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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하 Aug 22. 2024

32. 계획된 악몽

바이올렛은 조용히 방에 앉아 혼자 생각에 잠겼다.


사랑했던 자신의 아버지는 그가 믿어 의심치 않은 여동생 손에 죽고, 어머니도 병을 얻어 죽었다.

고모였지만, 언니나 마찬가지였던 이사벨은 이제 적이 되었으며, 서로가 살아있는 한 계속 적이 될 것이다.


···내 아버지를 죽인 그녀가 새삼 참회하고 자신에게 이전과 같은 애정을 베풀 리가 없으니까.



햇살 아래서 말갛게 웃던 이사벨의 미소가, 피 튀기는 잔혹한 미소로 바뀐 건 아마 그 쯤이었을 거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후계자 싸움이 끝나고, 크리스틴 왕비가 세상을 떠났을 즈음.

얼마 지나지 않아 조모였던 레이디 한나 칼라이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죽음이 타살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문과 의혹은, 조사를 강하게 거부한 왕실에 의해 묻혔다.


하지만 진실이 무엇이었든, 사건의 내면에는 이사벨을 향한 동정이 깔려있었기에, 설령 그녀의 범죄가 섞여있었다 해도 엄중한 법의 심판을 받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오랜 기간 내연녀와 함께 성에서 살며 평화를 유지해야 했던 크리스틴.

아이가 없어 이혼에 관해 끊임없이 거론되었던 크리스틴.

그런 그녀가 어렵게 얻은 아이 이사벨.


왕실의 유일한 적자이자 공주인 그녀였기에, 직접 사람들 앞에서 한나를 죽인 것이 아니고서는 심판대에 세울 수 없었다.



"나쁜 년."



대체 어디서부터 너의 피 묻은 손이 내 인생을 붙잡아 온 걸까.

차라리 우리 둘이 맞잡은 적이 없던 손이었으면, 난 더럽혀진 너의 손을 단숨에 외면할 수 있었을 텐데.


변해버리는 너를 보는 두려움과 걱정, 차마 버리지 못한 미련 한 자락이 결국 나를 이 끝으로 몰았다.

칼을 들어 네 목을 겨누지 않고는 살아서 나갈 수 없는 처절한 전쟁 한복판으로.


그러니 설령 이사벨, 네가 내 손에 죽는다 해도···



“..억울할 건 없겠지?”



고개를 들어 본 천장은 고급스러운 금빛을 더불어 쨍한 색감들이 화려하게 칠해져 있었다.

사치스럽지만 무게 있으면서 천박해 보이지 않는 모양과 색조들은 어딘가 리온과 닮아있었다.



“왕족들이란 다 이렇지.”



다시 만난 리온은 이전보다 더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이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던 소년의 모습은 다 사라지고, 야망과 욕망이 뒤섞인 지배자의 모습이었다.


어릴 적 그를 보고 설레었던 순간, 붉어진 얼굴을 들킬까 재빨리 고개를 돌렸던 곳에는, 자신보다 더 사랑의 열망에 취한 채 리온을 바라보는 이사벨이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눈치챘을 때는 당연히 접어둘 수밖에 없었던 감정들.

후에 다시 그 마음을 꺼내어 리온이 손을 잡아주기를 바랐을 때는, 풋사랑에 빠졌을 때보다 더 떨렸었다.


그래.

한 때는 그가 나의 손을 잡고, 나만큼 그를 사랑한 그녀를 내쳐주길 바랐던 적도 있었다.

그때는 사랑을 얻어 적을 치고, 사랑과 권력 모두의 우위를 점령하고 싶은 욕심이 앞서 있었다.


사랑보다 현실에 더 계산이 빠른 리온이 이사벨을 버릴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재수 없어.”



가까운 혈육이자 첫 우정이었던 이사벨도 잃었고, 어린 소녀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첫 연정도 잃었다.

남은 것은 아버지의 복수와 명예를 회복하는 일뿐.


그 뒤에 올 것이 평화일지, 허무일지는 알 수 없지만 상관없었다.

그게 뭐든 지금 그녀가 가진 절망보다는 나을 테니까.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던 바이올렛의 한숨이 짙었다.


맑은 하늘만 봐도 신이 나서 가슴 뛰던 날들이 있었는데.

저 햇살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 게 언제부터였더라...



-똑똑똑



"?"


"왕녀님. 시중을 들 조입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날카로운 눈매의 갈색머리 여관이 인사를 건넸다.

말투, 눈빛, 몸동작 등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예의범절과 일의 방식을 보니, 그녀를 따로 교육시킨 자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실에서 뽑은 것 같지는 않고. 어디 출신이지?"


"프로이센 가문에서 일했습니다."



조는 티포트에서 따뜻한 차를 따른 뒤, 잔을 내려놓으며 공작님께서 보내신 것이라 덧붙였다.



"긴장을 완화시켜 주는.. 뭐 그런 건가?"



차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에게 조가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금방 데리러 온다 하셨습니다.”



스카드가 건넨 쪽지가 떠오르는 말이었다.

큰 기대 없이 자리에 앉아있던 바이올렛이 이 남자가 대체 뭘 하려나, 하는 생각을 하며 찻잔을 들었다.


하지만 찻잔을 들고 나니 좀 더 다른 풍경이 보였다.


예를 들면.. 조의 손에 박힌 굳은살은, 단순히 하녀로 일해서 그렇다기에는 좀 과해 보였다.

손등에 올라온 힘줄이나 팔에 보이는 근육 역시 마찬가지.


네 입으로 스카드가 보내서 왔다고 했지만..

그리고 그는 금방 데리러 온다고 했지만..

정말 네가 나를 위해 여기 온 게 맞을까?



“성에서 일하는 여관이라고 했나?”


“네.”


“누굴 모시고 있지?”


“전에는 공주님을 모셨습니다.”



공주님을 모셨던 사람이 바로 나에게 배정되지는 않았을 텐데···


조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던 바이올렛은 그녀의 눈을 빤히 보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네가 나에게 줄 답이 있을 텐데?”


“레이디 한나 칼라이는 영면에 들지 못하셨습니다.”


“······”



그래.

아직 그녀는 영면에 들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그녀가 자연사 한 것이라 해도.

그녀의 아들은 살해된 것이 분명하니까.



바이올렛은 의심을 거두고 찻잔을 들었다.

차를 마시려던 그녀의 손을 조가 저지하며 속삭이듯 물었다.



"?"


"다소 거친 방법일 텐데, 괜찮으실지 먼저 여쭤보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거칠다고?"


"악몽을 꾸실 수 있다고 하셨어요."



대체 무슨 생각인지...

진짜 알 수 없는 남자라니까.



"괜찮아. 어차피 현실도 악몽 같으니까."



바이올렛은 차를 마시며 스카드와 헤르나, 리온과 이사벨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렸다.



"...맛은 나쁘지 않네."



다 마시고 빈 찻잔을 보던 그녀의 눈에 찻잔 안에 가라앉은 붉은 찌꺼기가 들어왔다.

이게 문제의 재료인 걸까, 생각하던 바이올렛에게서 조는 양해를 구하며 얼른 찻잔을 거둬갔다.


앞치마 안쪽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찻잔을 닦고는 다시 쟁반에 담아 가지고 나가는 모습을 보니 찻잔 안에 든 것이 들키면 안 되는 건 맞는 것 같았다.



"....독이라면 꼼짝없이 죽겠지?"

"남자 하나 믿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들이킨 게 웃기네."



자조 섞인 말을 내뱉던 바이올렛은 긴장이 풀린 탓인지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그날 저녁, 입맛이 없다며 간단하게 방으로 간식을 들여 식사를 마무리했다.

조의 시중을 받으며 침대에 눕자, 그녀는 책을 한 권 들고 왔다.



"뭐야?"


"잠에 드실 때까지 읽어드리겠습니다."


"동화책 들으면서 잠들 나이는 아닌데."


"........"



조의 야릇한 미소를 보니 동화책은 구실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게 통할 나이는 아닐 텐데 리온에게 뭘 보여주고 싶은 걸까.

아니, 리온이 아니라 나에게 보여주고 싶은 건가?


이제 와서 다른 생각을 해봐야 무리라는 그녀는 더 이상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베개를 베고 누워있으니, 곧 조의 나긋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옛날 아주 오래된 성에 사는 드래곤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기간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위험에 빠뜨린 용이었는데, 그런 그를 없애기 위한 용사로 발탁된 헬드는 조심스레 성으로 접근했습니다."



-달칵



문쪽에서 들리는 의문의 소리에 바이올렛의 신경이 곤두섰다.


들리지 않는 것인지, 들었지만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모를 조의 태연함에 이질감을 느낀 그녀가 말을 걸었지만, 조는 계속해서 동화를 읽어나갔다.



"헬드는..."


"잠깐, 조.."


"성 안으로 들어가 꼭대기까지 올랐지만, 그 어디에도 드래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헬드는 다시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며 지하를 향해.."


"방금 그 소리는.."



-챙!



"아아악!!!"



놀란 바이올렛이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어둠을 타고 접근한 살수는 조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조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앞치마 안쪽에서 단검을 꺼내어 막았지만, 살수는 당황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계속 조를 공격했다.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 팽팽한 두 사람의 싸움에 혼란과 충격이 가시지 않은 바이올렛은 계속 누가 좀 와달라며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방으로 오지 않았다.

곧 목에 칼이 박힌 조가 피를 토하며 바이올렛의 앞에 쓰러졌고, 온몸이 떨리는 그녀의 앞으로 다시 살수가 다가왔다.



'왜? 어째서? 아니.. 난 왜 도망치지 않은 거지..?'

'몸이.. 움직이지 않아...'



살수는 달빛을 반사하는 칼을 높이 쳐든 채, 칼자루부터 옷 전체가 온통 피로 물든 모습으로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아아악!!!!!"



"왕녀님!"


"바이올렛! 정신 좀 차려봐!!!"


"아아아악!!!"


"바이올렛!!!!!!!"



-조금 전


칸나의 방으로 향하던 리온은 복도 멀리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발길이 멈췄다.

도와달라며 밖을 뛰쳐나오는 여관을 보니, 바이올렛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어느 곳보다 안전하다 자신하던 그의 성 안에서 왕녀의 비명소리라니.

리온은 발길을 돌려 바이올렛에게 달려갔다.


잠에 든 것인지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는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댔다.

악몽이라도 꾼 것인가 싶어 깨우려 하는데, 아무리 큰소리로 부르고 어깨를 흔들어도 소용이 없었다.


리온은 조에게 시켜 물을 떠 오라 한 뒤 바이올렛의 얼굴에 끼얹었지만, 반응이 없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의사를 불러오게 지시하려는 찰나, 힘겹게 눈을 뜬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바이올렛!"



다행이다 싶어 안심하던 리온의 얼굴을 바라보던 바이올렛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입을 뻐끔거리다 그대로 기절했다.

안정된 숨을 쌕쌕 거리며 잠이 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리온은 한참 후에야 바이올렛의 방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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