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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하 Apr 14. 2024

25. 그날, 키스

"물어볼 게 있어."


"?"


"솔직하게 대답해 줬으면 해."



주점을 벗어난 뒤, 하루종일 어딜 쏘다니다 온 건지 모를 헤르나의 일과를 궁금해하는 토마스의 방에 그녀가 먼저 찾아왔다.



"네가 여왕의 사람이라는 건 잘 알아."


"....그런데?"


"바이올렛 왕녀와는 무슨 사이야?"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토마스는 자신이 묻고 싶었던, 필요한 정보들은 어디 가고 사건과 상관없는 이런 한심한 질문을 하는 걸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그녀가 오늘 자신을 따돌렸으니 순순히 대답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게 왜 궁금한데?"


"솔직하게 대답하라고 했잖아."



토마스는 빈정거리는 얼굴로 의자에 앉은 몸을 뒤로 젖혔다.



"명령하는 거야?"


"자꾸 말 돌리지 마. 네 머리통도 돌려버리기 전에."



계속 겉도는 대답에 짜증이 난 헤르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살짝 화를 냈다.

잠깐의 참을성도 없는 그녀의 말에 어이없어 웃음이 터진 토마스가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 입에서 나올 말보다 더 솔직하고 정직한 건 네 눈동자인 것 같은데.'



그는 헤르나의 이마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걷어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제안을 꺼냈다.



"그럼 어떤 질문이든 솔직하게 서로 묻고 답하기. 돌려 말하지 않기. 어때?"



기다렸다는 듯,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제안에 응했다.



"좋아. 내가 물어본 거 먼저 답해."


"....아무 사이도 아니야."



토마스의 눈을 바라보며 진위 여부를 살피던 헤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그래. 사랑하는 여자의 조카까지 넘보는 건 좀 그렇지?"


"여러 번 말하지만, 여왕과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듯 냉정하게 쳐내는 목소리였지만, 헤르나의 의심은 꺼지지 않았다.



"앞에서 대놓고 못 떠들어도, 뒤에서 소문은 자자하던데? 제르만에까지 말이 돌 정도면..."


"그야..... 밤에 잘 불려 가니까..."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얘기에 아차, 싶은 토마스가 입술을 깨물고 말을 삼켰다.



"잠자리를 하는 것도 아닌데 왜 밤에 불려 가?"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지만, 여기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토마스가 말을 돌렸다.



".....나랑 이사벨 사이가 궁금한 거야?"



그의 말에 헤르나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무슨 사이든 상관없어. 네가 내 남편이나 애인도 아니고."


"....그런데 왜 물어봐?"


"여왕에 대한 너의 마음이.... 단순히 충성심 이상의 뭔가가 더 있는지 알고 싶어서."



충성심 이상이라...



토마스는 헤르나의 눈에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는지 궁금했다.



"예를 들면?"


"광기, 집착.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했지만, 얼룩지고 추악한 것들 말이야."



광기는 여왕을 만나기 전에도 잔뜩 있었던 것 같은데, 싶은 생각과 함께 그는 부드러운 미소로 물었다.



"....만일 그런 게 있다면?"


".....있는지 없는지부터 말해."


"없어."


"지금 이 대답.. 솔직한 거지?"



헤르나의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본 토마스가 눈을 감았다.



헤르나...


이건 나한테 불리한 거야.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점점 너한테 빠져들고 있거든.


마음이 기울어진 채로 진실을 고백하는 시간이라니.

시작부터 잘못됐잖아.


......


왜일까.


아름다운 여성은 브리텐드에도 차고 넘치는데.

너에게 끌리는 이유가 뭘까.


난 왜 자꾸 네 입술에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까.

이것도 리온이 노린 수 일까.



"야! 왜 대답 안 해!"



그새를 못 기다리고 날 다그치는 너의 목소리까지 사랑스럽게 들리는 걸 보면...



"...제대로 미쳤구나."


"?"



토마스는 영문을 모르는 헤르나의 뒷머리를 감싸 안듯이 끌어당기고 키스했다.



"......"



난데없이 키스라니.


당연히 뿌리치거나 화낼 것이라고 예상한 것과는 달리.. 아니, 뺨을 후려치거나 주먹질이라도 할 것이라는 토마스의 예상과 달리 헤르나는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거부 없는 그녀의 입술에 놀란 것보다 만족이 컸던 그는,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이 상황을 즐겼다.


한참 뒤..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숨틈이 들어오고, 감은 눈도 속눈썹을 올리며 열정에 취한 서로의 눈동자를 드러냈다.

말없이 헤르나를 바라보던 토마스에게 그녀가 먼저 타박하듯 말을 던졌다.



"말에 솔직하라고 했지, 몸에 솔직하라고는 안 했는데."



하지만 그녀의 이런 말들도 이제는 귀여운 투정 정도로 받아들이는 토마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묻는 건 이미 솔직하게 대답했고, 몸에는 솔직하게 못했어."



아쉽다는 듯이 말하는 그를 보는 헤르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어디서 시치미야.

좀 전까지 우리..



"키스했잖아."



그녀의 말에 토마스의 눈이 커졌다.



애도 아니고.

고작 이런 걸로?



그는 태연하게 헤르나의 허리를 안으며 답했다.



"몸에 솔직했으면, 침대에 있었을 테니까."



행동은 솔직하게 하지 못했지만, 반응은 아주 솔직한 그의 몸을 확인한 헤르나가 토마스를 밀쳐내고 책상에 걸터앉았다.



"아~주 비싼 값을 치러야 할 거야."



키스 한 번에 고리대금업자처럼 눈을 반짝이며, 우위를 점령한 듯 기세 등등 한 그녀의 얼굴을 본 토마스가 호탕하게 웃었다.



돈도 많으면서.

나한테 뭘 받으려고.


그래.

뭐든.


줄게.

네가 원하는 거.




..........


낮에 토마스를 따돌리고 나온 헤르나는 주점에서 얻은 정보를 통해,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냈다.


‘조세핀 랑’


그녀에 대해 알아낸 것은 뒷골목에서 자랐으며, 양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비밀 도박장과 유곽을 운영한다는 것, 거칠고 위험하며 돈을 좋아하고, 남을 믿지 않지만 정보는 정확하다는 이야기였다.


조세핀이 운영한다던 유곽을 찾아 문을 두드리던 헤르나는, 테라스에서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보고 있던 한 창녀와 눈이 마주쳤다.



“···여기서 일해?”


“여자를 상대하는 취미는 없는데···”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그녀에게 헤르나는 금화 주머니를 보여주었다.



“조세핀 랑을 만나러 왔어.”


“···바지 입은 여성 귀족이라··· 재수 없어.”


“내 바지에 천조각이라도 보태줬냐?”



사람을 찾는다는 부탁을 하기엔 다소 거친 태도를 보이는 헤르나를 보며 창녀는 까르르 웃었다.



“이봐, 잘난 귀족 아가씨. 당신이 그 돈 다 준대도 난 안 알려줘.”


“그럼 네가 필요한 걸 주면 어때?”


“·········”



창녀는 말없이 담배를 피우다 안으로 들어가더니 테라스 문을 닫았다.



‘젠장···’



좀 더 다르게 흥정했어야 했나 아니면 자리를 옮겨야 하나 고민하던 때, 헤르나가 서 있던 곳의 문이 살짝 열리며 좀 전까지 테라스에 서 있던 창녀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줄 거야?”


“뭐···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거라면 어느 정도는···”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제일 간단하지, 싶은 보편적인 귀족들의 생각.

헤르나도 역시 쉽고 간단하게 해결하고 싶었다.

그러자 창녀는 고개를 저으며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걸 원한다고 말했다.



"원하는 게 대체 뭔데?”


“랑을 죽여줘.”


“·········”



정보가 필요해서 찾는 사람 앞에서, 그 상대를 죽여달라는 의뢰라니.

만나서 정보는 빼내고 죽이라는 거냐? 아니면 그냥 정보고 뭐고 일단 죽여달라는 거냐.


사건의 해결이 급한 이때,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헤르나는 거절했다.



“난 용병이 아니야.”


“알아.”


“살수도 아니고.”



창녀는 다시 까르르 웃으며 헤르나의 옷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런 고급 실크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오해할 만큼, 난 멍청하지 않아.”



그녀의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헤르나는, 한숨을 쉬며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다 결국 돌아섰다.

순순히 포기하고 돌아서는 그녀를 보던 창녀는, 헤르나의 뒤통수에 대고 조소를 던졌다.



“겁쟁이.”



다섯 살 때 이후로 들어본 적이 없는 말에 움찔, 반응한 헤르나가 인상을 쓰며 돌아섰다.



“······겁 때문이 아니거든?”


“세력이 커. 그 사람... 너 혼자는 상대가 안될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런 부탁은 왜 하는 거야?”



창녀는 어이가 없어하는 헤르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세력이 더 커 보여서.”


“······”



뭘 보고, 뭘 믿고.

어째서 그렇게 판단한 거지? 싶던 찰나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입고 두른 것만 해도 백작 이상의 귀족이 아니면 감당 못할 고급품인데. 이런 곳에 랑을 찾으러 혼자 왔다는 건, 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함부로 널 건드릴 수 없다는 거잖아? 자기를 찾는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상대방을 거꾸로 매달아 버리거든, 그 사람.“



헤르나는 조세핀 랑을 만나러 가겠다는 말에, 위험한 일을 당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던 주점 안의 사람들이 생각났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헤르나가 뮐러 가문의 사람이며, 더욱이 후작이라는 것을 몰랐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창녀는 헤르나의 겉모습을 보고 단번에 보통 귀족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이름이 뭐야."



경계심인지, 그냥 싫은 건지 대답하지 않는 창녀에게 헤르나는 한 번 더 채근해 이름을 물었다.



"베티."


"그래, 베티. 나는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어. 아무렇게나 사람을 죽일 수도 없고. 하지만, 네가 랑을 죽이려는 이유가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거라면 도와줄게."


"...어떻게?"


"값을 지불해서 널 빼오든, 널 몰래 다른 지역으로 빼돌리든."



베티는 헤르나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붉은 머리칼 끝을 만지작 거렸다.

그리고 바짝 다가서서 헤르나에게서 풍기는 고급 향수의 내음을 한껏 들이키더니 만족한 말투로 귓가에 속삭였다.



"네 뒤쪽으로 보이는 잡화점을 지나 두 번째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이 달에 운영하는 도박장이 있어. 베티가 소개해줘서 왔다고 하면 돼. 판돈은 두둑하니까, 그들이 볼 때 네가 낯설어도 거절은 안할 거야."



베티는 환하게 웃으며 다시 유곽 안으로 들어갔다.



"랑은 주로 도박장에 있어. 네가 찾는 정보를 잘 발견하길... 또 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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