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온과의 다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어느 때보다도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는 칸나에게 '그녀를 선택한 이유'와 '아이를 원하는 이유'에 대해서 분명히 말을 해주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왕권강화 및 공작가와 그의 추종세력에 대한 대항'이었다.
공작의 기사단을 누를만한 새로운 병력이 필요했기에 마녀라는 특수성을 감안하고 칸나를 선택한 것이고, 백설공주가 있지만 왕위를 물려줄 다른 아이가 필요해서 그녀를 선택한 것이니까.
'정말.... 명확한 이유네...'
이쯤 되면 사랑에 빠진 그의 눈빛과 행동도 필요성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닐까.
그 모든 게 꼭 다 계산된 행동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마침 잘 됐으니까.
그가 찾던 걸 얻었다는, 그 기쁨에.
'하긴.. 마법병만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나를 왕비로 삼을 필요까지는 없었을 테니까.'
'어찌 보면 마이너스 요소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나를 아내로 선택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도..'
백설공주를 후계에서 제외하는 이유 역시 공작가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됐다.
'이미 비대해질 대로 비대한 세력의 공작가, 그 가문에서 왕비를 배출했다.'
'그렇다면, 백설공주가 여왕이 된다는 것은 공작의 집안 전체를 왕가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겠지...'
'단순 작위가 있는 귀족이 아니라, 왕실의 정통성이 나오는 가문이 될 테니까.'
'....공작이 나를 견제한 것도 후계에 대한 리온의 다른 속내를 알아서였을까?'
칸나가 생각에 빠져 부르는 소리도 못듣고 있자, 여관이 조심스레 다가와서 말을 꺼냈다.
"왕비님."
"?"
"공주님이 오셨어요."
자리를 비운 사이 백설공주가 칸나를 만나러 온 모양이었다.
"....."
칸나는 그동안 백설공주를 그 아이를 만나는 것이 힘든 생활의 위로가 되었던 여태까지의 마음과 달리 심란했고, 복잡함이 몰려왔다.
딱히 공작가나 아직 없는 자신의 아이에 대한 견제가 아니라, 아무런 죄 없는 그 아이를 어른들의 정치에 이용하는 것 같아 불편해서였다.
'미안해....'
"마마!"
칸나는 공주에게 푹 빠져 있었다.
아직 출산한 적은 없지만, 그녀를 엄마로 만들어주는 이 작은 생명을 사랑하고 있었다.
백설공주의 하늘거리며 구불거리는 머리카락도, 복숭아 같은 발그레한 뺨도, 칸나의 옷을 잡고 있는 작은 손가락들도 전부 사랑스러웠다.
'왜 네가 후계에서 밀려나게 되는 걸까..'
'공작이 리온에게 덜 위협적이었더라면 자연스레 물려받았을 왕위였을까?'
'아니면..... 설마..... 정말....'
칸나는 올라오는 많은 생각들을 누르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둘이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냈다.
헤어지기 아쉬워 바래다주고 서쪽 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속 뒤를 돌아보는 그녀에게 '참 좋은 엄마' 라며 여관들은 칭찬해 주었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선물>
시간이 흘렀다.
계절은 바뀌었고, 제르만의 풍경도 하얀 눈이 뒤덮인 고요한 시간이 찾아왔다.
그동안 기 잡기에 열을 올리던 귀족들도 칸나가 못마땅한 것과는 별개로, 시간이 지날수록 더 이상 예전처럼 하나씩 다 꼬투리를 잡지는 않았다.
그건 칸나의 왕비로서 성장했다는 것과도 연관 있지만, 더 크게는 그녀가 리온에게 단순 흥밋거리가 아니라 제대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후부터였다.
조만간 임신할 것 같다는 소문이 귀족들이 입을 타고 돌면서, 스카드의 눈을 피해 칸나에게 선물을 보내는 귀족 부인들도 여럿 있었다.
물론, 스카드는 알고 있었지만.
선물에 전혀 관심이 없던 칸나 때문에 방 안은 뜯어보지 않은 선물들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그녀의 여관들을 통해 이것은 어느 가문, 저것은 다른 가문에서 보내온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뜯어보는 순간 뭔가 귀족들에게 선물에 대한 답을 주어야 할 것 같아 꺼려져 손도 대지 않았다.
'그렇게 욕을 하더니...'
'아, 설마 욕 대신 욕 같은 뭔가를 준 건가..?'
말은 선물이라고 해도, 그 내용은 범상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더더욱 풀어보고 싶지 않은 칸나 덕에 선물들은 계속 방치되어 갔다.
방 안 가득한 선물들을 보는 여관들이 칸나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왕비님... 이젠 더 쌓아둘 곳도 없어요."
"돌려보내라니까."
귀족 사회에서 건넨 선물을 거절하고 돌려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칸나는 여관들의 염려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럴 수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선물을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냥 돌려보냈다간 저희가 벌을 받습니다."
이유가 왜 없어. 내가 싫다니까.
칸나는 정말이지 그들이 뭘 보냈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조금만 열어보면 안 될까요? 너무 궁금한데......"
여관들은 호기심도 있었지만, 그보다 귀족들의 등쌀에 견디기 힘든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칸나가 그녀들에게 물어보았다.
".....이 선물들이... 무슨 종류인지 알아?"
"뭐.... 그야, 보석이나 귀한 옷이나... 외국의 장식품들 같은 거죠?"
".....다 필요 없는 거네."
다른 귀족이나 왕족들과는 다른 반응에 여관들은 화들짝 놀랐지만, 칸나는 그런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못 보던 귀한 책이나 보내주면 모를까.'
안되겠구나, 싶어 실망하는 여관들의 표정을 본 칸나의 마음이 약해졌다.
"알겠어. 열어보고 금화나 은화로 바꿀 수 있는 것들 중에 일부는 너희에게 나눠줄게."
"!!!"
여관들은 이렇게 쉽게 포상을 내어주는 주인을 만난 적이 없었다.
목숨을 걸만큼 어려운 무언가를 부탁받거나, 특별히 잘한 일이 있을 때가 아니고서는 받을 수 없던 상급.
그들은 기쁨과 기대에 가득 차 들뜨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선물을 하나씩 가져왔다.
'우와... 눈동자가 반짝반짝해...'
'편지도 같이 있었네..'
‘다들 편지라... 가끔 만나면서 안부 인사를 이렇게 따로 전하진 않을 테고···’
선물과 함께 동봉된 편지들은 읽어보지 않아도 대충 짐작 가능한 내용이었다.
'날 길들이려 하는 거겠지···'
표면적으로는 대립하는 분위기이지만, 뒤로는 자신들의 가문과 먼저 결탁하게 만들려는 속셈이 있다는 것은 데인*에게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데인- 데인 폰 토흐튼. 백작 가의 가주.
'이 중에... 토흐튼 백작이 보낸 건 뭔지 궁금하네..'
'설마... 프로이센 공작은 안 보냈겠지...'
그러나 칸나의 예상과 다르게 토흐튼 가에서 보낸 것은 없었으며, 공작은 화려한 의상들과 장신구들 및 여러 장식품들을 보내왔다.
여관들의 말에 따르면, 이 전에 엘레나 왕비께도 주기적으로 선물을 보내왔다고 했다.
그건 물론 같은 집안사람이니까 당연했겠지만, 왜 자신에게도?
백설공주를 잘 부탁한다는... 뭐 그런 걸까?
칸나는 신난 여관들에게 과하지 않게 배분을 해주고, 나머지는 정리를 부탁했다.
'토흐튼 백작은 날 끌어들일 생각은 없는 것 같아..'
'사실 가장 도움이 되는 현실적인 충고를 해주는 건 그분이라... 손을 잡자고 할 줄 알았어.'
'프로이센 공작은..... 무슨 생각일까?'
<후계>
리온은 적극적으로 아이를 원했다.
그런 그의 열정이 그녀를 회피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고.
반대로 칸나는 마법 병력을 양성하는데 더 관심이 컸고, 그쪽에 열정을 쏟게 되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칸나를 찾아오는 리온 덕에 성에서는 무수히 많은 소문이 돌았다. (물론 그녀가 거절하는 날들도 꽤 있었지만)
그 중에는 엘레나 왕비와의 잠자리를 비교하는 뒷소문도 함께 있었다.
'이래서 아이를 가질 것 같다고 태도가 바뀌었구나..'
칸나는 리온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보다 임신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생각이 더 크게 다가와서 부담스러웠다.
'마력이 있던 엄마는 마력이 있는 나를 낳았어..'
'내가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아이도 마녀가 될까....'
사람 이하로 차별받는 마녀의 존재.
제르만에서 칸나가 왕비가 되면서 음지에 있는 마녀들이 수도에 하나둘씩 (후드로 가리지 않고) 모습을 드러낸다는 소문은 있었으나, 여전히 그들은 편견과 공격의 대상이었다.
칸나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마법병력을 양산해 그들이 설 자리를 마련해 주고, 군대의 정비가 끝난 뒤 더 이상의 마녀 박해가 없도록 관련 법안을 만들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마법 병력의 일은 임신과 출산 이후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리온과 달리, 그녀에게는 이 일을 먼저 진행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이 바빠 임신이 늦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리온 몰래 피임약을 만들어 먹었다.
'공주나 왕자가 마력을 지니면, 마녀에 대한 인식이 바뀔까?'
'아니면 ......처럼 유폐될까...'
몇 달 뒤, 칸나는 마녀들이 알아볼 수 있는 암호로 쓴 벽보를 여럿 만들어 밤에 사람을 시켜 몰래 수도 곳곳에 붙이도록 했다.
일반 사람들은 읽을 수 없는 그 내용은 마녀들이 성에서 마병으로 일할 수 있도록 모집하는 공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