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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하 Apr 28. 2024

27. 똥개

베티의 얼굴을 본 헤르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낯익은 얼굴에 놀란 것도 잠시, 그녀의 손에 든 칼의 피를 확인한 헤르나의 침묵이 이어졌다.



"......."



헤르나는 입안에 맴도는 여러 가지 말을 고르다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 그 똥개라도 잡고 왔다는 거야?"



헤르나의 시선이 칼이 머문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단도를 바라보며 웃었다.



"똥개의 피는 맞긴 한데..."


"......."



마틴이 떠오른 헤르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의 사람을 매우 아끼는 그녀에게는, 전쟁에서조차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는 무리한 욕망이 있을 정도였다.

전시 상황에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한 명이라도 더 지키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고, 자신의 능력을 끌어올렸다.



'내 사람이 죽는 건 싫어..!'



극한의 스트레스 앞에서 오히려 냉정해지는 헤르나는, 머릿속에서 현재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여러 변수를 계산했다.



"........"



얼마 후 싸늘하게 변한 그녀의 표정을, 베티도 헤르나와 마주 앉아 있던 남자도 눈치채지 못했다.



너무 쉽게 생각했던, 자신의 안일함을 탓하는 것은 나중에.

지금은 조세핀과 한패인지, 자신을 도발하는 것인지 모를 저 여자의 머리통을...



"....부숴버릴까."


"?"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는, 헤르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베티에게 가까이 다가가려하자 저지시키려 했다.

그를 눈치챈 헤르나가 재빨리 남자의 얼굴에 어깨너머로 술잔을 집어던지고, 품 안의 마검을 꺼내어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놀란 베티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뭐야 너... 위험한 거 들고 있네?"


"위험한 건 나야. 이 칼이 아니고."



도발적인 행동과는 달리 차분해 보이는 헤르나의 눈을 본 베티가 손에 든 단도를 내려놓았다.



"못 이길 것 같아서.. 라는 착각은 하지 마. 저 문 너머에만 해도 내 말 한마디면, 너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십수 명이야."


"이놈을 시작으로 네 목도 따고, 문 밖에 있는 놈들도 죄다 따버리지 뭐."


"진심이야?"



말의 진위를 파악하려고 하는 베티의 말 따위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헤르나의 머릿속에는 온통 마틴 생각뿐이었다.



"네가 먼저 시작한 거다..."


"엄~청 아끼는구나?"



비꼬는 듯한 그녀의 말에 다시 발끈한 헤르나의 칼이 남자의 옆구리를 더 깊게 파고들자, 베티는 큰소리로 '그만!' 이라고 외쳤다.



"마검에 찔리면 그냥 자상 정도가 아니라는 거, 너도 알 거 아니야. 정말 죽일 거야?"


"그러는 너는 이미 내 똥개 잡고 왔다고 했잖아?"



복수심에 불타는 헤르나의 반응에, 베티는 바닥에 내려놓은 단도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피는 묻었지만... 살아 있는데?"



마틴이 살아있다는 이야기에 헤르나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본 베티는 웃으며 아직은. 이라고 덧붙였다.



"이 미친년이?!"



베티는 화를 내는 헤르나를 진정 시키며, 속이지 않을 테니 따라오라고 말했다.

거절하며 여기로 데려오라는 그녀에게, 마틴을 만나려면 직접 와야 한다고 재차 말했다.



"의식이 없는 상태라서 말이야."



하는 수 없이 따라나서는 헤르나를 보는 베티의 표정은 적대감도, 경계심도 아닌 만족함이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문 밖에 서 있는 수하들에게 칼에 찔린 남자를 치료할 것을 명령하고 헤르나와 단 둘이 도박장을 벗어났다.


콧노래를 부르며 앞장서는 베티의 뒷모습을 보며 헤르나는 부아가 치밀었다.

그녀를 악덕 포주에게 잡혀있는 불쌍한 창녀라고 여겼던 자기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어 놓고 싶었다.



"한 패 주제에 죽여달라느니 어쩌느니..."



뒤에서 들리는 그녀의 불평이 귀엽다는 듯 웃던 베티가 헤르나의 불안감을 조성시키는 말을 덧붙였다.



"짜증 내지 말고 부지런히 걸어. 계속 살아있을 거라는 말은 안 했다?"



흠칫 놀란 헤르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다시 유곽에 도착한 두 사람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그새 영업이라도 시작한 건지 남녀의 신음 소리와 땀냄새, 포피를 섞은 사향이 양쪽의 방문 너머로 흘러나왔다. 


미간을 찌푸리던 헤르나가 고개를 들자, 계단 위로 보이는 이층에는 살이 비쳐 보이는 커튼들과 나무로 된 파티션들이 별 의미 없는 가림막을 하고 있었다. 



'도박장이나 여기나 지랄 맞긴 마찬가지군.'



계속 베티를 따라 복도를 지나 지하로 내려가자 철문이 가로막고 있었고, 그 안에는 거꾸로 매달린 마틴이 있었다.



"마틴!!!"



마틴에게 다가가려는 헤르나를 저지시킨 베티가 웃으며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이제.. 협상을 시작해 볼까?"


"사람을 매달아 놓고 협상? 무슨 협상. 당장 조세핀이나 여기 오라고......!"



흥분해서 한참 화를 내던 헤르나가 여유만만한 베티의 얼굴을 보고 굳었다.



"아니.... 아니야...."


"........"


"설마.... 네가?"



베티는 차분하게 담배에 불을 붙여 피운 뒤, 연기를 내뿜었다.

헤르나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녀를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낯선 창녀가 준 정보라 충분히 의심할 수 있었어. 네가 믿음직한 건 아니었지만, 널 조세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건, 그녀는 이미 이십 년 전에 도박장과 유곽을 물려받았다고..."


"맞아."


"근데 넌 아무리 봐도..."


"네 또래로 보이지?"



이십 대의 아름다운 아가씨 모습으로 환하게 웃는 그녀의 눈에는 증오와 살기가 일렁였다.

어느 정도 진정된 헤르나를 본 조세핀은 협상을 하겠냐고 다시 물었다.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면, 똥개는 주인 품에 안전히 돌려보내주지."



짜증 난다는 얼굴로 조세핀을 보던 헤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 거야. 내가 필요한 건 외국의 무역선과 어느 왕족의 정보. 돈은 얼마든지 낼게."


"돈은 나도 여느 귀족 못지않게 있어."


"그럼 원하는 게 뭐야?"



시간은 흐르는데,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거꾸로 매달린 마틴을 보는 헤르나의 속이 끓었다.

조세핀은 그런 그녀를 말없이 보며 담배를 피웠다.

그녀의 침묵에 답답한 헤르나가 못 참고 소리를 질렀다.



"뭐냐니까?!"


"머리 나쁘니?"


"?"


"랑을 죽여달라고 했잖아."



헤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말이 없어졌고, 그녀를 보던 조세핀은 마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밧줄을 잘라 그를 바닥에 떨어뜨린 뒤, 다른 의자를 헤르나 쪽으로 밀어 찼다.



"앉아. 집중이 안 되는 것 같으니까."



조세핀은 마틴이 걱정되어 다가가는 헤르나에게 죽지 않으니 걱정말고 다시 앉으라 말한 뒤, 그의 팔을 들어 상처를 보여주었다.



"........"



조세핀이 들고 왔던 단도에 묻은 피는 마틴의 팔을 얕게 베고 묻혀온 것이었다.

안심이 된 듯 의자에 앉은 헤르나는 더 이상 너에게 놀아나지 않겠다며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그녀는 헤르나의 거절을 못들은 척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원래 이 지역의 정보책은 살인 길드와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던 '니콜라스 랑' 이라는 남자였어. 난 그 사람의 양딸인 조세핀 랑이야. 베티는 날 낳아준 엄마 이름이고."



뻔뻔하게 이야기를 시작한 조세핀을 보던 헤르나가 어이가 없는 듯 답했다.



"...결국 너를 죽여달라는 얘기는 아닐 테고. 니콜라스 얘기야? 양아버지라며. 오랜 세월 같이 살아온 네가 누구보다 한 패일 텐데. 무슨 소리하는 거야? 게다가 이십년 전이라면 그 사람도 늙어서 물려준 건 아닐테고, 죽었거나..."


"그는 아직 살아있어. 나는 죽일 수 없지만."


"그러니까 키워준 사람 뒤통수에 말뚝은 왜 꽂는데?"


".....보통 등에 칼을 꽂는다고 하지 않아?"



남다른 헤르나의 어휘에 당황하던 조세핀은 웃으며 자신의 치마를 걷어 다리를 보여주었다.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핏줄이 온통 검게 변한 그녀의 다리는, 마치 악마의 나무뿌리 같은 모습이었다.



"난 그 사람의 똥개야. 자식이 아니라고."



조세핀은 오래전 니콜라스가 마녀였던 자신의 어머니인 베티를 마음에 품고 친아버지를 죽였다고 말했다.




........


니콜라스는 임신한 베티의 남편을 몰래 죽이고, 그녀를 강제로 자신의 여자로 삼았다.

하지만 베티가 끊임없이 도망을 시도하며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그녀의 출산한 이후 조세핀과 떨어뜨려놓고 새로 인수한 유곽에 개처럼 묶어두었다.


사슬을 채워 다른 창녀들처럼 유곽에서 손님을 받게 한 뒤, 약과 스트레스로 정신을 잃은 그녀가 더 이상의 도망은 치기 어렵다 생각될 때쯤, 다시 데려와 집에 두었다.

그러나 미쳐가는 베티가 아이를 제대로 돌보기는 어려웠고, 조세핀은 유곽의 창녀들과 니콜라스의 부하들이 양육하게 되었다.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베티가 아이를 되찾으려 했지만, 오히려 니콜라스는 조세핀을 인질 삼아 그녀를 더 마음대로 휘두르려 했다.

베티의 마력을 이용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던 니콜라스는, 결국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 그녀의 저주를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사랑하는 모든 것들에게 증오받는 것이었다.



'수십 번 실패한 너의 암살 대신... 네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고통을 안겨줄게.'



그것이 베티의 마지막 말이었다.

충격받은 니콜라스는 죽은 그녀를 매장하지도 않고 숲에 버려두었고, 베티는 짐승들에게 시신이 먹히며 마지막까지 비참한 끝을 맺었다.



처음에는 애써 외면했던 저주. 

가장 믿었던 부하의 배신으로 그 저주는 시작되었다. 


이후 애인이었던 유곽의 창녀가 그를 피해 다른 남자와 도피를 하려고 니콜라스를 독살하려 했으며, 나름 친딸처럼 아끼던 조세핀은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둘씩 그가 마음을 주었던 모든 것들이 변화했다.

혼란보다 두려움이 커져갔던 그는, 저주를 피하기 위해 찾았던 다른 마녀로부터 '마녀가 스스로 제물이 되어 걸었던 마법은 풀리지 않는다' 는 답을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일단 마음을 주는 사람이 없어야겠지요. 그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아무도 믿지 마세요, 아무도 사랑하지 말고."



하는 수 없이 돌아서던 니콜라스는 조세핀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녀에게 자신의 딸까지 자신을 증오하게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말했다.



"딸이라..... 그렇다면 그 아이도 마녀일 가능성이 크겠군요."


"?!"



한 번도 조세핀이 마녀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한 니콜라스는 놀랐다.

아닐 거라고 강하게 부정할 수도 없던 그의 입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마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법이 있을 것 같다 얘기했다.



"아이가 아직 어리니, 종속의 계약을 맺으면 됩니다."


"그게 뭐지?"


"아이를 당신의 명령에 거절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게 되지는 않습니다만... 당신을 죽이거나 배신하지는 못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니콜라스는 마녀를 데려다 어린 조세핀이 자신과 종속의 계약을 맺도록 했다.


자신을 죽이지 못하도록.

자신을 배신하지 못하도록.


성장함에 따라 조세핀은 니콜라스가 자신의 부모에게 한 모든 짓을 알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무슨 짓을 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를 증오하면서도,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늙고 힘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해 젊음을 유지하고 싶어 하던 니콜라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흑마술을 시도하느라, 자신을 실험체로 쓰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




"그래서 네가..."



헤르나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젊어 보이는 조세핀의 모습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모습은, 명령에 복종한 결과지."



조세핀은 더 이상 늙지 않는 모습에 기뻐하는 니콜라스에게 겉만 변하지 않을 뿐, 몸 안은 똑같이 노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숨기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겉은 변하지 않았으니 제대로 이해는 못해도, 몸이 다르다는 건 느낄 거야. 니콜라스는 단순히 몸에 병이 들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나한테 사업장을 물려준 이유도, 편하게 뒤에서 쉬면서 몸보신이나 하려는 거거든."



니콜라스가 어떻게든 병을 치료하려 들지 않겠냐는 헤르나의 말에 조세핀은 생긋 웃었다.



"의사들은 와봐야 별 소용이 없어. 젊을 때 하고 몸이 다르다고 해도 진짜로 병이 든 게 아니니까."


"하긴..."


"나와 니콜라스 사이에 계약을 맺게 한 마녀는 죽여버렸어.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지 않도록. 다른 마녀들은 차별을 이유로 이 지역에서 모조리 쫓아버렸고."



조세핀은 종속 계약 마법은 계약자가 죽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것임을 이야기하며, 자신은 계약 때문에 그를 죽일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누군가 그 사람을 죽여주기를 오랜 시간 간절히 바라왔다고...


헤르나는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마음이 들었는데, 조세핀은 기쁜 얼굴로 말했다.



"성공할만한 사람을... 드디어 만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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