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나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왕실에서는 급하게 회의가 소집되었다는 편지를 각 가문에 보냈다.
스카드는 론의 보고 이후, 돌아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왕실로 불려 갈 그녀가 염려되어 빠르게 말을 달려 헤르나에게 향했다.
수도 근처에서 원정팀을 발견하고, 헤르나와 만난 스카드는 초췌한 모습으로 말 위에 앉아있는 그녀를 내려서 풀밭에 앉혔다.
"돌아가지 마. 지금 이 상태로 계속 수도까지 갔다간 왕실까지 불려 가야 해."
"....아...바..."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한 채 손을 휘젓는 그녀를 안아 들고 행렬의 중간에 있는 마차로 향했으나, 그 안에는 예상치 못한 인질이 타고 있었다.
"?!"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기색을 보아하니 놀란 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산 채로 데려올 줄은."
찌푸린 표정과 냉담한 심기를 드러낸 스카드를 외면하고 고개를 돌린 바이올렛은, 싫으면 지금이라도 자신을 풀어주라며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 죽이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
깜짝 놀라 돌아본 바이올렛이, 그의 싸늘한 눈빛에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고는 이내 얌전해졌다.
대충 상황을 보아하니 그녀가 혼자서 마차를 타겠다고 고집을 부린 듯해, 기분 나빠진 스카드가 평소에 하지 않던 텃세를 부렸다.
"당신이 내려."
"뭐라고?"
스카드는 어이가 없다며 화를 내는 바이올렛을 아랑곳하지 않고 헤르나를 마차 안에 앉혔다.
"조시. 이쪽으로 와서 헤르나가 기댈 수 있도록 옆에 앉아."
그는 수하에게 헤르나의 부축을 명령하고, 바이올렛에게 물었다.
"끌려 나올래, 걸어 나올래."
팽팽한 둘의 신경전이 지속되었고, 결국 인질 상태였던 바이올렛이 불만스럽게 마차 밖으로 나왔다.
스카드는 그녀를 자신의 말이 있는 곳까지 데려와서 안장에 올라가라고 말했다.
"지금 나보고 말을 타라고?"
"걸어갈래?"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한 바이올렛은, 하는 수 없이 그의 도움을 받으며 말 위에 올랐다.
생전 처음 말을 타본 그녀가 불안감과 함께 불만을 속사포처럼 쏟아내었지만, 스카드는 전혀 안 들린다는 듯 무시로 일관하고 그녀의 뒤에 올라탔다.
"뭐야, 너는 말에 왜 타?!"
"내 말이야."
말을 몰기 위해 고삐를 잡자 스카드가 바이올렛을 뒤에서 끌어안는 모양새가 되었다.
당황한 그녀가 얼굴이 빨개지며 이게 무슨 무례냐고 떠들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당신, 나랑 결혼하겠다고 배 탔던 거잖아. 이 정도는 참아."
"....그건...!"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신부가 결정되더니.. 죽었다고 하질 않나, 알고 보니 도망간 거였고."
"........"
스카드의 말에 바이올렛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새침하게 답했다.
"나 너랑 결혼 안 할 거야."
"알아. 내가 아니라 리온 좋아했으니까."
리온이 언급되자, 움찔하고 반응하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것도 옛날 일이야. 다른 여인의 남편이 된 남자를, 그것도 나를 저 좋을 대로 팔겠다는 남자한테 미련 없어."
그녀의 말투에서 독기를 느낀 스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현명하네."
수도에 다다르자, 그는 헤르나의 병사들을 해제시켜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헤르나가 탄 마차와 바이올렛이 탄 말은 프로이센 저택으로 향하게 했다.
틀림없이 왕궁으로 갈 거라 생각했던 바이올렛은 낯선 행선지에 도착해 당황했지만, 모든 걸 체념한 얼굴로 스카드의 안내에 따라 움직였다.
그는 론에게 그녀의 방을 배정해 줄 것을 부탁하고, 헤르나는 자신의 침실에 눕힌 뒤 의사를 불러오게 했다.
"수고했어..."
기절한 것처럼 잠들어있는 헤르나를 보고 스카드가 안심한 얼굴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계속 눈도 뜨지 못하고 식은땀을 흘리는 그녀의 이마에 물수건을 대어 닦아주던 스카드의 불평이 이어졌다.
"이런 큰 일을 떠맡기고서, 오자마자 보고를 받으려 하다니. 염치는 어디로 간 건지."
리온을 떠올리며 투덜대던 그는, 헤르나를 진찰하기 위해 온 의사를 맞이했다.
의사는 헤르나가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몸이 약해져 있다고 말했다.
잘 쉬고, 안정시키면 좋아질 것이라는 뻔한 이야기를 입에 담던 그는, 헤르나의 옆구리를 보고 멈칫했다.
옷 안에 무언가 들어있는 듯 살짝 불러있는 부분이 신경 쓰이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스카드의 허락에 그녀의 옷을 풀어본 의사는, 피가 잔뜩 배어있는 붕대를 보고 놀라 자세히 살펴보았다.
꽤 깊은 자상이었고, 간신히 지혈을 해둔 상태였지만 계속 몸을 움직인 탓인지 상처가 벌어져 있었다.
게다가 붕대만으로는 피를 감출 수 없다 생각한 그녀가 몇 겹의 가죽을 그 위에 덧대어 둔 탓에 다른 감염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
싸늘하게 굳은 스카드의 안색에 두려워하던 의사는 조심스레 지금 당장 수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론!"
"예, 공작님."
"지금 당장 깨끗한 천이랑 뜨거운 물 준비해. 이 의사의 조수도 데려오고."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헤르나와 함께 원정 갔던 사람 중에 측근을 데려와."
스카드는 수하를 통해 리온에게 편지를 전했다.
헤르나의 부상과 여독이 심해서, 당분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일은 잘 처리되었으니 나중에 보고를 받고 회의를 열면 되겠다는 것도 함께.
이후 그가 피 묻은 그녀의 옷가지를 하인에게 세탁하라고 건네는데, 안주머니에서 편지가 하나 떨어졌다.
'토마스 카퍼'
헤르나와 함께 돌아와 브리핑을 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바로 본국으로 귀국한 카퍼 백작의 친필 서신이었다.
"안 죽고 살아서 귀국하나 보군..."
리온에게 쓴 보고서라 생각해 열어서 내용을 확인하려던 그는, 반대편에 쓰인 '헤르나에게' 라는 글씨를 확인하고 그대로 그녀의 머리맡에 놓아두었다.
헤르나의 수술이 시작되고, 스카드는 그녀의 몸에 칼을 박아 넣은 사람이 누구일까에 대해 추리하기 시작했다.
바이올렛이 이 일과 무관하지 않다 여긴 그는, 헤르나의 수술이 무사히 끝남과 동시에 그녀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쾅쾅쾅쾅-!!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잠옷 차림으로 나온 바이올렛이 한밤 중에 이건 너무 무례한 것 아니냐고 불평했다.
"손님 대접이 엉망이잖아."
그녀의 말에 스카드는 내리깐 눈으로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당신은 인질이야. 착각하지 마."
"...보자 보자 했더니, 왕녀에 대한 예의도 없고. 내가 어디까지 참아줘야 하지?!"
바이올렛의 말에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웃으며 답답한 숨을 토해냈다.
"난 당신이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야. 지금 당장 여기서 죽일 수도 있어. 당신을 살려온 헤르나에게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서 봐주고 있는 것뿐이고."
"........."
"그나마 귀한 인질이라 생각해서 머물 곳도, 먹을 것도 최상으로 대접해 줬지만... 이젠 상황이 좀 달라졌어."
"?"
"헤르나가 칼에 찔려 왔더라고."
"........."
놀라지도 않고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이미 알고 있는 일인 듯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찬 스카드가 그녀의 멱살을 틀어쥐고 윽박질렀다.
"근데 당신이 마차를 타? 그것도 혼자?"
".....치료하고 가자고 설득했던 건 나야. 한시가 급하다고 서두른 건 그 사람이고."
"치료받는 동안 당신이 도망갈 걸 알았을 테니까."
딱히 반박하지 않던 바이올렛은 자신의 선택이 단순한 이기는 아니었음을 말했다.
"힘들 테니까, 못 견디면 중도에 쉬면서 상처를 치료할 줄 알았어."
"장난해?"
"나도 내 계획과 남은 인생이 어그러졌어! 내가 왜 그런 상대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해?! 그 정도면 선택권이 없었던 것도 아니잖아."
스카드는 바이올렛을 끌어다 침대에 내던지며 그녀의 목을 한 손으로 잡았다.
"유언이 될 수도 있어. 신중히 해."
"....너 진짜...."
-똑똑똑
"들어와."
노크소리에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는 듯, 스카드는 방으로 불러들였다.
이윽고 헤르나와 원정을 떠났던 그녀의 최측근 마틴이 긴장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왕녀님이 마차에 탔을 때의 상황을 말해봐."
침대에 누워 목이 졸리듯 있는 왕녀와, 그녀를 죽일 듯한 모습으로 있는 스카드를 보고 잠깐 멍해졌던 마틴은 이내 자세를 꼿꼿하게 고치고 그때의 일을 이야기했다.
........
"안 타."
"걸어가실래요?"
마차에 타기를 거부하는 바이올렛에게 헤르나는 태연하게 물어보았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난 왕녀라고."
"왕녀면 다리를 못쓰나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은 답답함에 바이올렛이 소리를 질렀다.
"너와 내 신분이 다른데 어떻게 한 공간에 있겠어?!"
헤르나를 말단 귀족 나부랭이나 평민 출신의 기사쯤 된다고 생각한 그녀는, 감히 미천한 너와 마차를 탈 수 없다고 우겼다.
그렇게 자존심만 세우는 바이올렛의 말에 헤르나의 피로가 배로 몰려왔다.
'물론 자기가 왕녀이긴 하지만 후작과도 동승 못하겠다는 건 좀.... 브리텐드 법은 그런가?'
"저는..."
헤르나가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하려는데 바이올렛은 들을 생각도 안 하고 다다다다 쏘아붙였다.
"시끄러워! 어쨌든 네가 나를 데려가고 싶으면, 그만한 대접을 해줘야 해. 그러니 마차에는 내가 혼자 타겠어. 애초에 이런 촌스러운 마차에 타는 것만 해도 감사한 줄 알라고. 너는 마차에 접근하거나 올라탈 생각하지 마. 그랬다간 콱 죽어버릴 테니까."
"뭐라고요?"
"너는 말을 타고 앞에서 가. 호위가 필요해. 네가 직접 하면 되겠네."
옆구리 쪽에 슬쩍 손을 올리던 헤르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바이올렛은 단칼에 거절했다.
"평상시라면 그렇게 하겠지만 지금은..."
"싫으면 안 타. 가지도 않을 거고. 몸이 문제라면 쉬었다가 가면 되겠네. 저 여관에서 쉬면 어때?"
자신이 침대에 누워있는 사이에 바이올렛이 도망갈 것을 뻔히 아는 헤르나는 더 이상 설득하지 못하고 그녀의 말대로 말에 올랐다.
.........
"........."
이야기를 들은 스카드가 마틴과 함께 방 밖으로 나갔다.
이야기 도중 그에게서 살기를 본 듯한 바이올렛은 손이 떨려 침대를 짚고 일어나는 것조차 버거웠다.
"....뭐야...... 미친놈이잖아..."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온 스카드는 흥분이 가라앉은 듯, 그녀를 티 테이블이 있는 곳에 앉히고 차분하게 얘기를 시작했다.
"아무리 당신이 왕녀라지만, 그녀도 후작인데 상당히 무례하군."
".....후작 가문의 딸이라는 거야?"
"아니. 헤르나는 뮐러 가문의 후작이야."
"후작..? 그 여자가? 뭐야, 가주가 직접 왔다고?"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그녀에게 스카드가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게 리온의 멍청함이지. 아니... 교활함인가."
새삼스럽게 헤르나가 걱정되는 듯 바이올렛이 조심스레 물었다.
".....상태는 어때?"
"당신은 물을 자격 없어.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해."
냉정을 되찾은 스카드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진실을 말하면 어떤 대답이든 살려는 주겠지만, 거짓을 말하면 죽이겠다며 위협했다.
"헤르나, 누가 찔렀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