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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itor M Oct 31. 2024

"룸 넥스트 도어"와 한강

이이의 소설이 이렇게 잘 읽혀도 되는 건가?


뒤늦게 '한강 읽기' 대열에 합류한 나는, 한강의 소설이 생각보다 쉽게 읽히는 것이 어쩐지 꺼림칙하다. "한강의 詩적인 문장들은 철저히 고통스럽게 읽혀야 한다"는 한 평론가의 글이 마음에 걸려서 일까.


한강의 소설은 고통을 말한다. 타인의 고통을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이 그의 소설에 담겼다. 『소년이 온다』를 쓰면서 한강이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이 고통이었다고 한다. 압도적인 고통. 석 줄 쓰고 한 시간 울고, 해가 질 때까지 멍하니 앉아 있다 오고. 이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거의 매일 울었다고―


                                                                                     *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헨리 제임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서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생각하는 사람과 내게는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생각하는 사람.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견디며 살고,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시그리드 누네즈 소설 『어떻게 지내요』166쪽

 

                                                                                     *


  위 문장에서 고통 대신에 죽음을 넣어도 될 것이다.


나는 이 칼럼을 통해서만 세 번이나 (나를 죽여줘, 다 잘된 거야, 플랜75) 죽음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문제를 소재로 한 영화를 다뤘다. (나도 내가 왜 이 문제에 이토록 관심을 갖는지 모르겠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영화는 이런 영화들 가운데 가장 우아한 영화다. 두 달 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아서만은 아니다. (이 영화제 사상 신기록인 18분 간 기립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60년생 동갑내기 명배우인 줄리안 무어 ―칸·베니스·베를린·아카데미에서 모두 여우주연상을 받은 유일한 배우이다―와 틸다 스윈튼이 주인공이어서만은 아니다, 라고도 말하고 싶지만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성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소한 이만큼 우아하게 고통과 죽음, 안락사의 문제를 바라보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룸 넥스트 도어》의 줄리안 무어(좌)와 틸다 스윈튼 /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라만차에서 태어난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첫 번째 영어 영화인 이 작품은 그가 ―악동이라 불리던 젊은 시절의― 모든 '고통과 영광'[페인 앤 글로리·Pain and Glory]을 거쳐 '그 옆방'[룸 넥스트 도어 ·The Room Next Door]에 도달했음을 보여 준다. 그 방은 평온과 안식, 통찰이 있는 방이다. 혹자는 생명에 대한 경시이고 인간의 권능 밖의 일이라고 말하겠지만.

 

                                                                                     *


《룸 넥스트 도어》의 주인공인 마사는 뉴욕타임즈의 베테랑 종군 기자다. 하지만 지금은 병원에 입원 중이다. 자궁경부암 3기. 실험적 치료를 받아봤지만, 암은 기어이 간과 뼈까지 전이됐다. 앞으로 몇개월, 길어봤자 1년 정도 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의사는 마사의 심장이 튼튼하다고 한다.


  무슨 뜻이겠어? 내 몸은 계속 싸울 거란 거야. 고통받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하지만 마사는 고통스러운 치료 대신 존엄있는 죽음을 원한다.


  난 잘 죽을 권리가 있어. 존엄을 지키며 퇴장할래. 깨끗하고 깔끔하게.


다크 웹에서 안락사 약을 구한 마사는 오래 전 잡지사에서 함께 일했지만 일로 바빠 한동안 왕래가 없었던 작가 잉그리드에게 자신의 이별 여행에 동행해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이 죽을 때 옆방(룸 넥스트 도어)에 있어 달라는 것이다.


마사는 오랫동안 소원(疏遠)했던 딸한테는 말도 못꺼냈고, 다른 지인들로부터는 모두 거절당했다. 평소 자신의 책을 통해서도 죽음이란 문제를 예민하게 고찰해온 작가 잉그리드도 주저한다. 모든 고통은 개.별.적.이므로.

  

에드워드 호퍼의 '햇볕 쬐는 사람들'(people in the sun) /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마사는 교외의 한적하고 근사한 ―벽에 에드워드 호퍼의 '햇볕 쬐는 사람들'이 걸려있는― 숲 속 주택을 한 달 간 빌렸고, 두 사람은 함께 그곳으로 떠난다. 마사가 정확히 언제 죽을지 ―안락사를 결행할지― 는 알 수 없다. 마사는 방문을 열어 놓고 자는데, 어느 날 아침에 잉그리드가 일어나 마사 방으로 갔을 때 방문이 닫혀 있다면 그날이 바로 마사가 세상을 하직한 날이다.


  그게 표시야.


잉그리드는 매일 새벽마다 가슴을 졸이며 마사의 방으로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


                                                                                     *


《룸 넥스트 도어》는 全美도서상 수상 작가 시그리드 누네즈의 『어떻게 지내요』[What are you going through]란 소설을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직접 각색한 영화다. 이 책의 프랑스어판 제목은『당신의 고통은 무엇인가요?』[Quel est ton tourment?]이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가 1942년에 쓴 글에서 영감을 받았다.


어떻게 지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고 썼을 때 시몬 베유는 자신의 모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그 위대한 질문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 (Quel est ton tourment?) -『어떻게 지내요』122쪽


                                                                                     *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잉그리드도 마사의 고통과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마사의 옆방에 있어주기로 한다. 그것이 잉그리드가 他者의 고통에 가 닿는 방식이다.


  작가 한강은『소년이 온다』출간 직후 말한 바 있다.


자료를 읽으면서 제가 느낀 가장 강한 감정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무력감이었어요… (중략)...그래서 결국 저에게는 같이 겪자는 마음만 남았어요…(중략)...
이 소설에는 누군가의 고통 때문에 고통받으며 그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나와요. 동호가 정대에게, 정대가 정미에게, 은숙은 동호에게, 진수는 동호와 영재에게, 선주는 동호와 성희에게…...그렇게 다들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고통에 몸을 기울이고 있어요. 타인의 고통을 감지해서 자신의 고통으로 삼을 수 있다는 건 인간의 고귀함을 증언하는 최후의 방어선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타인의 고통 때문에 생기는 개인적 고통, 그 지극히 감각적인 고통에 대해서 쓰고 싶었어요. -「사랑이 아닌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한강과의 대화」,『창작과 비평』2014. 322쪽

 

                                                                                  *


  별다른 사건 없이 ―죽음보다 더한 사건은 없으니 이 말 자체에는 어폐가 있지만― 대사에서 대사로, 대화에서 대화로 이어지는 '비포 시리즈' 스타일의 영화라 지루하게 느낄 관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화와 대사를 이어 놓는 방식과 편집이 아주 세련됐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시간과 장소를 순식간에 넘나드는 씬의 글라이딩을 놓칠 수도 있다. 아니, 그런 것쯤은 잊어도 좋을만큼 씬 전환에 부드럽게 빠져든다.


죽음을 앞둔 마사를 연기하는 틸다 스윈튼의 알듯 모를듯한 표정도 인상적이지만, 별 말 없이도 마사의 대사를 너끈히 받아주는 줄리안 무어의 리액션 숏이 없었다면 틸다의 명연이 공허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두 배우의 얼굴 자체가 스크린이다.


두 사람이 타는 빨간색 볼보SUV, 잉그리드가 입는 빨강 V넥 스웨터와 검/녹 체크 하프코트, 마사의 연보라색 니트티와 노랑 수트, 그리고 빨간색과 녹색의 테라스 라운저(휴식용 의자)까지. 페드로 알마도바르의 인장과도 같은 원색의 색채 감각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


  잉그리드를 취조하던 형사처럼, 인간으로서, 투철한 신앙인으로서, 마사의 행위를 범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정법상 자살 자체는 범죄가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불법으로 약은 구입한 것은 범죄이고, 자살을 돕거나 방조했다면 그것도 범죄다― 하지만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관객에게 마사의 선택을 폭력적으로 설득하거나 신파로 물들이지 않고, 차분하게 한번 생각해 볼만하지 않냐고 넌지시 묻는다.


  이 영화에는 눈이 세 번 나린다. (왠지 『작별하지 않는다』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세 번의 詩가 나린다. 한번은 눈 내리는 저녁에 창밖의 도심을 바라보며 마사의 입을 통해서, 한번은 두 사람이 함께 보는 존 휴스턴의 영화 《죽은 사람들》의 내레이션을 통해, 한번은 이별 여행을 마친 눈 내리는 저녁 숲 속의 별장에서 잉그리드로부터.


어렴풋이 눈이 내린다

쓸쓸한 교회 마당에도

온 우주를 지나

아스라이 내린다

그들의 최후의 종말처럼

모든 산 者와
죽은 者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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