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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온은 골치 아픈 손님이었던 토마스를 헤르나와 함께 보내버린 뒤,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물론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그녀를 보냈으니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스카드가 협력할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후에 보상해야 하는 문제가 남든, 싸워야 하는 문제가 남든, 뮐러 후작이 걸려있는 이상 프로이센에서 가만있을 리 없지.'
보상은 엄연히 왕실의 문제인데, 프로이센 가문이 재력이 많다는 이유로, 헤르나를 인질 삼아 스카드에게 협력을 요구하려는 리온은 치밀하고도 뻔뻔했다.
그리고 언제나 거절할 수 없는 수를 떠넘기는 리온에게 익숙한 스카드는, 이미 그의 속내를 알아차렸고, 남은 문제에 상관없이 그저 헤르나가 무사귀환 하기만을 바랐다.
"이제 그만하지?"
벌써 스무 판을 넘게 둔 체스에 질린 데인이 작게 불평을 쏟아냈다.
"날마다 찾아와서 사람을 체스판에 앉혀두다니. 너도 처리할 공무들이 많이 있을 텐데."
"....어차피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해도 리온이 상관하지 않을 거야."
스카드는 태연하게 체스말을 옮기며 지금이야말로 열심히 농땡이를 피울 때라고 말했다.
"?"
"나중에 나한테 받아낼 걸 생각하면, 이 정도 게으름은 약소하다고 여길걸."
그런 것치고는 꽤 부지런하게 일하고 있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데인은 입밖에 내지 않았다.
헤르나가 떠난 이후, 스카드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토흐튼 저택에 찾아와, 자고 있는 데인을 깨우는 것을 시작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점심시간이 되면 칼같이 집으로 귀가해서 밤늦게까지 일에 매달려 있었다.
"헤르나는 네 여동생이 아니야."
"?"
갑자기 뜻 모를 이야기를 꺼낸 데인을 쳐다보던 스카드는 이내 멋쩍게 웃으면서 '그래, 맞아.' 하고 동의했다.
혼인을 통해 집안끼리 연결된 사이로, 아주 어릴 때부터 교류가 있던 셋은 여러 전쟁에서도 동고동락한 사이였다.
평상시 몸이 약한 것을 이유로 주로 저택에 있던 데인은, 전장에서 그 누구보다 믿음직한 전우였으며, 뛰어난 지략가였다.
반면, 늘 건강하고 누구 못지않게 잘 싸우는 헤르나는, 전장에서 늘 스카드의 걱정거리 중 하나였다.
자신의 사람을 아끼는 마음에, 때때로 앞뒤 가리지 않고 무모한 일에도 덤벼드는 그녀의 불같은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헤르나는, 너무 여려서 염려되었던 여동생 엘레나와 달리, 너무 솔직해서 염려되는 사람이었다.
"살아남는 기술은, 그녀가 한 수 위니까."
스카드는 그제야 좀 안정을 찾은 듯, 의자에 몸을 기대어 창 밖을 바라보았다.
.........
"이제 스카드가 편히 자겠네."
헤르나의 귀환 소식을 들은 데인이 창을 열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달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눈에 가라앉을 때쯤, 그는 와인잔에 담긴 붉은 액체를 단숨에 들이켰다.
"......커억.."
불쾌함에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도 잠시, 데인의 몸은 이전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한층 안정된 그의 얼굴을 본 집사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데인의 손에 들린 와인잔을 거두어 방 밖으로 나갔다.
"아직... 죽을 수는 없지..."
데인은 고개를 돌려 왕궁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칸나를 떠올리면, 자신의 의무가 생각나기도, 포기하고 싶던 생의 가느다란 끈이 보이기도 했다.
그의 책상에 놓인, 블랙오닉스로 검은 매가 조각되어 있는 반지를 만지작 거리던 손은, 반지 안쪽에 새겨진 이름을 쓰다듬다가 서서히 멈췄다.
-에밋 폰 토흐튼
<너, 내 편이 돼라>
헤르나가 귀환한 다음 날.
여독이 쌓여 일찍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바이올렛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남의 집에서도 활개를 치고 다니는 손님의 소식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 스카드는 헤르나의 상태를 확인한 후 곧바로 계단을 내려와 주방으로 향했다.
“여기서도 아주 바쁘네.”
팔짱을 낀 채 고고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스카드에게 다가간 그녀는 자신이 이제껏 살아남은 비결에 대해 말해주었다.
“부지런한 거야.”
“부지런하다라···”
뭐, 그것도 비법이라면 비법이겠지. 하던 스카드는 그녀의 다음 말에 표정이 바뀌었다.
“독이 든 음식을 피하려면, 내 식탁에 올라오는 걸 직접 확인해야 하거든."
"!"
"식재료에 관심이 있는 척, 과일을 두 어 조각 집어먹으러 온 것처럼 위장하고 주방에 내려가 그들의 수다에 동참하다 보면, 내 음식도 안전할 뿐 아니라 하인들이 말하는 여러 가지 소문과 분위기도 알 수 있고.“
그 말이 일상인 듯, 준비되는 음식 이것저것을 확인하려 드는 바이올렛의 손목을 잡아챈 스카드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당신, 왕녀라며.. 그렇게까지 해야 되는 상황이었어?”
놀라움과 걱정이 섞인 그의 눈빛을 보자, 이때까지 장난스럽던 바이올렛의 표정도 싸늘히 굳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고모가 의심스럽지만, 그래도 명색이 왕녀니까 잘 먹고 잘 살아온 줄 알았어?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몰랐다면 나 역시 평온하게 살았겠지. 아니, 평온하게 있다가 뒈졌을지는 모르겠지만.”
“·········”
바이올렛은 아버지인 아론이 죽던 때가 떠올라 표정이 굳었다.
공기마저 싸늘한 정적이 흐른 뒤에야 그녀는 마음이 진정된 듯, 크게 숨을 내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독살이었거든. 내 아버지.“
“?!”
“증거는 사라지고, 증인은 어린 나 하나. 그나마 내가 진실을 알고 있다는 걸 이사벨이 모르니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야. 불안요소 주제에.”
아버지를 떠올리며, 모든 게 텅 비어버린 허망함을 읽어 들이는 그녀의 눈동자를 본 스카드가 바이올렛의 앞에 섰다.
부당한 죽음에 대한 분노, 타오르는 복수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내색하지 않고 삼키며 몸을 사려야 하는 상황까지.
자신과 너무도 닮아 보이는 바이올렛의 모습에, 이제껏 그녀를 빨리 리온 앞으로 데려가 사건을 종결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이 집안에서 당신의 식탁에 올라오는 모든 건, 지금부터 앞으로도 평생 독 한 방울도 없을 거라고 약속할게."
"당신이 이렇게 강박처럼 불안해할 일은 없을 테니까, 나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
이끌리듯 스카드를 따라 집무실로 가서 함께 아침을 먹고, 브리텐드 특산품의 홍차도 마시고 나니 바이올렛의 감정도 한층 누그러졌다.
그녀는 다시 여유롭고 도도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할 얘기가 뭔데.”
"당신이 이사벨과 적이라는 건 잘 알겠어. 근데 리온은 이사벨과 동맹에 가깝거든."
"그래, 아웅다웅해도 적은 아니지. 근데?"
"당신과 리온은 정확하게 어떤 관계야?"
상황과 안 맞는 것 같은 질문을 진지하게 하는 스카드를 보며, 바이올렛의 웃음이 터졌다.
그러는 당신과 나는 무슨 관계인데?
나야말로 여기에 인질로 끌려온 거고.
당신과 나는 이사벨과 리온보다 더 사이가 안 좋을 텐데.
.....답을 할 이유는 없어.
얼떨결에 스카드에게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긴 했지만, 그걸로 발목 잡힐 생각은 없던 바이올렛은 그의 질문을 쳐냈다.
"...대답해 줄 거라고 기대하는 건 아니지?"
"대답할 수밖에 없을 거야."
"왜?"
"내가 당신에게 필요한 걸 제공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패가 될 테니까."
자신만만한 그의 태도에 바이올렛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에게는 스카드가 좋은 가문, 높은 위치, 부모를 일찍 여읜 미남이라는 것 외에 딱히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크게 좋은 처지로 보이진 않았다.
그의 자신감 역시, 한 나라의 공작쯤 된다고 해서 자신이 누군가를 구원해 줄 신이라도 된 줄 착각하는 오만함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자신의 계획을 몽땅 어그러뜨린 사람과 한 패이면서, 이제와 손을 내미는 것도 어딘가 못마땅했다.
"난 너보다 더 좋은 패를 찾았어."
"위라티 국왕 토니는 당신을 온전히 돕기 어려워. 세르니 공작은 언제나 그보다 한 수 위였으니까."
"...그걸 어떻게?!?!"
헤르나와 토마스도 미처 알지 못했던 정보.
놀라서 눈이 커진 바이올렛을 보며 스카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씨익 웃었다.
"당신이 브리텐드 용병을 데리고 일을 벌이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었을 텐데도 선택하지 않았던 건, 토마스의 눈을 피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거야. 그 역시 평범한 일을 해왔던 사람으로는 안 보이니까. 그런 일을 하는 웬만한 사람들은 다 꿰고 있겠지."
그 자식, 여기저기 암살자라고 소문이라도 내고 다녔나.
남의 나라 사람까지 토마스 백작이 그런 사람인 줄은 어떻게 아는 거야.
"그렇다고 제르만의 용병을 사자니, 당신이 직접 확인할 수 없어 불안했겠지. 자기 입지도 불안한 왕녀가 남의 나라의 용병단을 소문 안 나게 고용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남의 나라 용병단이라는 말에 바이올렛이 스카드에게 고갯짓 하며 비아냥댔다.
"브리텐드에서 위라티는 더 먼 곳이라는 건, 알고 있어?"
그런 내가 어떻게 토니 국왕과 손을 잡았겠어.
"누가 먼저 손을 내밀었는지 일의 순서는 알 수 없지만, 토니가 당신의 망명과 후일을 도모하는 걸 돕겠다고 했을 테고, 당신은 세르니 공작을 몰락시키는 걸 돕겠다고 했을 거야."
"증거는 있어?"
"오래된 밀약이겠지? 당신 말대로 먼 곳에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이, 서로 내부의 감시까지 피해 가면서 이런 일을 도모하기는 쉽지 않았을 테니까."
스카드가 왕비로 추대하고자 했던 모니카.
리온과 칸나의 예상치 못한 결혼이 진행되면서, 그간 공주에게 미리 선물들을 보내며 쌓아두었던 친분은 쓸모없게 되었지만, 그간 둘 사이에 주고받았던 안부 편지는 그에게 또 다른 쓸모가 되어주었다.
그중 하나는, 몇 년 전부터 그녀의 어머니가 유폐되어 있는 성의 한쪽을 수리하면서 누군가를 맞을 준비를 했다는 것.
편지를 읽은 스카드는, 처음에 국왕이 모니카를 그리로 보내려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늦기 전에 서둘러 그녀를 제르만의 왕비로 데려오려 하던 중, 공주가 브리텐드 귀족과의 혼담이 오고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브리텐드?'
위라티의 하나뿐인 공주.
토니는 자신의 특별한 딸을 제르만의 왕비로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그것이 제르만에 대한 불신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때문에 스카드는 자신이 직접 위라티로 가서 설득하려 했었다.
설령 모니카를 향해 누군가 더 좋은 조건을 내건다고 해도,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할 자신이 있었던 그였다.
'세르니 공작도 국왕의 눈치를 보느라 성 안에 두었던 딸이다. 왕권과도 상관없는 공주라, 손자들의 이복남매라 해도 그가 경계하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어.'
'간신히 곁에 두고 있는 딸을 굳이 더 멀리 시집보내려 한다고?'
'자국 내에서도 얼마든지 좋은 혼처가 있을 텐데...'
결혼이 없던 일이 되며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던 이 의문이, 이후 사건을 되짚어보던 스카드에게 이번 사건을 위한 발판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최소 몇 년 전부터 토니와 손잡은 브리텐드의 귀족이 있다는 것.
모니카의 안위를 보장받고, 그도 보상이나 인질로 삼을 수 있는 무언가가 생겼다는 것.
그 성에 두려는 무언가가 토니와 손잡은 인물과 연관 있다는 것.
"그게 왕녀, 당신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