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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하 Mar 31. 2024

23. 돌팔이 약사

리마는 제대로 세공되지도 못한 조그만 마나 목걸이를 만지작 거리며 중얼거렸다.



"게다가 간혹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력이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까요..."


"그럼 그 목걸이는 마력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너의 소망.. 같은 거군."


"맞아요."



스카드는 왕실에 있는 칸나를 비롯해 마법 부대에 편성된 수많은 마녀들을 떠올리자, 그녀의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어졌다.

리마는 그런 스카드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질문을 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물어봐. 나도 하나쯤은 대답해 줄 수 있어."



친절함과 까칠함 그 사이를 오가는 스카드의 말에 리마는 웃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저 때문에 불편하셨던 거잖아요. 질책을 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도 의외고. 마녀였다는 걸 알면서도, 아니.. 마녀라고 생각했을 텐데....."


"차별이나 책망이 없는 게 신기해?"


"네.."



스카드는 조용히 무언가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제르만 뿐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는 마녀를 박해해 왔어. 오래전 발발했던 전쟁의 영향이지. 그때는 각자의 입장에서 싸우며 자신이 옳은 쪽이라 믿었을 거야."


"........."


"하지만 세상이 변했듯.. 서로 계속 적대적인 것보다 공생하며 살아갈 방법이 있다면, 그 편을 택하는 게 낫지 않겠어?"



리마는 스카드의 이야기에 눈이 커지며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대 받는, 차별받는 피지배자들의 입장을 생각해 주는 지배 계층이라니.



"네 말대로 마녀뿐 아니라, 마력을 잃은 자들도 차별을 당하고 있어. 장기적으로 본다면 이건 모두의 손해야. 나와 다른 상대에게 호의적일 수는 없다고 해도, 적대적일 필요까지는 없는 세상을 만들어보려고."



일순 그의 눈이 쓸쓸해 보인다고 느낀 리마가 의아함을 품었지만, 스카드는 그러니 염려는 거두고 편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더 들려줄 것을 정중하게 부탁했다.



"...저는 꿈을 통해서 과거와 미래를 보곤 했었어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미래나 과거를요. 누군가의 죽음이나 재앙이 보이기도 하고... 그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 힘을 없애려고 하다가 부작용으로 마력을 잃게 된 거예요."


".....그럼 지금은 보이지 않아?"


"대신 영감은 강해졌지만요."



리마는 웃으며, 점술사*가 될 걸 그랬다고 농담을 했다.

*점술사 - 마녀들 중 영감이 발달한 자들이 간혹 점술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이 역시 차별받는 직업이었다.

농담을 꺼낼 정도로 편해진 그녀를 보는 스카드의 마음도 편안해졌고, 두 사람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한참 사담을 나누던 중, 스카드는 그 약에 혹시 적어둔 약초들 이외에 들어간 것이 있는지 물었다.

깜짝 놀란 리마는 손을 뻗어 흔들며 거칠게 부정했다.



"절대 없어요! 이상한 걸 넣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대신 약초들의 조합은 좀 고려했지만..."


"조합?"


"파의 뿌리와 대추를 허브 가루와 함께 검은 버섯이랑 비율을 맞춰 섞으면, 편안하게 자게 해 주거든요. 좋은 꿈을 꿀 수 있도록 돕고요."



스카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웃었다.



"꿈은 안 꾸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불편하셨다면 죄송해요. 행복한 기억을 되살리도록 백합에서 독을 빼고 추가했는데..."



리마의 말에 스카드의 표정이 굳었다.



".....행복한 기억? 환상이나 망상 같은 게 아니고?"


"아니에요. 경험에 없는 건 꿈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지는 것을 느낀 리마가 다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스카드는 자신이 꾼 꿈이 정말 과거의 기억이 맞는지 재차 물었고, 변하지 않는 그녀의 답을 확인한 뒤 웃으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돌팔이."


"?!"



그는 비난이나 원망이 아니라 그저 웃으며 던진 말이었지만, 리마는 깜짝 놀랐다.



"전혀 내 과거에 없던 일이야. 그런 강렬한 머리는 봤다면 잊을 수가 없지."


"강렬한.. 머리요..?"



스카드는 과거의 행복한 기억이 꿈에 나온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반박했다.



"내 꿈속에 나온 아이는 핑크색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거든. 그런 말도 안 되는..."



자신 있게 개꿈 취급하던 그는 칸나를 떠올리며 멈칫했다.



뭐 그런 머리카락이 아예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쪽은 마녀고, 염색했으니까.

특이한 케이스지.



"아무튼, 핑크색 머리의 사람은 없잖아?"



리마는 스카드가 꿈에서 본 사람이 핑크색 머리칼을 지녔었다는 얘기에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그 약초는 상상력을 동원해 꿈을 꿀 수 있는 게 아니라, 과거의 기억들만.... 그것도 행복한 기억들만 나오게 하는 건데..... 진짜인데...."



오히려 자신이 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민에 빠진 그녀를 보자 스카드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뭐야...

그럼 정말 그런 머리색을 가진 여자애랑 내가 만났었다고?


함께 놀고. 즐거워했으면서.

행복한 기억이라면서.


근데 기억도 못한다고?

....왜?



스카드는 고개를 저으며 리마에게 아닐 거라고 이야기했다.



"마력을 잃은 탓인지, 아니면 네가 헷갈린 탓인지, 그도 아니면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는 거겠지. 어쨌든 더 이상 저 약은 먹지 않을게. 네가 그 가게에서 일하는 건 눈감아주겠지만, 앞으로는 주인이 처방한 대로 약을 짓도록 하고."


"....네, 감사합니다."



스카드는 리마에게 작은 금화주머니를 건넸다.

격하게 사양하며 받을 수 없다고 난리 치는 그녀에게, 열심히 살아가라는 격려금이자 솔직하게 이야기해 준 보답이라며 받을 것을 강권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운 스카드는 복도에서 마주쳤던 칸나를 떠올렸다.


몇 주째 계속되는 수면 부족과 피로로 힘든 가운데, 연이어 꾸는 알 수 없는 꿈까지 겹쳐 더욱 지쳐 있던 상태.

낮에 본 칸나의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그가 요 며칠 꿈에서 본 아이를 생각나게 만들었다.

마치 꿈속의 아이가 자라나서 튀어나온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예상치 못한 상황 앞, 스카드는 거부감이 먼저 강하게 들었다.



칸나 왕비는 그 아이가 아닌데.

아니, 나는 그 아이를 모르는데.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 꿈에서도 얼굴은 보이지 않던 그 아이.

하지만 그건 거짓에 불과하다.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교육받고, 항상 모든 일과에 수행원이 따로 붙었던 내가 그런 심란한 머리색을 가진 아이와 놀았던 일이 있을 리가.



"....엘레나, 네가 내 꿈에 오지 그랬어."



스카드는 엘레나가 자신의 유년 시절처럼 핑크 세상이 찾아온 백설공주가 보고 싶은 마음에, 그런 모습으로 찾아온 것이라 여기며 잠에 들었다.




<인연이?!>



프로이센 가문에는 최근 들어 더 스카드를 향한 구혼장이 쏟아지고 있었다.

국내뿐 아니라 외국의 귀족들도 그에게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다.

부모도 형제자매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가문을 지키고 있는 그에게는 결혼이 불가결한 요소였지만, 스카드에게 재혼은 아주 신중해야 할 문제였다.



"겉은 빨갛고 예뻐도 속은 썩은 사과가 많아. 프로이센 가문의 사람이 되겠다고 해도, 내편이 될지 리온의 편이 될지 알 수 없고."



늘 같은 핑계로 결혼을 미루는 스카드를 보며 론은 태연하게 반박했다.



"공작님께서 충분히 컨트롤하실 수 있는 상대를 고르면 쉽지 않을까요?"


"사람은 변하거든.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아내를 계속 의심해야 하는 삶은 살고 싶지 않아."


"후계자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죽으면..... 프로이센 가문은 망하는 건가?"



시니컬하게 농담을 던지는 스카드를 보는 론의 얼굴이 굳어졌다.


오랜 기간 프로이센 가문에 충성하면서, 수많은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 겪어온 그였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스카드가 결혼하고 안정을 찾아, 가문을 든든하게 세우기를 바라며 보좌할 뿐.



"절대 망하게 두지 않을 겁니다."



그는 웃으며 대응하는 스카드에게 정색하고 재차 말했다.



"공작님의 술에 약이라도 타서 후사를 볼 테니까요."


"...미쳤어?!!!?"




보름 뒤, 리마가 찾아왔다.

커다란 프로이센 저택 문 앞에서 기가 죽어 우물쭈물하고 있는 그녀를 창 너머로 발견한 론이 불러들여 스카드의 집무실에 들여보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하지만 저 때문에 힘드셨었다고 하니까 그냥 있을 수는 없어서..."



리마는 수면제는 장기적으로 복용하면 위험하다며, 평범하게 잠에 드실 수 있도록 돕는 약을 만들어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이번엔 또 무슨 꿈을 꾸는 건데?"



의심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스카드에게, 그녀는 그저 잠이 잘 오도록 하는 약이라며 내용물에 관한 종이를 함께 건넸다.



"제가 직접 먹어보고 시험도 해봤으니 걱정 마세요. 정말 괜찮았어요."


"고마워."



담백하게 전하는 그의 인사에 리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



까닭을 알리 없는 스카드가 그녀를 빤히 보자, 리마는 이렇게 높은 분에게 감사를 받는 건 처음이라며 수줍게 웃었다.



"......."



스카드는 그런 놈들 많지, 하며 자신은 아버지에게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고맙다와 미안하다는 미루면 안 된다고 배웠다고 이야기했다.



"아버님도 공작님도 정말 멋진 분이시네요.."



리마와 작별인사를 주고받으려는 때, 마침 론이 커다란 은쟁반에 구혼장을 한가득 담아서 가져왔다. 

그를 본 스카드의 얼굴이 구겨졌지만, 론은 공무보다 더 중요한 거라며 책상 한가운데 내려놓았다.



"수석 집사라는 사람이 이렇게 방해가 되다니."


"가장 중요한 일을 가장 먼저 처리하셔야 하니까요. 도움이 되는 거지요."


"다 거절해. 됐지? 처리했으니까 가져가."


"안됩니다."



둘 사이의 기싸움을 보는 리마가 조심스럽게 무슨 편지인지 물었고, 론은 공작님께서 다시 결혼하실 때가 되었다며 기대 섞인 얼굴로 답했다.

리마는 머리를 짚으며 두통을 호소하는 스카드를 보고 미소 지으며 론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공작님은 결혼하실 거고, 아이들도 있을 테니까."


"?!"



그녀의 말에 스카드와 론 둘 다 깜짝 놀랐다.



"내가 결혼을 한다고?"


"아이들이 있다고요?!"



스카드는 영감이 발달했다는 리마의 말을 떠올리며 혹시 그 때문에 뭔가가 보이는 것인지 묻자, 그녀는 상대방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머릿속에 확실하게 느껴진다고 답했다.



"뭐... 결혼을 하긴 해야 하니까. 언젠가 해도 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이야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스카드와 달리 론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혹시 아들도 있나요?"



점술이라도 보러 간 듯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론을 보는 스카드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



론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손뼉을 치며 웃는 그의 얼굴은, 프로이센 가문에서 상급으로 토지와 보석 등을 부여했을 때보다 더 기뻐하는 것 같았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스카드가 론을 보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결혼했을 때도 그렇게 좋아했으려나."


"당연하지요! 그리고 어머님께서 스카드 공작님을 낳으셨을 때 더욱 기뻤습니다."


"........"



론은 스카드가 살짝 빈정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불편한 심기보다, 가문의 중대사에 더 집중하느라 눈치 없이 다음 행동이 이어졌다.

쟁반들 위의 편지들에 손을 올리고는, 이 중에 어느 귀족 아가씨가 어울리겠냐는 질문을 해서 끝내 스카드의 분노를 사고 만 것이었다.



"그만!!! 뭐 하는 거야?!"


"...도와드리려고 그러죠."


"이들 중에 없어! 그리고 이 안에 있다고 해도 난 당분간 결혼 생각이 없고."



구혼장들 중 단 한 개도 열어보지 않고 죄다 쳐내는 그를 이해할 수 없는 론이었다.

정색하며 화를 내는 스카드의 얼굴을 보던 리마가 집사에게 고개를 저었다.



"집사님의 기대처럼 빠르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스카드가 자신만만하게 론에게 쏘아붙였다.



"들었지? 이제 그만 가. 둘 다."



론은 잠깐 실망한 낯빛이었지만, 언젠가 올 그날을 위해 오래 살아야겠다는 말을 꺼내고 리마와 함께 방을 나섰다.

쟁반을 치우지도 않고, 리마를 배웅한다며 따라나서서 신이 나 떠드는 그를 보는 스카드가 어이없어 입도 다물지 못했다.


한숨을 내쉬던 스카드는 론의 생기 있는 모습을 오랜만에 본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외면하고 한쪽으로 치워둔 채 미뤄왔던 결혼에 대해 되짚어보았다.

남들 같은 사랑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리온의 수단이 되는 것은 원치 않는 결혼.

나라를 위해서라며, 실상은 프로이센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혼인을 계약으로 써먹으려는 왕의 속내는 이미 드러났다.


'아무나' 와는 할 수 없는 결혼이지만, '안 할 수' 도 없는 결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차라리 편할 텐데."



약간의 아쉬움과 답답함을 느끼던 그의 마음을 깨부수는 론의 외침이 들려왔다.



"공작님!!!!!"



벼락같은 소리와 함께 숨을 헐떡이며 집무실로 뛰어 들어오는 그를 보는 스카드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밖에서 듣는 사람들은 내가 죽기라도 한 줄 알 거야."


"아... 죄송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헤르나 후작님께서 귀환 중이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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