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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하 Apr 21. 2024

26. 조세핀 랑

베티와 헤어진 뒤, 헤르나는 멀리 떨어져서 대기하던 마틴*과 함께 그녀가 알려준 대로 잡화점을 지나 두 번째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틴 - 뮐러 가문의 젊은 병사, 헤르나의 측근. 격투술에 능하다.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엎드려 구걸하는 사람, 좀 더 안쪽에서는 누군가를 협박하는 듯한 사람, 술에 취해 널브러진 사람 등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있었다.

앞 쪽에 덩치 큰 사내를 발견한 헤르나는 걸음을 멈춰 곁에 있던 마틴에게 조용히 지시했다.



"여기서 대기하고 있다가, 내가 한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으면 아까 그 유곽의 베티를 찾아가."


"차라리 토마스에게 정보를 흘리고 그 자를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진짜로 협력하는 관계가 아니니까 그건 위험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도 아직 모르고."



헤르나를 이런 위험한 곳에 혼자 보내는 것이 영 마뜩잖은 마틴이 자신도 동행하겠다며 나섰다.



"그럼 제가 들어가서 도와드리는 건 안 되나요?"


"널 못 믿어서가 아니라, 내가 감당하기 어려우면 나 대신 아예 깽판 칠 놈이 필요해서 그래. 토마스는 이쪽으로 보내고, 너는 베티를 찾아가. 베티가 속였다면 그녀를 잡아서 나를 찾으면 될 거야. 아니라면, 베티 역시 위험해지니까 그녀도 우리 쪽으로 빼돌리고."


".........."



마틴은 불안함을 감추고 하는 수 없이 헤르나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헤르나는 길바닥에 어수선히 있는 사람들을 조용히 지나쳐 시끌시끌한 소리가 나는 문 앞에 섰다. 

그곳을 지키던 덩치 큰 사내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못 보던 얼굴이라며 의심했다.



"베티가 소개해서 왔어."


".....?..."



베티라는 이름에 흠칫하던 사내는 다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다 조용히 물었다.



"판돈은 있겠지?"



헤르나는 웃으며 두둑한 주머니를 흔들어 짤랑거리는 금화 소리를 들려주었다.



"좋아. 들어가."




문이 열리자 앞이 온통 담배연기로 뿌연 도박장이 드러났다.

여기저기서 흥분한 목소리와 함께.



'눈에 띄려면... 도박판에 앉아서 좀 따야 하나? 아니지... 여기는 다들 꾼들인데 죄다 잃고 일찍 쫓겨나기 십상일 테고.'



입구는 뚫었으니 단번에 안쪽으로 들어가 조세핀을 찾을지, 아니면 도박하러 온 사람인 것처럼 위장해 주변을 살필지 고민하던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 두드렸다.



"?"


"조세핀을 찾아왔지? 따라와."



낯선 남자는 익숙하다는 듯 손짓하며 따라오라고 재촉했다.

어떻게 알았지? 싶은 마음도 잠시.

남자를 따라가는 그녀의 뒤로 큰 주머니를 들고 있는 키 작은 남자 하나가 은밀히 따라붙었다.



'사람 머리가 들어갈만한 자루라...'



계속되는 의심과 경계 속에서 걷던 헤르나의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이, 앞에 걷던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베티의 이름을 대고 오는 사람은, 다들 랑을 찾는 사람들이지."


".........."



베티에게 당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쯤, 그는 작은 문 앞에 멈춰 서서 그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했다.



몸을 수그려야 들어갈 수 있는 문.

그런 자세로 들어간다면, 단박에 방어는 하기 어렵겠지.

사람을 못 믿는다더니... 정말...



찜찜한 헤르나가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 안에 조세핀 랑이 있다는 거야?"


"들어가 보면 알아."



제대로 된 대답도 해주지 않는 태도에 그녀의 불만이 이어졌다.



"너 같으면 수상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그냥 들어가겠냐?"


"어차피 안 들어가면 못 만나."


"뒤에 자루 들고 오는 놈이라도 좀 치워주든가."



헤르나의 말에 낯선 남자는 크게 웃으며 뒤따라오던 사람을 고갯짓으로 쫓아냈다.

그리고 문을 열어 정중하게 그녀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어둑한 방 안에는 작은 테이블을 두고 마주 보게 되어있는 의자 두 개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조세핀은 왜 찾지?"



문 옆에 칼을 들고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여자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물었다.



"당신이 조세핀이야?"


"......."



헤르나의 질문에 그녀는 자신이 조세핀 랑이라 소개했다. 

여자의 눈을 보던 헤르나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가 들고 있던 칼의 냄새를 맡았다.



"?!"



당황하던 그녀의 손목을 잡아 손을 이리저리 확인하던 헤르나가 고개를 저었다.



"조세핀은 자신을 찾는 사람이 있으면 거꾸로 매달아 버릴 만큼, 잔인하고 의심이 많은 성정이라고 했어. 이렇게 기름 냄새도 안 빠진 칼 따위 가지고 있는 여자가 아니라고. 아무리 청소해도 지워지지 않는 이 방의 수많은 피비린내가 너한테서는 조금도 안나."



칼을 들고 위협했지만 사용해 본 적도 없을 것 같은, 굳은살 하나 없이 곱고 가녀린 손도, 그녀가 조세핀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당황함에 얼굴이 빨개진 여자는 문 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 왜 이 여자 머리통은 안 가린 거야?!"


"주머니로 뒤집어써서 앞이 안 보인다고 내가 너를 조세핀으로 오해할 것 같아?"



두 사람의 실랑이가 길어지자 처음에 자신을 방으로 안내했던 남자가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앉아. 나랑 얘기하자고."



그는 방 안에 있던 여자를 내 보낸 뒤, 헤르나에게 술을 마실 것인지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술을 마시겠냐 싶은 헤르나가 인상을 쓰며 거절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구석 선반에 놓인 술병과 술잔을 두 개 들고 왔다.



"물 한 잔도 여기서는 마시면 안 될 것 같으니까. 본론부터 하지?"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며 술을 따르던 그가 늑대굴에 먼저 들어온 것은 너라며 손가락질했고, 헤르나는 딱히 부정하지 못했다.



"알아. 나한테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으니까 위험을 감수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어."



그녀의 차림을 꼼꼼히 살피던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옷을 보니 부잣집 귀족 같은데... 없어지면, 문제가 될까?"



이대로 죽이고 조용히 묻으려는 건가, 싶은 그의 이야기에 헤르나가 반박했다.



"부잣집 귀족이 아니어도, 사람은 함부로 없어지면 문제가 되지?"



그녀의 대답에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던 그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생각보다 더 높은 신분인가 보네.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거 보면."


"?"


"이 세상엔 없어져도 상관없는 사람들이 많아. 상관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더 많고."



수도와 전쟁터 말고는 겪어본 적 없는 헤르나였기에 더는 반박할 수 없었다.

사람의 생과 사는 많이 겪어보았지만, 가난과 고통.. 비참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녀의 일생이었다. 

헤르나 역시 빛나는 귀족들의 그림자에 가려진 서민들의 생활은 알지 못했으니까.



".......협박하는 건 아니지만, 나한테 시간이 별로 없어. 그 안에 여기서 날 내보내든지, 진짜 조세핀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



혼자 술을 연거푸 마시던 그는 그럼 그렇지, 하며 혀를 찼다.



"말하는 걸 보니 보험을 들어놓고 왔군?"


"네 말대로 나 같은 세상 물정 모르는 인간이, 이런 험한 데에 아무 대책 없이 올리가 없잖아?"



재수 없으니 이대로 조용히 꺼지라고 응수하던 그에게, 헤르나는 베티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유곽에 있는 애들은 다 랑을 찾는 사람이 있으면, 속여서 이쪽으로 보내는 거네. 여기서 처리하는 게 일이 깔끔하니까."


"맞아."


"그렇지만 다 같이 한통속이라기엔... 난 따로 부탁받은 게 있는데."


"....부탁?"



헤르나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그를 도발했다.



"랑을 죽여달라더군."



-챙!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빠른 솜씨로 검을 뽑아 그녀에게 겨눴다.

날아간 술병의 목이 그가 정말 살기를 가지고 휘둘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테이블 위로 흩어진 술병 조각과 술들을 보던 헤르나가 발끈했다.



"야!"


"베티가 그런 부탁을 했다고? 너 베티가 누군지는...."


"그 의뢰를 받아들였으면, 이렇게 순순히 말하겠어? 난 그저 정보를 사러 온 거야. 조세핀을 어떻게 할 목적이 아니라고."



진정하라는 헤르나의 말에 랑을 찾는 목적이 정말 단순히 정보 때문인가 묻던 그는, 칼을 거두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고민하는 듯하더니 한숨을 내쉬다 헤르나에게 따라주었던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켜 독이 없음을 확인시킨 후, 그녀에게 사고 싶은 정보가 무엇인지 물었다.



"세 달 전쯤.. 제르만 해역에서 브리텐드의 무역선 하나가 사라졌어. 타고 있던 사람들 중엔 왕족도 하나 있었고. 그들도 물건도 모두 행방불명이야. 나는 왕명을 받고 누가 그런 일을 벌인 건지, 사라진 왕족은 어디로 간 건지 알아보러 온 거야."


"해역에서 사고가 났으면, 해적이 그랬을 테고. 왕족이면 몸값을 받을 텐데... 세 달이나 소식이 없다는 건, 이미 물고기 밥이 됐다는 얘기 아니야?"



이렇게 단순한 사건을 뭘 고민하냐며 그녀를 타박하던 그를, 헤르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런 뻔한 추리 듣자고 온 거 아니야."


"...죽은 게 아니라 사라졌다고 믿는 이유가 있구나?"


"아무에게도 이득이 없으니까."



이번 사건으로 양국은 큰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위험에 빠졌다.


해적이 범인이라면 그들 또한 추격을 피하지 못할 테고, 해적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이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책임을 피하고자 해적들이 서로를 밀고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저 그런 무역선이 아닌, 왕실의 배를 건드렸으니 제대로 탈이 날 수밖에.


헤르나는 해적들이 종종 쉬어간다는 이스터스 항구에 들러 정보를 얻으려 했지만, 그녀에게 닿은 건 해적이 아닌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정보책이었다.

'조세핀 랑'


그리고 주점의 주정뱅이들 얘기를 빌자면, 얼마 전 이곳에서 낯선 이들이 목격되었다고 했다.



"너무 희망에 거는 거 아닌가? 차라리 이 시간에 해적들을 족치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그런 낮은 수에 걸기엔 이 문제가 커. 단순히 범인만 잡아다 대령한다고 양국 간의 외교 문제가 사라지지도 않을 테고."


"예상하는 범위를 들려줘."


"그건 조세핀한테 들려주고 싶은데."



전부를 말하지 않으려는 헤르나와 이야기를 더 들으려는 남자 사이에 불편한 침묵이 오갈 때쯤, 문이 열리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 집 똥개가 날 찾아왔더라고."



돌아보니 베티가 피가 묻은 단검을 든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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