있다고 합니다.”
리시안셔스 꽃이 만발했던 정원의 분수 뒤쪽으로, 태양을 가릴 흰 천막과 원형의 테이블, 여러가지 과자들과 함께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티세트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서 와.”
리온은 미소와 함께 칸나를 맞아 자리에 앉도록 의자를 빼주었고, 직접 차도 따라주었다.
그녀는 고마운 마음과 동시에 어딘가 낯선 위화감에 주위를 둘러보았고, 시중을 드는 이들과 왕의 호위 모두가 16피트(5m) 이상 떨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둘만 함께 하고 싶어서 다들 좀 물러가 있게 했으니 신경 쓰지 말고 편히 즐겨.”
“아, 고마워요...”
칸나가 차를 마시는 동안에도, 과자를 먹는 동안에도 그저 리온은 미소로 바라볼 뿐이었다.
“좀 피곤해 보여... 무리하고 있진 않아?”
“.........쉽진 않네요."
아직은 괜찮다며 미소 짓는 칸나를 보는 리온의 마음은 복잡했다.
......
-얼마 전-
"버르장머리 없이. 이젠 왕비가 된 사람을 여전히 자신들의 아래라 생각하고 가르치려 들어!"
화가 난 리온의 앞에 선 귀족들은 그의 눈치를 살핀다기보다, 오히려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며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왕비로서 그녀가 익혀야 할 것은 왕실에서 배우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
"감히 어디서!!!"
매일같이 변함없이 지속되던 '칸나 길들이기' 에 마침내 리온이 폭발했다.
그가 집어던진 유리잔은 서 있던 귀족들 사이로 날아가, 스카드 공작의 발 앞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스카드는 놀랍지도 않은 듯 발 끝으로 자신 앞에 있던 유리 조각을 밀며 리온을 쳐다봤다.
"저희가 무례하다 여겨지실지 모르겠지만, 저희로서는 자격 없는 왕비를 참아주는 것만으로도 많이 양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라고!"
스카드는 되레 리온의 이런 말과 행동이 맞지 않는다 생각하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애초에 귀족도 아닌 분을 왕비로 삼겠다 하셨을 때, 이 정도도 예상 못하신 것은 아닐 테고.."
"신분상으로 왕비가 되셨다고 해서 단숨에 예우를 해드릴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프로이센 공작...."
그간 참아온 것은 리온이 아니라 귀족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는 끊임없이 맞는 말로 리온을 압박했다.
"그분의 지식적인 면을 비롯해 상식, 기품, 예의범절, 화술, 안목.. 그 어느 것 하나 왕비로서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그저 신하 된 도리라며 예우만 해드리면 됩니까?"
어디서 젊은 마녀 하나 줏어와서 일국의 왕비로 삼는다는 것도 어이가 없을 판인데.
대접을 안해준다고 길길이 날뛰다니.
모든 귀족들은 스카드의 말에 동의하는 얼굴이었다.
"출신 성분이 어떻든 이제 중요한 것은 왕비로서 그분의 역할입니다. 국외의 동맹을 얻고자 노력하고 계시면서, 지금의 그분이 어떻게 전하의 도움이 되어줄 거라 생각하십니까?"
"......."
"내국의 신하들에게조차 무시받는 왕비는 타국의 신하 앞에서도 당당할 수 없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신분 뿐 아니라, 삶도 왕비가 되어야지요."
숨돌릴틈 없이 쏘아대는 스카드의 말에 당황한 리온이 그에게 사정하듯 이야기 했다.
"물론 나도 알아. 알지만..... 좀 시간을 두고.."
칸나를 감싸주려는 리온의 말에, 스카드는 냉정함이 사라지고 분노가 올라왔다.
시간? 시간 같은 소리 하네.
너는 우리에게 마녀를 왕비로 삼을 거라고 미리 고지하고 생각할 시간을 줬던가?
너의 그 자애로움과 시간을 엘레나에게 조금이라도 허락해줬더라면.....!!!
점진적으로 차오르는 화에 미간을 찌푸린 스카드는, 곧 표정을 풀고 크게 숨을 내쉰 다음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기다릴 수 있습니다."
"?"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그분의 품행이 얼마나 어지럽든 상관하지 않고 예우해 드릴 수 있습니다."
스카드의 발언에 리온뿐 아니라 모든 귀족이 다 놀라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럴 수 없을 텐데, 스카드라면...
그리고 자신들도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전하께서 국혼을 취소하고 그분을 정부로 삼으신다면."
"!?!?"
"한낱 정부에게 저희가 그 모든 것을 기대하진 않으니까요."
리온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스카드의 멱살을 틀어쥐고 소리쳤다.
"프로이센!!!"
놀란 귀족들과 달리 스카드는 리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단순히 애정에 기대어 오늘의 신분과 내일의 신분이 달라질 정부로 삼으신 게 아니라면, 전하께서 마음이 쓰리다고 감싸실게 아니라 똑바로 행동하셔야 할 겁니다."
"그분의 말과 태도와 행동, 모두가 제르만의 품격과 직결되니까요."
스카드는 리온의 손을 천천히 떼내며 덧붙였다.
"전하의 사랑 때문에, 제르만이 개망신을 당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
칸나를 위해서라며, 하루라도 빨리 그녀가 이런 모욕과 멸시에서 스스로 벗어나도록 리온도 냉정하게 상황을 좌시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마음이 편할리는 없었다.
사랑하는 이의 상처가 자신의 영광이 되는 법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하지만 칸나 또한 자신이 여느 부인이 아니라 왕비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한 결혼도 아니었고, 리온이 아기를 돌보듯 케어해 주길 바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본인의 예상보다 빠르고 힘겨운 홀로서기가 어려웠을 뿐.
객관적인 그의 태도에 서운한 마음이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왕으로서의 그의 수고와 고충을 이해하기에 감내해야 할 부분이라 여겼다.
'이것도 왕비의 일인 거겠지...'
리온은 칸나의 뺨을 가볍게 쓸더니 의자를 당겨와서 자신과 더 가까이 마주 보게 했다.
“오늘은 진실을 고백하고, 잘못을 참회한 뒤, 부탁을 하려고 하는데...”
<리온의 결혼>
......
리온은 왕실에서 선택한 정략혼으로 공작가의 여식과 결혼을 했다.
사랑했던 사이도 아니었고, 개인적인 호감 역시 없었지만, 받아들였다.
왕자의 자리란 그런 것이고, 차기 국왕이 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왕실을 지지해 줄 든든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엘레나는 귀족 가문에서 자란 여식답게 아름답고 기품이 넘쳤다.
타고난 성품도 온화한 사람이었기에 정을 붙이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둘의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다.
수많은 훈련과 공부들로 외로움조차 사치였던 리온과는 다르게, 너무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듯한 엘레나는 종종 외로움을 호소하곤 했다.
그 외로움을 가라앉혀 주고자 여러 가지로 애를 써보았지만, 엘레나가 원하는 것은 왕이 아닌 남편으로서의 한 남자였다.
여자에 빠져 정무를 소홀히 하는 지도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리온은 몇 번이나 양해를 구했지만, 외로움이 커져가는 엘레나와 점차 갈등이 깊어졌다.
왕비란 그런 위치인 것을...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엘레나가 너무 답답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준비도 안된 사람을 그 외로운 자리에 밀어 넣은 것인지...
리온은 공작 가문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한 결혼이었고, 아이가 생기면 그녀의 외로움이 아이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어 나아질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기다린 끝에 어렵게 아이를 얻었다.
백설공주였다.
......
“......”
차분히 이야기를 하던 리온은 백설공주의 이야기를 꺼내며 잠시 망설였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떨리는 입술은 그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말해주고 있었다.
칸나는 그 마음속에 갇혀있는, 입술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침묵을 유지한 채 숨을 고르고, 다시 마음을 다잡은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
백설공주의 탄생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후병으로 엘레나는 사망했다.
갑작스레 가족의 일원과 왕실의 굳건한 지반을 잃은 공작 가는 슬픔에 빠졌고, 다른 귀족들은 앞에서는 애도하며 뒤로는 앞다투어 자신의 가문에서 새로운 왕비를 들일 것을 조언했다.
하지만 리온은 더 이상 마음에 없는 혼인은 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는 귀족이 아니어도 좋았다.
누구든, 왕비의 자리를 이해하고 그곳에서 자신을 지지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렇게 어느 날 먼 숲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칸나를 만났다.
태어나 한 번도 보지 못한 보랏빛 머리카락의 미소가 눈부신 사람...
리온은 첫눈에 반했고, 대화를 나눌수록 깊이 빠져들었다.
점점 칸나의 모든 것이 그를 사로잡았다.
다른 사람들은 멀리하는, 세상에 속하지 못한 이질감이라는 것도 그의 마음을 끌었다.
칸나가 마녀라는 것도, 마치 이 나라를 위해 준비된 신의 계획 같았다.
<리온의 계획>
“... 계획?”
리온의 이야기를 들은 칸나가 무슨 소리인지 되물었다.
“......마법 부대를 신설할 거야.”
“...그렇군요.”
그녀가 이제야 알겠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리온은 미안하다는 사과를 건네며 조심스레 칸나의 손을 잡아주었고, 칸나는 이해한다며 차분히 대답했다.
“그토록 천대하던 마녀를 왕비로 삼을 때는, 가벼운 이유는 아닐 거라 생각했어요.”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신분의 격차가 크고, 저에게는 배경 또한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이 결혼은 당신이 받을 수 있는 것이 없잖아요.”
"미안해, 칸나... 나는..."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하는 리온을 달래며 칸나는 그의 손을 다독였다.
“걱정하지 마요, 이용이라 생각하지 않으니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있으니 다행이네요.”
다만 칸나는 마법과 마녀를 인정하지 않던 제르만 왕국에서 유례없던 마법 부대를 신설한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염려가 되기도 했다.
“칸나.. 너를 총책임자로 해서, 인재를 모으고, 그들을 교육시켜 부대가 신설된 다음 적절한 위치에 배치할 계획이야. 귀족들이나 민심에 관한 모든 것은 그 이후에 논의하면 돼.”
마법 기사단이라.
흥미가 생긴 칸나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계획하는 마법 부대의 규모나 능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프로이센 공작가의 슈바르츠 기사단과 맞설 수 있을 만큼.”
공작의 기사단은 다른 귀족이 소유하고 있는 어느 기사단보다도 규모가 컸다.
그리고 모두 실력이 뛰어난 자들이었다.
귀족들은 왕실에 충성을 맹세했지만, 사실 공작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 전체를 통솔하는 힘은 늘 공작이 왕보다 한 수 위였다.
내란이라도 일어난다면.
공작이 적으로 돌아선다면...
귀족들은 분열되어서 왕실과 공작가를 저울질하며 나뉘겠지.
왕실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을 만큼 힘겨운 싸움이 될 거다.
‘정략결혼이 공작가에게 너무 많은 성장 기회를 제공한 걸까...?’
데인의 말대로 귀족들의 삶 뒤편, 먼저는 공작가를 조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리온이 조심스레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
“... 이건.. 마법 부대를 신설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야.”
이번에는 또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둘만 있음에도 그는 칸나의 얼굴을 가까이 마주보고 속삭였다.
“네가 왕자를 낳아주었으면 해. 아니, 공주도 좋아.”
갑작스런 이야기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런 문제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는 일이었다.
“... 왕비가 된 이상, 왕실의 아이를 낳게 되리라는 건 알고 있어요.”
그러자 리온이 고개를 저었다.
“난..... 단순한 왕실의 아이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
의문에 빠진 칸나에게 리온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난, 네가 낳을 그 아이를... 후계자로 삼을 거야."
"!"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있는 칸나를 끌어안으며 리온이 덧붙였다.
“왕자라면, 왕세자로. 공주라면 백설공주의 뒤를 이을 차기 계승권자가 되겠지만... 결국 우리의 아이가 제르만의 통치자가 될 거야. 여왕이든, 왕이든.”
*제르만은 왕자 우선 승계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