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들이 돌아간 뒤에, 칸나는 리온에게 성 내에 첩자가 있음을 알렸다.
그들이 벌떼처럼 달려온 것도, 마녀들을 성 내로 불러 모았다는 것은 알지만 그 내용을 모르고 있기에 불안감에 일찍 행동으로 옮긴 것이라는 말과 함께.
"마법 기사단 육성을 위해 인사 개편이 있어서 사람을 늘린 탓인가."
".....복잡하군.."
리온은 예상했던 것보다 빠른 귀족들의 움직임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골치아파 하는 리온에게 칸나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어렵더라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찾아야 해요."
"분명 그들이 사람을 통해서든, 전서구*를 통해서든 연락하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전서구(傳書鳩) - 편지를 보내는 데 쓸 수 있게 훈련된 비둘기.
그리고 그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을 덧붙였다.
"마녀들이 훈련을 받은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에 벌써 눈치를 챘다는 건, 첩자가 우리 생각보다 많이 있을 수도 있고요."
리온은, 왕실을 감시하려 드는 귀족들의 행태에 기분이 나빴다.
피차일반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감시이긴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왕실은 귀족들을, 귀족들은 왕실을, 늘 감시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눈에 띄게 거슬릴 때는 각자 사람을 걸러 사용해 왔을 뿐.
한 가문 내에, 한 성 내에 있다고 해서 모두를 믿을 수는 없었다.
그 후, 귀족들의 마녀 모집에 관한 문제는 언급이 없었다.
치료사로 쓴다니 마지못해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귀족들은 자존심 때문에 자신들 가문의 사람은 단 한 명도 보내오지 않았다.
하나라도 보내온다면 칸나에게 지지를 해주는 모양새라, 차라리 지방의 어느 성에 가둬서라도 쉬쉬하는 게 낫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매일매일이 바쁜 일정.
칸나는 성 안에서 온전히 믿을 사람이 없으니 편히 대화를 나누는 것은 물론, 어떤 일이든 섣불리 시키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밖으로 자신의 편이 되어줄 사람을 찾으러 갈 시간은 더 없었다.
칸나에게는 하루 중 짧은 시간, 리온과 식사하는 것을 제외하면 누구와도 편히 웃지 못해 마음이 말라갔다.
더욱이 리온은 멀리서 보면 칸나의 방패이지만, 냉정하게 보면 지금 당장 그녀가 죽임 당한다 해도 지켜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뭐, 범인을 찾아 복수해 줄 수는 있겠지만...
아니, 그조차도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 대충 수습될 것처럼 보였다.
왕비는.. 모두의 위에 서 있는 자리 같으나 사실 죽음까지 이용당하기 좋은 위치이기도 했다.
칸나는 전에 리온에게 성 밖으로 나가 마을을 둘러보고 싶다는 요구를 했었는데, 이제 급하게 처리할 일은 다 끝났으니 시종을 붙인다면 괜찮다는 답이 돌아왔다.
‘왕비로 살아남으려면 일을 온전히 믿고 맡길만한 사람이 있어야 해.’
칸나는 함께 나가길 원하는 리온을 그럴듯한 핑계로 떼어놓고, 그가 귀족들과 함께 사냥을 나가는 날에 맞춰 변장을 하고 마을로 나왔다.
화려한 드레스를 평범한 옷으로 바꿔 입고, 후드가 달린 긴 망토로 얼굴과 머리카락을 가리자 아무도 칸나를 왕비라 생각하지 않았고, 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얼마만의 외출일까.
많은 사람들이 속한 세상을 보는 것은 모든 것이 새로웠으며 특별했다.
어릴 때 한 번씩 지오니를 따라 나왔던, 마음속으로 늘 동경해 왔던 세상이 눈앞에 펼쳐진 기분은 정말 가슴이 벅차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즐거운 마음으로 마을을 구경하던 도중, 칸나는 골목길 안쪽으로 아이들이 무언가를 던지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 보니, 여러 아이들이 한 사람에게 돌을 던지고 있었다.
얼굴을 감싼 팔 사이로 피가 흐르는 그 사람을 보자 칸나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이들에게 당장 그만두라고 소리치며 그 앞을 막아서서 싸늘한 경고를 던졌다.
"이건 해서는 안 되는 잘못된 행동이라고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았니?"
"몸으로 직접 배운다면 아플 텐데."
아이들은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다 도망을 갔다.
한숨 돌려 피 흘리는 그 사람에게 다가가 괜찮은지 살펴보려는데 누군가 칸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거기, 가까이 가지 말고 나와요. 신에게 저주받은 자니까.”
<아주 특별한 만남>
‘신에게 저주받은 자라고?’
얼굴에 술이 찌든 중년 남자가 수건과 음식이 든 접시를 들고 다가와 수건으로 핏자국을 닦아주며, 접시를 내려놓았다.
돌을 맞던 사람이 두른 낡은 천 사이사이 보이는 피부는 검기도 하고, 희기도 했다.
검은 피부의 사람들은 대게 외국에서 온 용병이었으나, 그는 검은 피부의 사람이라고도, 흰 피부의 사람이라고도 정의 내릴 수 없었다.
‘이 것이... 차별의 이유인가?’
한참을 서서 그를 바라보던 칸나의 모습을 의식했는지 중년 남자는 일어서서 다가와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 그리 쳐다보는 거요? 당신도 이 녀석이 신기해서 그럽니까?”
칸나는 위협하러 다가온 중년 남자는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피 흘리던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 그 사람은 누구인지..”
“알 거 없잖소.”
“당신 가족이에요?”
돌아서던 중년 남자는 멈칫하며 인상을 찌푸리고 다시 칸나에게 다가와 대체 무엇이 알고 싶은 거냐고 윽박질렀다.
칸나에 대한 중년 남자의 날 선 경계는 꼭 피 흘리던 사내를 보호하기 위한 것 같았다.
마치 가족은 아니더라도 친구나 혹은 연민이 있는 자처럼 느껴졌다.
칸나는 중년 남자에게 금화 한주머니를 내어주며 그에게 가족이 없다면, 자기가 데려갈 수 있는지 물었다.
금화 주머니 안을 확인하고 어두운 눈으로 칸나를 한참 바라보던 중년 남자는 한숨을 쉬며 데려가라고 이야기했다.
“... 내 가족은 아니오. 보다시피 워낙 아이들까지 못되게 굴다 보니 돌봐주고 있을 뿐이지만.”
“저 사람에 대해서 따로 아는 것은 없어요?”
“제르만에 위기상황이 닥치면 언제든 제물이 될 거라는 것 정도는 압니다.”
남자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두려운 듯 음식을 토해내며 겁먹은 눈초리로 바라보았고, 그런 모습을 보는 칸나의 마음은 더 아파왔다.
칸나는 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레 수건으로 남은 핏자국과 토한 흔적을 닦아주며 말했다.
“가자... 함께.”
재차 권유했지만 고개를 흔들며 거부하는 그를 칸나가 부드럽게 달래어 부축하며 일으켰다.
“어째서 당신이 그를 사 가려는지 모르겠지만, 취미 고약한 사람은 아니겠지요?”
“이런 금화를 낼 정도면 당신도 귀족이나 부잣집 상인쯤 될 텐데...”
“내가 안된다고 막아서서 될 일이 아니라 막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유희라면 그만 두시지요.”
계속해서 그녀를 경계하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에 칸나는 말없이 후드를 걷었다.
중년 남자는 칸나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보고 몹시 놀라, 새 왕비님이 아니시냐며 말을 더듬거렸다.
칸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여전히 겁먹고 움츠리고 있는 그 사람에게 미소로 말을 건넸다.
“자신의 이름은 알고 있나요?”
칸나는 환한 미소를 보이며 자신이 적이 아니라는 마음을 전하려 애썼다.
머뭇거리던 그 사람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칸나의 머리카락에 손을 댔다.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에 걸쳐진 칸나의 머리카락들을 조용히 바라보다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입니다...”
“그래, 미라. 만나서 반가워요. 난 칸나, 제르만의 새 왕비입니다. 나와 함께 성으로 가지 않겠어요?”
<함께 하기 위한 조건>
성으로 돌아와 리온에게 측근으로 두어 일하게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며 허락해 달라 요청했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며 그런 건 일일이 허락을 맡지 않아도 된다던 리온은, 인사를 하러 온 미라를 보고 멈칫했다.
“!”
한참을 말이 없이 소파에 앉아있던 리온은 칸나와 둘만 이야기하고 싶다며 미라를 방 밖으로 내보냈다.
“굳이 저 사람을 들이려는 이유가...?”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요. 저를 미워하는 것도, 귀족의 편도 아닌 제 사람이요.”
리온은 어쩐지 그녀가 선을 긋는듯한 느낌에 서운함이 들었다.
“나로는 부족한 건가? 아니, 내 측근은 어때.”
성 안에 첩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자신의 측근을 칸나에게 보내온다면, 리온은 또 누구와 어떻게 일 할 생각일까.
“당신의 보호가 아니라, 작은 일이라도 마음 놓고 맡길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알잖아요, 리온. 첩자가 아직 명확하지 않은 지금은 성 안의 사람을 이전처럼 쓰는 건 위험하다는 걸."
"혼자서 모든 걸 처리할 수는 없고요."
그러나 리온은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계속 입을 열지 않고 꾹 다문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미라가 조금 특별하게 생겼다고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되진 않아요."
"저를 왕비로 삼았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다른 모습' 이 장애물이 되진 못했으니까요."
"물론... 귀족들 사이에서 말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런 문제라면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귀족들과 싸우는 걸 그렇게 힘들어 하면서.
혼자 해결할 수 있다고?
리온은 갑자기 자신있어하는 칸나를 보고 의아함을 떨칠 수 없었다.
“프로이센 공작과 담판을 짓겠습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골치 아픈 것은 성내의 하인들이 아니라 각기 구축한 세력들로 영향력을 끼치는 귀족들이었다.
그리고 프로이센 공작에게는 귀족 전체를 설득할 힘이 있었다.
보상이든 협박이든, 귀족 모두를 협상의 테이블에 앉힐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와 마무리하는 것이 귀족들과의 갈등 사이에서는 단번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빠른 방법이었다.
칸나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배웠다.
그러나 리온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공작이 이름이 나오는 동시에 눈썹이 꿈틀대며 이제까지 본 적 없는 냉정한 얼굴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칸나가 달라진 리온의 태도에 의문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이내 마음을 바꾼 듯 한숨을 내쉬었다.
“미라를 데리고 있어도 좋아.”
리온이 내건 조건은 후드가 달린 긴 망토와 가면으로 모습을 가리는 것, 그리고 귀족들의 앞에는 정면으로 내세우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좋아요.”
“그리고......”
“?”
“아니, 널 믿을게.”
<미라(Mira), 그리고 거울(Mirror)>
얼마 지나지 않아 새 왕비가 수상한 사람을 성 내에 들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느덧 소문은 성벽을 넘어 귀족들에게까지 퍼졌고, 리온은 안건을 핑계로 자신을 찾아와 슬쩍 떠보며 확인하고 싶어 하는 귀족들에게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일축했다.
“왕비에 대한 트집을 그만 잡았으면 좋겠는데.”
“그저 쓸만한 하인 하나를 선물한 것뿐이야.”
“내 가정의 일을 그대들이 관리할 이유도, 권리도 없을 텐데.”
리온의 방법은 상책이었다.
미라를 드러내어 남들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무슨 이유로 칸나의 곁에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수상하다는 소문은 있으나, 그 역시 단지 차림새에 관한 이야기일 뿐. 모습은 귀족들이 몰래 소유하고 있는 비밀 기사단과 같았기에 할 말은 없었다.
“... 송구합니다.”
왕과 귀족들 사이를 잘 중재하는 스카드가 그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리온을 달랬지만, 그는 여전히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린 채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얹고 삐딱하게 앉아 스카드를 노려보았다.
“성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거나 죽여야 하나? 성 안의 이야기가 자꾸 귀족들에게 흘러가는 것 같은데.”
“양쪽 다 단속시키겠습니다.”
'성 내에 말을 전하는 놈이 없다고는 안하는군....'
리온은 불쾌했지만 예상 가능한 일이었고, 감당할만한 수준이었기에 조용히 그를 내보냈다.
사실 지금 그에게 더 신경이 쓰이는 일은 귀족들의 호기심이 아니라, 과거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칸나는.....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