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스카드와 바이올렛은 아무런 말없이 식사를 했다.
가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긴 했으나, 눈이 마주치진 않았다.
"........."
반나절 이상을 따로 있더니 이제는 대화 없는 두 사람의 모습.
갑작스럽게 달라진 이 공기가 무섭고 불편할 법도 한데, 론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두 사람의 시중을 들었다.
식사를 마친 뒤, 리온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이야기에 흠칫 놀라던 바이올렛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올라갔다.
식사하는 사이에 스카드가 준비시킨 듯한 쪽빛의 드레스와 검은 오닉스로 세공된 목걸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웃음이 번졌다.
의상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서서, 이제 만나러 갈 다른 선택지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똑똑
그녀를 에스코트하러 온 스카드는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이었으며, 어딘가 짓궂어 보이기도 했다.
바이올렛이 '네가 고른 대로 입고 있으니 만족스러워?' 라며 떠보았지만, 그가 떠올리는 건 다른 쪽인 것 같았다.
"성으로 모시겠습니다. 왕녀님."
"?"
완전히 뒤바뀐 태도.
이전과는 달리 그는 무례하지도, 싸늘하지도 않았다.
사람이 바뀐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의 모습에, 그녀는 스카드의 전신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프로이센 공작."
"예, 왕녀님."
"당신이 나에게 이렇게 예의가 있었다고?"
바이올렛의 비꼬기에도, 그는 흐트러지지 않고 미소와 함께 능글거리며 답했다.
"제르만의 공작으로서 브리텐드의 왕녀님을 수행하는 중이니까요."
"오호라. 이제 좀 왕녀 취급하겠다? 그럼 그전에는?"
눈을 가늘게 뜨고 훑어보는 그녀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간 스카드가 속삭이며 답했다.
"내 전우를 피투성이로 데려온 거만한 인질."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낮고, 숨소리조차 차분하게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였지만, 이중적인 그의 태도를 본 바이올렛의 눈빛은 반짝거렸다.
"마음에 드네."
"?"
"내 편이 된다면, 더없이 든든하겠어."
서류상으로 정리되지 않은 두 사람의 계약.
그리고 다 끝마치지 못한 대화들.
아직 둘은 한 편이 아니었기에 서로에 대한 경계가 허물어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말은 스카드를 자신의 편으로 인정하는 말과도 같았다.
기대감에 눈빛이 달라진 그를 본 바이올렛은 도도하게 돌아서서 밖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로 향했다.
"........"
왕실로 향하는 길.
마차 안의 맞은편에 앉아, 얼굴을 뚫을 기세로 쳐다보는 스카드의 눈빛이 부담스러운 바이올렛이 참다못해 한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만 좀 해. 집요한 구석이 있구나? 프로이센 공작."
"기회를 놓치는 남자는 아니라서 말이죠."
그의 발언이 불만스러운 듯, 못내 아쉬운 무언가가 떠오르는 듯, 바이올렛은 뾰로통한 얼굴로 밖을 내다보았다.
.........
전날 밤.
와인은 없었지만 밤에 취한 까닭일까.
그에게 몸을 맡기겠다 마음먹은 까닭일까.
속내가 확 드러나듯, 가슴끈은 쉽게 풀어졌다.
긴장으로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바이올렛과 달리, 스카드는 능숙한 손길로 그녀를 어루만졌다.
바이올렛의 목덜미에 호흡이 섞인 키스로 몸의 감각을 깨우고, 풀린 잠옷 안으로 손을 넣어 조심스레 가슴을 쥐며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의 손끝 하나하나에 움찔거리는 몸, 그녀는 등이 오싹해졌다.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지만, 달뜬 육체는 정직하게 반응했고, 입에서는 작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똑똑
"?!"
이 시간에 누가?
의문으로 멈칫한 스카드와 달리, 바이올렛은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눈이 커졌다.
이 시간에 왕녀가 스스로 공작의 방에 찾아와 몸을 섞으려는 모습을 보인다면.
물론 누가 본다 해도 그는 입을 막을 수 있는 남자였지만, 그녀는 냉정한 판단보다 겁이 더 앞섰다.
스카드는 재빨리 이불을 덮어 바이올렛을 숨기고, 침대에서 일어나 문 너머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다.
대답을 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미약한 소리와 함께, 방문은 덜컥 열렸다.
'방의 주인이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들어오다니...'
이불속에서 눈만 빼꼼히 내밀고 지켜보던 바이올렛은, 서 있기도 버거워 보이는 헤르나가 비틀거리며 찾아온 것을 발견했다.
"헤르나!!!"
스카드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헤르나에게 달려가서 그녀를 부축했다.
헤르나는 눈도 못 뜬 채 입술을 떨며 작게 중얼거렸다.
열 때문에 오락가락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니 뭔가 알고 찾아온 것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녀를 공주님처럼 안아 들고서 방으로 향하는 스카드는, 바이올렛이 원했지만 가질 수 없던 백마 탄 기사님 같았다.
.........
"기회는 어제 이미 놓친 거 아닌가?"
흥, 하고 새초롬하게 고개 돌린 그녀의 옆얼굴을 따라 목선까지 시선이 내려오던 스카드는 웃으며 물었다.
"그걸 기회라고 한다면, 지금 마차에서도 가능한데. 가는 길을 즐겁게 해 줄까요?"
깜짝 놀란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고, 당황해 안으로 말린 입술 사이로, 못 말리겠다는 듯 실소가 터졌다.
한참 까르르 웃던 바이올렛은, 스카드를 빤히 쳐다보다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을 먼저 좋아할 걸 그랬어."
"......."
"둘 다 미친놈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더 잘생기고, 더 똑똑하고..."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녀는 태연하게 잘난 척하는 스카드를 흘겨보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마음이 움직였던 또 하나의 이유를 덧붙였다.
"적어도 당신에겐, 신의라는 게 있을 테니까."
바이올렛은 스카드의 멱살을 잡아끌어 가볍게 입을 맞췄다.
"리온에게 관심이 있었던 건 사실이야. 그는 능력 있고 잘생긴 국왕이니까. 더욱이 이사벨이 그를 좋아하는 걸 알고 나니 뺏고 싶다는 마음도 컸고."
"하지만 이젠 아니야. 그는 내 복수를 이뤄줄 만큼 고마운 상대도, 혹은 멈춰줄 만큼 대단한 상대도 아니니까."
코앞에 있는 스카드의 얼굴을 보며 해맑게 웃는 바이올렛의 얼굴은, 그녀의 과거에나 볼 수 있었던 미소 같았다.
"당신과 계약할게. 대신 그 기회, 다음엔 절대 놓치지 마."
스카드는 손을 떼고 몸을 뒤로 젖혀 고쳐 앉으려는 바이올렛의 팔을 붙잡고,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 안으며 키스했다.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둘러 자신에게로 이끌어, 자연스레 무릎에 앉힌 뒤 목덜미로 내려가던 입술은, 별안간 움직임이 멈췄다.
웃음이 없이 가만히 있는 그를 보며 바이올렛이 물었다.
"왜 멈춰? 여기서 끝까지 할 것 같더니."
"당신이 소중해졌거든요."
"뭐?"
"필요에 의해 대충 쓰다 버릴 패가 아니라, 정말 좋은 인연이었으면 해서."
뭐라고? 깜짝 놀란 그녀의 입이 떡 벌어졌다.
여자로서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샀다고 생각한 자신이 부끄러워진 바이올렛이 노려보며 물었다.
"...그럼 어제 내가 당신 품에 안길 뻔했던 건, 단지 계약에 유리했기 때문인 거야?"
"맞아요."
"무서운 남자."
바이올렛은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데,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사실 경험이 없던 그녀에게 지난밤은, 엄청난 도박이었으며 오기로 가득한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라면, 내 처음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하지만 스카드 역시 그녀의 경험 없음을 일찌감치 눈치챘고, 욕망대로 나아가기엔 망설임이 있었다.
처음은 사랑은 아니어도, 마음에 드는 사람과 통했으면 하는 바람에.
결국 서로를 지키고, 계약은 성공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우린 이제 정말 동맹이 된 거구나."
바이올렛은 따뜻한 미소로 그를 바라보며, 그의 이마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었다.
"네."
맞은편에 앉은 그녀는, 더 이상 날카롭고 신경질적이지 않았다.
이기적이고 오만해 보이지도 않았다.
아론 왕자가 살아있었다면, 그녀가 왕이 된 아론의 공주였다면, 그저 평온한 일상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거라 예상되는 온화한 얼굴이었다.
회의가 열리기 전 리온의 집무실로 향한 두 사람은, 문 앞에서 찰나의 시선을 마주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멀쩡히 걸어 들어오는 바이올렛을 본 리온은 깜짝 놀라 뛰쳐나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바이올렛 왕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큰소리로 다그치는 그를 보며 바이올렛이 불만을 드러냈다.
"걱정하는 건가요, 책망하는 건가요?"
"그야 물론..."
걱정했다는 그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잘 아는 바이올렛은, 그의 말을 자르고 스카드와 미리 맞춰둔 시나리오를 꺼내 들었다.
"배 안에 첩자가 있었습니다."
"첩자?"
"제이크라는 자가 포피와 케비스를 빼돌리기 위해, 배 안에 있는 물통에 약을 타서 사람들을 아프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모두를 죽인 뒤, 물건과 저를 빼돌려 이스터스 항구에 내렸습니다."
"그는 그 지역의 유명한 용병 길드를 운영하는 사람에게 물건을 팔고, 저 역시도 유곽에 넘길 생각이었어요."
"다행히 당신이 보낸 후작이 찾아와 저를 찾고 구해주었고요."
물통에 약을 타서 사람들을 아프게 만든 것도, 기사 중 한 사람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을 죽인 것도, 물건을 빼돌려 이스터스 항구에 내린 것도 모두 그녀였지만, 리온은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 것.
여기부터 더 이상 제르만의 책임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감히 빼돌린 물건과 왕녀를 사서 값을 치른 자가 있다고 해도, 그 일을 저지른 건 브리텐드 사람이니까.
비싼 물건은 둘째치고 한 나라의 왕녀를 구해냈으니, 오히려 이사벨에게 청구할 것이 생긴 리온은 기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뮐러 후작이 엄청 수고가 많았겠군."
"마검에 찔렸다고 하니, 치료 마법에 능한 마녀들을 몇 보내줄게. 훨씬 회복이 빠를 거야."
집에 다녀간 리마가 헤르나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며, 치료마법을 쓸 줄 아는 마녀가 오면 좋을 거라는 이야기가 생각난 스카드는 감사 인사를 전했다.
"회복되면, 모두의 앞에서 그녀의 공을 크게 치하하지."
바이올렛은 성 안에 머물 곳을 마련해 준다는 리온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이대로 스카드의 저택에 머물겠다는 건 둘이 뭔가 있다는 걸 그에게 알려주는 꼴이었다.
스카드와 손을 잡았지만, 동맹이라는 걸 들켜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그녀는, 리온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
스카드는 홀로 적진에 남아 불안하고 힘들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척 손에 입을 맞추며 작은 쪽지를 전했다.
"그럼 저는 내일 회의 때 다시 뵙겠습니다."
피곤하다며 손님방으로 돌아간 바이올렛이 조심스레 그가 건넨 쪽지를 살펴보자, '곧 데리러 갈게요.' 라는 뜻 모를 말이 적혀 있었다.
리온은 시간을 끌면 없던 의심도 생길 사람이니까, 둘만이라도 먼저 성에 가자고 한 건 그였다.
그래서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성으로 와, 리온의 얼굴을 보고 안심될 만한 이야기도 전했다.
브리텐드로 가기 전까지는 성 안에 머물러야 별다른 스캔들도 없으며, 남들 눈에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그는 어떻게 데리러 온다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