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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하 Aug 17. 2024

30. 베갯머리 송사

"처음엔 그저 고모인 이사벨의 감시를 피해 편히 살고자 자신이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돈이 될만한 포피와 케비스를 훔쳤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아론 왕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확실히 알겠어. 당신은, 두려워서 살기 위해 도망갈 여자는 아니라는 거."



스카드의 이야기를 들은 바이올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만큼 머리도 좋은가 보군. 칭찬과 감탄을 섞어 말하던 그녀는, 헤르나를 만난 이후 망가져버린 계획 때문에 솟았던 화가 가라앉았다.

더 이상 대꾸 없이 스카드를 보던 바이올렛은 즐거운 식사였다는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의 불쌍한 과거와, 인질로 전락한 내 신세 모두, 나의 부족함과 운명 때문이라고 생각할게."

"너희를 원망하지 않도록 하지."



스카드는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아직 할 말이 남았다고 했으나, 그녀는 더 듣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다.



"당신은 똑똑해. 능력도 있는 것 같고. 하지만 내가 선택할 패는 아니야."



그는 싸늘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바이올렛의 이런 오기와 자존심이 싫지 않았다.

위태로운 입장에서도 복수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불안한 입지 속에서도 살아남고자 애를 썼고, 힘을 길러서 후일을 도모하려는 모습까지, 전부 마음에 들었다.



'당신은 이사벨을 쳐내기 전까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야. 그렇지?'



스카드는 그녀가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리온 앞에 가서, 자신이 범인이라 자백 후 순순히 브리텐드로 갈 여자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든 본인으로부터 책임을 돌리고, 끝까지 도망쳐서 위라티로 향할 여자라는 것도.


그는 바이올렛과 마주 앉은 이 테이블에서 협상을 성공하고 싶었다.



"장담하지. 당신의 계획이 성공한대도, 세르니 공작에게 들켜서 죽거나, 브리텐드로 강제 송환될 거라는 걸."


"뭐야?!"



발끈해서 기분 나빠하는 바이올렛에게 스카드는 차분히 지적했다.



"그는 권력이 가장 중요한 자야. 힘없는 왕녀와 한 나라의 국왕 사이에서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는 너무나 명확하고."

"그가 당신을 죽이거나 인질로 삼고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수는 있어도, 당신을 돕지는 않을 거야. 절대로."



그녀는 오래전, 세르니 공작을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차갑고, 싸늘하고, 돈과 권력 앞에서만 미소 지었던.

자신의 딸을 왕비로 만들어 외손자에게 왕권을 물려줌으로서 자신의 가문을 왕권보다 더 우위에 올려놓고 싶어 하는 사람.


스카드는 씁쓸함에 미간을 찌푸린 바이올렛을 다시 조심스레 자리에 앉도록 권한 뒤, 이번에는 이사벨 이야기를 해볼까. 라며 대화를 시작했다.



"당신이 정당한 후계자라는 건 다들 아는 얘기야. 이사벨은 본인이 죽으면 당신이 여왕이 될 수밖에 없음에도 혼인과 후계 문제를 서둘러 해결하지 못했어."



그래.

나한테 왕권을 물려주느니 나라가 망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말이지.



"당신의 아버지인 아론 공작의 죽음 이후, 분열된 귀족들을 통솔하기에 본인의 혼인만큼 좋은 먹이가 없었기 때문이지. 어느 가문 하나와 손을 잡고 결혼을 해버리면, 나머지와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모두에게 혼인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시간을 끌어 당신을 고립시킬 계획을 세운 거야. 그런 이사벨을 눈치챈 당신은 그녀의 뒤통수를 칠 계획을 세웠던 거고."



바이올렛은 상황을 파악하고 속내를 읽어내는데 능숙한 스카드에게 이젠 익숙한 듯, 마음에 없는 박수를 쳤다.



".....정말 똑똑하네. 근데.. 이사벨과 내 관계를 알아낸 게 좋은 패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이건 당신을 이해하는 과정에 불과해. 당신을 이해해야 당신의 필요를 알 수 있고, 필요를 알아야 당신을 도울 수 있기 때문에 한 이야기일 뿐."



자신을 이해하겠다는 그의 말에, 바이올렛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내색하지 않고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래? 그럼 네가 나한테 줄 좋은 패는 뭐야?"


"당신의 평생 염원."



서로 다른 공간, 다른 시간 속에서 살아온 우리지만...

당신과 내가 같은 게 하나 있거든.


누군가를 향한 열망.

사랑보다 뜨겁고, 애정보다 간절하고, 욕망보다 강렬한 심판과 단죄.


바로 '복수' 야.



평생의 염원이라는 말과 동시에 보인 스카드의 미소는, 마치 이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절망을 바라보는 것도 희망을 고대하는 것도 아닌, 눈앞의 한 걸음을 기뻐하는 어린아이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버지의 원수, 이사벨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는 거지."


"........"


"당신이 지금 나와 손을 잡는다면, 나를 비롯해 나와 엮인 제르만의 모든 귀족들을 비롯해서, 우리와 교류를 맺고 있는 브리텐드 귀족들도 당신을 새 여왕으로 받아들일 거고, 그를 위해 적극적으로 도울 거야."



솔깃한 이야기,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바이올렛은 냉정하게 생각하고 돌아섰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는 이야기 같은 그의 말이 썩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과 말은 진실했지만, 현실은 진실을 무기 삼기에 훨씬 잔혹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네가 브리텐드에서 이만한 영향력을 끼치는 귀족이라면 손을 잡을 만 하지만, 여긴 제르만이야. 아무리 네가 날고 기어도 타국의 여왕을 교체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일 거 같아?"



꿈을 파는 상인 같다는 말을 덧붙이며 집무실 밖으로 나가려던 그녀를 붙잡은 건,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어려운 일이니까 손을 잡는 거야. 쉬운 건 당신이 알아서 해."


"........"



스카드는 바이올렛의 뒤로 다가와 열린 문을 닫으며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겉으론 태연한 척 하지만 마음은 심히 요동치고 있다는 걸, 그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흔들리는 건 당연해.

이건 당신이 듣고 싶었던 이야기니까.


설령 내가 파는 게 꿈이라 해도, 당신은 샀을 거야.

그렇지?



"우리가 바라는 건 오직..."



자신을 향해 돌아서는 바이올렛의 손에 스카드가 존경의 입맞춤을 건네며 덧붙이자, 그녀 역시 만족스러운 얼굴로 답을 건넸다.



"태양의 몰락이니까."




.......


아버지는 왕자였다.


서자였다고는 하지만.


할머니의 가문은 유서 깊은 귀족, 칼라이 백작 가였다.

결혼을 두 달 앞두고 약혼자를 잃은 할머니는, 이후 왕자이자 친구였던 에드워드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하지만 일 년 뒤 왕실은 데반스 공작가와 혼약을 맺었고, 집안의 반대로 두 사람은 함께 할 수 없었다.

에드워드 왕자와 크리스틴 영애의 결혼으로 정리될 것 같았던 관계는, 할머니의 임신이 드러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에드워드는 그녀가 출산할 때까지 왕실 어른들을 비롯해 수많은 귀족들과 싸워가며, 사생아라 인정받지 못했어야 할 아버지를 끝내 아들로 삼았다.

아마 할머니가 귀족이 아니었다면, 남편이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입성하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브리텐드의 유일한 왕자이자 후계자로 잘 살았다.

할머니도 유모 및 귀부인의 자격으로 아버지가 열두 살이 되기 전까지 성에서 함께 살았다.

아내와 첫사랑이 함께 공존하는 상황이었음에도, 성 안은 평화로웠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아버지에게는 열여덟 살 차이 나는 여동생, 이사벨이 태어났다.


네 명의 아이를 유산하고 우울증으로 정신병이 왔다던 크리스틴은, 마침내 다섯 번째 임신을 통해 아이를 얻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아이였다.


늦둥이 딸을 둔 국왕 에드워드도 그녀를 각별히 사랑했으며, 딸뻘 되는 여동생을 둔 아버지도 그녀를 참 많이 사랑했다.

고작 네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고모와 나는, 마치 친구처럼, 공주 자매처럼 지냈다.


여전히 성 안은 평화로웠으며,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던 문제는 없었다.

그녀가 열두 살이 되던 무렵, 갑작스러운 후계자 논의가 불거지기 전까진...


데반스 공작가의 사주로 시작된 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이미 결혼을 해 왕자비와 딸까지 있었던 아버지가, 딸과 같은 여동생을 대적할리가 없었다.


나 역시 시끄러워진 왕실의 상황과 상관없이 이사벨을 여전히 좋아했고, 잘 따랐다.


후계자 논의는, 장남이자 왕자인 아버지가 왕권을 물려받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여기엔 아버지의 외가가 칼라이 백작가라는 것과 함께, 크리프턴 공작가와 국왕 에드워드의 지지가 큰 영향을 미쳤다.


몇 년 뒤, 급격히 말 수가 적어진 이사벨과 어색하게 되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단순히 지나가는 사춘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그녀가 마음을 열어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나도 순진했다.

아니, 어리석었다.


해질 무렵 어둠이 거리에 퍼지 듯, 서서히 그녀의 눈동자에 잠식되어 가는 살의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




".....그럼 네가 나에게 바라는 건 뭔데?"



바이올렛은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아직은 아무런 힘이 없는 자신을, 어떻게든 붙잡아서 그가 꼭 이루고자 하는 염원을 듣고 싶어졌다.



"적법한 자에게 물려주는 왕권. 그리고 공식적인 인정."



적법한 자에게 물려주는 왕권...


그 권한은 아버지와 자신에게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잃었지만, 되찾아 올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게, 스카드는 그가 필요로 하는 패를 고백했다.



"백설공주는 차기 여왕이 될 거야. 그녀를 정식으로 인정하고, 그녀가 여왕이 될 시에 동맹이 될 공식 문서를 남겨줬으면 해."


".....어차피 리온에게 딸 하나뿐인데, 그런 게 필요해?"



딱히 필요 없을 것 같은 걸 요구하는 그를 보며 의아해하던 바이올렛은, 브리텐드도 제르만도 왕자 우선 승계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새 왕비가 있었지. 왕자를 낳으면 백설공주의 입지가 달라지겠구나? 공주를 낳는다고 해도, 친모의 세력이 현존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왕위가 달라지기도 하니까... 불안요소를 없애고 확실히 하고 싶은 거군?"


"맞아."



고민하던 바이올렛은 혼자 생각을 하고 싶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든 식사도 방 안으로 들이며 조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스카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다그침도 없었다.


필요한 협상이지만,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끼익



늦은 밤, 방문이 열리고 잠에서 깬 스카드가 어둠에 찌푸린 채 상대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의 방 안으로 들어온 바이올렛은 잠옷 차림으로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



그녀는 조용히 스카드의 침대로 다가와, 무슨 상황인지 생각하던 그의 위에 올라앉았다.



"....힘을 합치자고 했지, 몸을 합치자고는 안 했던 것 같은데."



달빛이 창 안으로 들어와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결과 흐트러진 옷차림을 비췄다.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고민한 흔적들이 귀엽다고 느낀 스카드의 미소가 터져 나왔다.


거부하지 않는 그를 확인하고 안심한 바이올렛은, 위험한 거래라도 하듯 속삭였다.



"널 온전히 믿을 수가 없어. 너도 날 온전히 믿는 건 아니잖아?"


"그래서?"


"네가 얼마만큼 나에게 열정을 쏟을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지금으로선 이것뿐이니까. 유대감을 쌓기에도 이만한 게 없고."



아...

그러니까 몸으로 먼저 친해지시겠다?



확실한 목적과 제안을 알게 된 스카드의 눈도 어느새 잠이 달아나 있었다.



"싫으면 관둬."



생각했던 것보다 반응이 미적지근하다고 느껴서일까? 바이올렛은 토라진 듯 돌아서서 침대를 빠져나가려 했다.



-털썩.



"?!?"



스카드는 그녀의 몸을 잡아 돌려 눕히고, 자신의 품에 갇힌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이올렛의 눈에서, 단순한 혈기나 변덕이 아닌 진심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지막이 말했다.



"리온과 무슨 사이든, 이제는 끝이야."


"..알아."



그녀는 좀전까지 긴장하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스카드는 그런 바이올렛에게 부드럽게 키스하며 가슴에 있는 끈을 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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