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를 마친 조세핀은 다시 진지하게 부탁했다.
"그를 죽여줘."
조금도 변함없는 조세핀의 태도에 한숨을 내쉬던 헤르나는, 그녀가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줄 수 있는지부터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최근 이 지역에서 낯선 사람이 목격됐다는 정보를 들었어."
"항구야 늘 낯선 사람이 오가지."
"...말고, 마을에서 말이야. 혹시 요 몇 달 사이 누군가 빈 저택을 매입한 적은 없어?"
곰곰이 생각하던 조세핀은 최근 길드에서 토지를 매입한 적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길드? 용병? 제르만 사람이야?"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헤르나는 그들이 해적이 아닌 것에 아쉬워했다.
*길드에서 토지를 매입해 자기들끼리 집을 짓고 살아가는 일은 흔했기 때문.
헤르나는 안주머니에서 토마스 몰래 빼돌린 바이올렛의 초상화를 보여주며, 혹시 본 적이 있는지 물었으나 조세핀은 고개를 저었다.
바이올렛을 정말 처음 보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또다시 실망한 헤르나의 한숨이 깊었다.
조세핀은 그녀에게서 초상화를 받아 자세히 살펴보며 자신의 의문점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 여자가 왕족이야?"
"응."
"제르만 사람은 아닌가 봐? 지금 제르만의 여성 왕족이라고는... 왕비랑 공주 둘 뿐이잖아."
"브리텐드 사람이야."
"브리텐드 말을 쓰는 사람은 없었는데..."
브리텐드 배를 공격한 해적을 찾는 것은 실패에 가까웠던 터라, 누명을 쓸 누군가라도 찾아야 하나 고민하던 헤르나에게 조세핀은 사건의 내역을 자세하게 들려줄 것을 요청했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조세핀 역시 그저 사고가 아닌가, 싶은 얼굴로 입을 삐죽거리다 헤르나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사고가 아니라, 왕녀가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 상황에서 가장 크게 이득을 얻은 사람은 그녀뿐이야. 게다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더 큰 일을 도모할 수도 있고."
"그렇군."
헤르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용병 길드가 매입한 저택과 토지에 대해 자세히 캐물었으나, 조세핀에게서 나오는 대답은 남은 한 톨의 미련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답답함에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 보이는 천장 근처의 작은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보이는 저곳에서 새어 나오는 빛은 이 어두운 지하실의 작은 희망일까.
아니면 저 빛 가운데로 다시는 나갈 수 없음을 말해주는 절망일까.
헤르나가 이스터스 항구에 오는 동안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를 놓고 상상했던 바이올렛 왕녀의 행보는, 어느 결말이든 그녀의 죽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는 확신만 줄 뿐이었다.
'아버지의 원수라고 의심하는 인간이 눈앞에 뻔히 있는 상황. 그 원수가 자신까지 타국에 팔아넘기려는데...'
'자살은 말도 안 되고, 사고라고 해도 어떻게든 살아남았을 거야. 신분이든 뭐든 모든 걸 걸어서라도.'
바이올렛을 생각하며 미간이 찌푸려진 헤르나를 보던 조세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왕녀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고모와, 사랑했으나 외면당한 남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일을 꾸몄다?"
"아마도. 뭐 물론 리온, 아니 우리 왕은 그 복수 안에서 일부에 불과하겠지만."
헤르나의 말에 수긍하는 듯, 조세핀은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다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대로 죽은 채 나타나지 않으면 브리텐드 여왕은 의혹과 분열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다른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쉽게 왕위에서 내려오진 않을 거야. 우리 국왕 역시 피할 길이 아주 없진 않을 테고. 잠깐 두 사람을 힘들게 만들려는 속셈으로, 자신이 죽은 걸로 위장하고 왕녀 신분도 버리고 살아가기엔 그녀에게 손해가 너무 큰데."
"맞아. 그러니까 분명 나타날 거야. 이사벨이 리온과 손잡고 자신을 살해하려 했다는 스토리를 들고서."
"...살아있다면 말이지."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짚고 넘어가는 조세핀의 말에 헤르나의 목소리는 한풀 기가 꺾였다.
".......그게 내 유일한 희망이야."
바이올렛은 똑똑한 여자다.
그녀가 살아있다면, 분명 나타나서 이 불리한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리온에게 자신의 편이 되어줄 것을 요구하겠지.
국익과 연정으로 얽혀있던 이사벨과 리온의 동맹을 깨고, 자신이 리온의 동맹이 되어 브리텐드 왕실을 분열시키려고 할텐데.
만약 리온이 자신의 동맹이 되지 않더라도, 더 이상 그가 이사벨과 손을 잡는 것은 막을 거야.
세력이 없는 왕녀 혼자서 이 일을 꾸밀 수는 없을 테고... 지금 그녀와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찾아야 해.
헤르나는 계속해서 조세핀의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브리텐드 여왕이 자국 내에서 친오빠의 암살 의혹과 조카의 사고를 사주했다는 비난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명백한 범인이 있어야 돼. 되도록이면 브리텐드의 사람이 아닌, 타국의 사람으로. 하지만 우리 쪽은 해적이 범인이어도 책임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어. 사신도 아닌 왕족이 물건을 싣고 오다가 제르만 해역에서 사고가 나서 행방불명 됐으니까."
"그러니 너는 한시라도 빠르게 이 왕족을 찾아야겠구나. 그녀 스스로 준비되어 나타나기 전에, 다른 누군가 그녀를 찾아내기 전에."
내용을 확실하게 이해한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헤르나는, 돌연 조세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달라진 그녀의 눈빛과 미소를 본 헤르나가 뭔가 아는 것이 더 있는 듯한 조세핀을 추궁했지만, 그녀는 협상을 할 것인지에 대해 먼저 답을 요구했다.
'.....마흔이 넘은 마녀라더니. 능구렁이가 따로 없군.'
둘 중 누구 하나에게 특별히 이로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헤르나는 자신 쪽이 더 불리하다며 거절했다.
"너는 왕족이 이미 죽고 없다고 하면 그만인데, 나는 목숨을 걸고 랑을 죽여야 되잖아?"
"네가 실패하면, 나도 죽을지 몰라."
"흥. 내가 니콜라스라면, 너처럼 좋은 물고기는 놓치지 않아."
그러니 나만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거라며 불평하던 헤르나의 말에 조세핀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멍하니 말이 없던 그녀는 베티의 유품이었던 반지를 쳐다보다 결심이 선 듯 헤르나에게 말했다.
"좋아. 계약을 하지."
"종이 한 장 쓴다고 뭐가 달라지냐?"
그런 것도 몰라? 라며 핀잔을 주던 조세핀은 헤르나 앞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단호하게 말했다.
"마녀의 계약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거야."
"?!"
"네가 랑을 죽여준다면, 나는 그 왕녀를 찾아줄게. 이 근방에 내 귀가 닿지 않는 곳은 없어. 네 말대로 해적들이 빼돌렸든, 다른 3자가 개입했든, 죽었다면 바다에 가라앉은 뼈다귀를 건져서라도 네 앞에 그녀를 데려다 주지. 왕녀가 살아있다면 잘된 일이고, 아니더라도 나머지 이야기는 네가 만들 수 있게 도와줄게. 제르만에 유리한대로."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쉽지 않은 선택지도 가능하게 해주겠다는 이야기에 의심이 든 헤르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조세핀을 쳐다보았다.
"...방법이 있어?"
"장물아비를 통해서 브리텐드의 고급 옷과 물품을 구해주지. 그 왕녀와 체격 등 여러 가지가 비슷한 시체 하나를 찾으면 되잖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면, 증명할 길은 가진 소품들이 전부일테니까."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 라...
소름이 끼치면서도 그럴 듯한 이야기에 헤르나도 점점 그녀의 말에 귀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려면 누군가 범인이 되어야 할 텐데...... 설마...?"
"그러니까, 네가 랑을 잡아야지."
조세핀은 어느 때보다 들떠 보이는 얼굴이었다.
오랜 숙원을 눈앞에서 이루기 직전, 만족함과 기대에 들떠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은, 묘하게 소름 끼친다는 생각과 반대로 믿음직해 보이기도 했다.
<협상>
시간이 더 지나고, 약에 취해 기절해 있던 마틴이 깨어나자 헤르나는 그를 부축해 유곽을 떠났다.
좀 더 쉬었다 가라는 조세핀의 요청을 거절하고 빠르게 자리를 옮긴 탓인지, 남아있는 약 기운에 여전히 비틀거리던 마틴은 헤르나에게 사과를 건넸다.
"...죄송해요.. 그... 그 여자를 안전하게 먼저 배에 데려다 놓고, 카퍼 백작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는데..."
"됐어. 네 덕분에 둘이 얘기할 기회가 생겼던 거니까."
항구에 다다르고 자신의 선박이 보이자, 헤르나는 서로를 향한 칼이 되었던 토마스가 떠올랐다.
우리 쪽에서만 니콜라스 랑을 치는 건, 위험부담이 큰 일이야.
수없이 암살을 해왔던 사람이라면 이런 일쯤은 이골이 났을 테니까.
...이번에는 네 도움 좀 받아볼까.
어떻게든 먼저 범인을 찾아 이사벨과 토마스의 뒤통수를 치려던 헤르나는, 마음을 바꿔 토마스와 공조하기로 결심하며 또 다른 협상 테이블을 찾았다.
.........
헤르나의 이야기를 들은 토마스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함께 니콜라스 랑이라는 남자를 죽이러 가자는 거야?"
"맞아."
"그 남자를 죽이면, 이스터스의 눈*을 통해 왕녀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눈 - 그 지역의 소식을 전부 꿰고 있는 사람을 뜻하는 말.
"그렇지. 일이 잘못돼도, 그 사람이 범인이 될 테니까 우리는 안전해."
이사벨 때문인지, 자신을 믿지 못해서인지 계속 망설이는 모습을 본 헤르나가 그의 안주머니에서 마검을 꺼내어 토마스의 손에 쥐어주었다.
"너나 나나, 죽고 싶지 않잖아? 이런 데서, 이런 일로 죽으려고 지금까지 악착같이 살아온 거 아니잖아?"
"........."
"넌 어땠을지 몰라도, 난 너한테서 나를 봤어. 살아남으려고,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 치는 거 말이야. 넌 내가 귀족으로 태어났으니 진흙탕 한 번 안 밟아봤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나 역시 너 못지않게 진창이며 피웅덩이에서 굴러봤어. 드레스 입고 우아하게 찻잔 들다 다른 집안에 팔려가는 그런 귀족 여성이 아니라, 가문에서 일을 맡길 수 있는 한 사람으로서 제대로 인정받으려고 말이야."
천지 차이라 생각했던 두 사람이 걸어온 길.
뒷골목에서 더러운 일을 하며 자라왔던 자신에게서 본인의 모습을 보았다던 헤르나의 말이, 토마스의 가슴 한편에 와닿았다.
"이사벨에게 네가 가진 감정이 충성심이든, 고마움이든 난 상관 안 해. 네가 남자로서 그 여자를 좋아해서 사리 판단도 못할 정도로 멍청하게 빠져 있는 게 아니라면. 근데 알잖아? 너나 나나 둘 다 그들에겐 버려도 되는 패라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거. 우리 없어도, 브리텐드든 제르만이든 문제없이 굴러갈 거라는 거."
헤르나는 어쩌면 맹목적인 충성심이 아닐까 싶은 그의 마음을 흔들고 싶었다.
작은 균열이, 큰 파장을 불러올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꼬집었다.
"이사벨이 정말 너를 이용해서 나를 죽이라고 여기 보낸 거 같아? 물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녀는 이 일이 자기와 무관하다는 걸 밝혀내든가, 날 죽여서라도 범인을 만들어내든가, 이도 저도 못하면 대신 네가 범인이 돼서 죽으라고 보낸 거야. 너는 작위는 있어도 가문은 없으니까. 네가 죽어 없어진다고 해도 사건에 의문을 품고 자신에게 영향을 끼칠 카퍼 집안사람들 따위 없으니까."
이미 여왕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지만 인질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바람에 가정을 꾸리는 것도 포기했던 토마스의 판단은, 오히려 이사벨에게 여차하면 그를 버릴 수 있게 하는 한 수였던 것이다.
"백작이면, 소유하고 있는 영지와 가문의 사람만 해도 수백은 될 텐데. 너는 고작 저택 하나 소유하고 있잖아. 그것도 여왕의 심부름을 위해 왕궁에서 가까운 곳에.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 몇이야 너 죽는다고 상관있겠어? 네가 이사벨, 바이올렛, 둘 다에게 가진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면 그 둘을 신경 쓰는 건 여기서 끝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 이 사건의 배후를 밝히는 거야. 서로를 죽이지 않아도 되는 방법으로."
헤르나는 자신의 안주머니에서도 마검을 꺼내어 토마스의 손에 들린 마검과 부딪히며 눈빛과 자세를 바꿔 싸울 준비를 취했다.
"끝내 네가 날 못 믿고, 나와 손을 잡고 싶지 않다면 여기서 한 번 싸워보든가.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어차피 우리는 목숨을 걸고 서로를 죽이려고 들 거야. 그렇게 피 터지게 싸우다 둘 다 죽을 수도 있고. 그래봐야 리온이나 이사벨이나 크게 아쉬울 건 없겠지. 넌, 이 편이 더 마음에 드니?"
조용히 헤르나의 얼굴을 보던 토마스가 그녀의 칼을 쳐내며 싸울 뜻이 없음을 밝혔다.
버릴 패.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
몰랐던 건 아니지만, 굳이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부분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을까.
아니면 계속해서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헤르나의 모습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을까.
아니.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당연한 욕망이었고, 토마스도 역시 자신이 죽거나 헤르나가 죽는 결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아. 네가 제안한 방법이 더 마음에 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