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는 것 중에 가장 신기한 것의 하나는 과거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추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옛날을 다시 생각하기 위해서 묵은 앨범을 꺼내서 사진 위에 머물러 있는 지난날의 모습들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사진이란 다만 추억의 그 어느 한순간이요, 그 전부는 아닙니다. 정말 아름다운 추억이란 흔히 사진첩 속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불완전한 것이나마 전쟁으로 인하여 거의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요행히 우리에겐 꿈이란 게 있습니다. 이미 저세상에 가 버리고 없는 그리운 얼굴들도 꿈에서는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남북으로 갈리어 서로 만나지 못하는 사이라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꿈길엔 삼팔선이 없습니다. 정말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함경도 출신의 월남 아동문학가 강소천 선생의 유명한 동화 "꿈을 찍는 사진관"의 한 대목이다. 이 동화를 읽고는 어린 마음에도 '꿈을 찍는다'는 콘셉트에 감탄했던 것 같다. 꿈을 찍는 사진관의 사진사가 돼보고 싶기도 했고, 찍고 싶은 꿈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기도 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꿈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공간에서 우리는 현실에서는 꿈도 못꿀 꿈을 실현하기도 하고 새로운 꿈을 꾸기도 한다.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창조자가 되기도 한다. 그 공간을 우리는 극장이라 불렀다.
전국 곳곳의 극장에는 저마다의 아우라가 있었다. 서울만 놓고 봐도 광화문에 국제극장, 충무로에 대한극장이 있었고 종로3가에는 피카디리, 단성사, 서울극장 트리오가, 종로2가에는 허리우드, 명동에는 중앙극장, 을지로에는 명보극장과 스카라극장, 국도극장 등의 이른바 10대 극장이 있었다. (이름들만 들어도 다채롭다. 요즘엔 동네가 어디든 CGV, 롯데시네마,메가박스+지역명이다)
광화문 네거리 한복판, 지금의 동화면세점 자리에는 1400석의 국제극장이 있었는데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광화문의 랜드마크였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2000석으로 한국 최대의 극장이었던 대한극장. 다른 영화들도 여러 편 봤지만, 특히 멀티플렉스로 바뀌기 전 마지막으로 상영했던 70mm 스크린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추억이 있는 곳이다. (인터미션도 있었다!)
피카디리에서는 "람보2", "접속"(영화에 피카디리 극장과 극장 앞마당이 나온다) 등을 봤고, 단성사에서는 한겨울에 다른 영화 티켓팅에 실패해 "다이하드"를 봤는데 정말 '손에 땀을 쥐고' 봤다는 구태의연한 표현이 딱 어울릴만큼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웨이팅이라면 천하맛집도 돌아서는 나도 "서편제"는 어쩔 수 없이 꼬이고 꼬인 줄에 서서 한참을 웨이팅해서야나 표를 끊을 수 있었다.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외관의 스카라 극장에서는 어떤 영화를 봤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다만 2층 좌석의 압도적인 경사로 떨어질까봐 무서웠던 기억만큼은 뚜렷하게 남아있다. 명동성당 근처의 중앙극장에서는 나영희 주연의 "매춘"을 보았고("애마부인" 이상의 충격이었다), 허리우드에서는 전도연, 최민식 주연의 "해피엔드"를 보았다.
10대 극장만큼이나 재개봉관, 재재개봉관들도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내 인생 최초의 영화 체험이었던 연신내 양지극장도 재개봉관이었지만 2층까지 있을만큼 규모가 꽤 됐다. 지금은 신라스테이가 들어선 서대문 사거리의 화양극장에서는 시멘트 바닥 냉골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느끼며 뜨겁게 "록키"(몇 편이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를 보았다. 제기동과 안암동에 있었던 고려극장, 안암극장에서는 "천녀유혼", "걸어서 하늘까지"등 많은 재개봉 영화들을 혼자 봤다.
요절한 기자이자 시인인 기형도가 죽은 파고다 극장은 '게이들의 집합소'(죄송하지만 당시의 정확한 뉘앙스를 반영하자면 '소굴')라는 소문에 가슴을 졸이면서도, 놓치기 아까운 영화가 있어 호기심과 불안감 사이에서 몇 번 갔는데 별일은 없었다. 이밖에도 "원스 어픈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13일의 금요일"을 봤던 남대문극장과 아트하우스 영화를 주로 상영했던 관철동의 코아아트홀도 있었다. 인생 영화 중 하나인 '비포' 시리즈의 시작, "비포 선 라이즈"를 본 극장이다.
모든 개봉관은 스크린이 하나뿐인 단관 극장이었고 대개는 이층까지 있어서 일단 들어가면 규모와 군중에 압도됐다. 부도심 (재)개봉관들도 천석은 거뜬했다. 그런 체험은 TV에서는 할 수 없었다. 그 공간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영화적 체험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극장에 가는 것이 비디오방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됐다. (실제로 구조도 약간 그렇게 생겼다) 1998년 강변 CGV가 생기면서 한국에서도 멀티플렉스가 대세를 이룬 것이다. 지금 나는 물론이고 대다수 관객들도 무슨 영화를 CGV에서 본 아련한 기억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롯데시네마에서 봐서 기억에 남았고, 메가박스에서 봐서 추억이 됐지라고 말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용아맥' 정도가 기억에 남을지 모르겠다)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마지막 구절처럼 지나간 것은 또 그리워진다고,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니 극장의 추억을 못 잊는 것은 그저 기억의 왜곡일뿐 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지금의 쾌적한 좌석이 좋다. 또 멀티플렉스에서 극장 체험을 시작한 세대에게는 멀티플렉스에 얽힌 저마다의 추억도 있을 것이다. 어떤 극장이든 결국 극장이란 영화를 보는 곳, 꿈의 공간이므로.
최근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보존된 가장 오래된 단관 극장인 원주 아카데미 극장이 지역 시민과 영화인들의 호소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부가 헐렸다. 스카라극장 헐리듯 소유주가 불시에 기습 철거한 것도 아니고 공공기관인 시(市)가 한 일이다. 어제(28일)도 시의 용역을 받아 강제 철거에 나선 업체와 극장 보존운동 측·영화인들이 충돌해 보존운동 측 대표와 이은 한국영화제작가협회 대표 등 6명이 업무방해혐의로 긴급 체포됐다. 보존운동 측 4명이 건물에 들어가 농성을 벌이면서 더 이상의 철거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
한국에 남은 단관 극장은 1960년에 개관한 경동극장(지난해 리모델링으로 스타벅스가 되었다)과 1963년 문을 연 원주 아카데미 극장, 1968년에 화재로 재건축한 광주극장뿐이다. 그중에서 단관 극장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 원주 아카데미 극장이다.
2005년, 원주시에도 멀티플렉스가 개관하면서 이듬해부터 4개의 단관 극장이 차례로 문을 닫았다. 아카데미 극장도 폐관한 채 10여 년간 방치됐다. 하지만 건물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아카데미 극장 건물 한 개만 남게 된 2015년 말부터는 지역 사회에 극장 보존 운동이 벌어졌다. 아카데미극장은 2021년 문화유산국민신탁과 내셔널트러스트에서 주관한 '이곳만은 꼭 지키자' 공모전에서 문화재청장상을 수상했고, 시민들이 1억원 이상을 모금하기도 하면서 지난해 1월, 원주시의 극장 매입과 보존 방침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지난해 지방선거로 바뀐 시장은 이를 뒤집었다. 아카데미 극장이 문화부의 '유휴공간 문화재생 활성화 사업'에 선정돼 받을 수 있는 국비와 도비 39억원도 반납하고 극장을 철거하기로 한 것이다. D등급을 받은 건물 안전성 문제도 있고 예산도 많이 드니 극장을 헐고 그 자리에 주차장과 공연장 등을 설치하겠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 극장을 헐고 짓는다는 게 대단한 것도 아니고 겨우 주차장이라니. 할 말이 없다. (극장을 헐고 뭘 짓겠다는 건 계속 조금씩 말이 바뀌고 있다)
일반적인 경우, 보존과 개발은 풀기 힘든 사회적 딜레마다. 딱 뭐가 맞다고도 하기 힘들다. 얻는 것이 잃는 것이 있고,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문화 선진국들은 보존에 좀 더 방점을 두는 건 사실이다. 물리적으로 사라져버린 건 되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짧은 역사의 미국도 웬만한 건 일단 보존하고 본다. 그리고 그것이 -이런 관점으로 보기는 싫지만- 또 다른 경제 효과, 즉 관광 상품과 문화 상품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원주 아카데미 극장에서 영화를 본 적도 없고, 문화재에 대해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지식도 부족하다. 그래서 연구자들의 식견을 끌어 오고자 한다. 지난 달 역사, 문화, 건축, 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28개'에 이르는 학술단체가(한국사회학회·한국건축역사학회·한국문화연구학회·한국영화학회·한국문화사회학회 등) 공동으로 긴급 호소문을 발표했다.
"아카데미극장은 이미 그 자체로 문화적, 역사적 활용 가치가 충만한 희소성 높은 근대문화유산입니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건물 안전성에 대한 부분은 건물의 철거라는 방식의 단순하고 돌이킬 수 없는 해법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합니다…일찍이 이와 같은 문제를 대면해온 다른 많은 국가들에서 '철거'라는 돌이킬 수 없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시간과 예산이 소요되더라도 다양한 방식의 정책적 접근을 통해 문화유산의 보전과 안전 관리 양자를 동시에 취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아 왔음은 주목해야 합니다."
극장 보존운동을 벌이고 있는 '아카데미의 친구들' 회원들은 이미 극장 일부가 철거된 지난 26일에도 시측과 면담을 하고 어제도 새벽부터 현장에 나와 극장을 지켰다. '원주 아카데미극장 보존을 위한 영화인 행동'도 이날 원주시에 간담회를 제안한다는 보도자료를 내놓았다. 이미 극장 옆면이 부숴졌는데도 오죽하면 이들이 체념하지 않고 계속 달려들겠는가. 그게 뭐라고. 그깟 낡아 빠진 극장이 뭐라고.
왜냐하면 그곳은 사람들의 꿈이 환상처럼 펼쳐졌던 공간이기 때문이다. 영사기가 촤르르 소리와 함께 돌며 빛이 퍼져나가 은막에 영화가 투사되면 관객들은 현실의 시름과 고통을 잊고 저마다의 꿈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아카데미 극장을 지키려는 사람들 가운데는 옛 추억을 떠올리는 장년층은 물론 한번도 아카데미 극장에서 영화를 보지 못한 젊은층도 많다고 한다.
며칠 전 서울시가 창신동의 '백남준기념관(고택)' 운영을 접기로 했다가 그게 말이 되냐는 여론에 밀려 번복했다. K-컬처 어쩌고 하면서 외국에서 더 높이 평가받는 얼마 안되는 위대한 한국인 예술가의 몇 없는 흔적마저 지우려고 애를 쓰냐는 질타에 한발 물러선 것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은 "공간이 협소해 항온항습이 되지 않는 등 전시에 불리한 환경의 개선이 필요해 활성화에 나서기로 했다" 옹색한 변명을 내놓고는 다시 잘 운영해보겠다고 한다.
관료사회에서 정책적 판단은 의외로 허술하고 즉흥적으로 결정되기도 한다. 운영 종료 소식이 알려진 지 며칠 만에 화들짝 놀란 듯 철회됐다는 게 그 방증이다. 공공적 책무감 대신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진 선출직의 영향도 강하게 받는다. 선출직은 떠나지만 문화적 공공재는 남는다. 남아야한다.
뭐든 일단 갈아엎고 새로 짓는 건 한국 사회의 특기이고(그걸로 성공해왔다), 뭐든지 보존하는 것 또한 능사는 아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문화적 수준이 높아지고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들을 성찰하는 문화적 수준에 이르면서, 우리는 보존이냐 재개발이냐는 선택의 순간과 점점 더 자주 마주치고 있다.
재개발도 해야 한다. 경제성도 중요하고 재산권도 중요하고 쾌적함도 중요하고 안전성도 중요하니까. 하지만 비록 퇴색한 시멘트 건물이라고 할지라도 그걸 자신의 몸 한쪽, 정신의 일부와 마찬가지로 느끼는 사람들이 꽤 된다면, 그걸 없애서 엄청난 편익을 얻을 수 있는게 아니라면(정치적 편익말고), 때로는 문화가 돈보다 중요한 순간들이 있다면, 철거가 아닌 다른 방법들을 찾아봐야 한다.
세계인들이 상찬하는 도시 파리도 정작 프랑스의 젊은 건축가들은 떠나고 싶어한다고 들었다. 왜냐하면 건물 하나도 맘대로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젊은 건축가들로서는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없으니 파리가 지루하고 답답할 도시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다고 다 철거하고 새로 지으면 그게 파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