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과연 어느 정도 크기까지 자신을 향한 기대와 열광, 칭찬과 환호 등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다큐멘터리 <디에고 마라도나>는 이에 관한 영화입니다. 지난주 마라도나가 60세로 세상을 뜬 후,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보고 싶어졌습니다. 2016년 <에이미>로 아카데미 장편다큐멘터리상을 받은
아시프 카파디아 감독의 이른바 '천재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죠.
"제가 한 게 아니라 신(神)이 한 거예요."
영화를 보면서 마라도나가 86년 멕시코월드컵 8강전 '신의 손' 논란 이전에도 한 인터뷰에서 이미
자신의 능력과 관련해 신(神)을 언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신의 손"이 갑자기 나온 말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갑자기 튀어나오곤 하는 천재성과 신기(神氣)에 스스로도 놀라 어떤 순간에는 자신이
신의 현현(顯現)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 믿지 않았다면 그 영욕의 삶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요.
1984년, 그가 바르셀로나에서 이적해 몸담았던 나폴리 사람들에게 마라도나는 구세'주'였습니다.
이탈리아 남부 도시 나폴리는 세계 3대 미항(美港)이라는 명성과는 달리 이탈리아에서 가장 가난하고 더러운 도시였습니다. 유벤투스팬들이 이런 응원가를 부를 정도로 부유한 중북부 도시 사람들의
조롱과 모욕의 대상이었죠. (1985년 11월 3일, 나폴리 VS 유벤투스 전)
"개들도 뛴다. 나폴리인들이 온다.
지진의 제물. 절대 씻지도 않지.
나폴리 쓰레기. 이탈리아 전체의 수치.
나폴리인들아 열심히 일해라. 마라도나를 위해 몸을 팔아야할테니"
나폴리는 리그 중하위권을 맴돌던 팀. 마라도나는 이적 다음 시즌 팀을 3위로 끌어올리더니 86-87시즌에는
세리에A리그 우승을, 88-89시즌에는 팀 역사상 최초로 UEFA컵 우승까지 안깁니다. 영화를 보면서도 믿기
어려웠지만 거의 마라도나 혼자 '멱살 잡고 끌고 간' 결과였습니다(이 점에서 마라도나는 펠레, 메시, 호날두처럼 빅클럽에서 팀 동료들의 지원을 충분히 받은 스타선수와 비교되기도 합니다).
영화 '디에고' 중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에게 업신여김과 설움을 당하던 나폴리는 글자 그대로 뒤집어졌습니다. 마라도나는
'축구의 신'(神)이 아니라 그냥 신(神)이 되었습니다. 물론 86년 멕시코월드컵에서 세계축구사에 기록될
'5분'을 비롯한 대활약으로 우승을 안긴 그의 조국 아르헨티나에서도 말할 나위가 없었죠
(실제로 '마라도나교'가 존재합니다).
바로 거기서부터 마라도나의 몰락은 본격화합니다. 그를 향한 찬양과 숭배는 모든 것을 가렸습니다. 세상은
집 밖으로 나다닐 수도 없는 마라도나가 이성을 가지고 살기 힘든 환경이 돼버렸습니다. 우상으로서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켜줘야 한다는 압박, 모든 면에서 항상 기대 이상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
마라도나가 받은 찬사와 환대만큼이나 그가 느꼈을 정신적 압박은 저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듭니다.
마라도나의 내면아이인 디에고는 방황을 시작합니다. 술, 마약, 여자 문제를 잇따라 일으키며 디에고와
마라도나는 점점 더 사이가 멀어집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부에노스아이레스 빈민가 7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는 15살 때부터 가장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그의 개인트레이너였던 페르난도 시뇨리니는 말합니다.
"그에겐 디에고와 마라도나 두 개의 자아가 있었죠. 디에고가 자신은 없지만 훌륭한 소년이라면 마라도나는
축구산업과 미디어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스스로 만들어낸 인물이었죠. 그래서 그는 약점을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 말했죠. 디에고와는 끝까지 가겠지만 마라도나와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그러자 그가
말했어요. 하지만 마라도나가 없었다면 난 여전히 빈민가에 있었을 걸."
이 영화의 원제는 그래서 <디에고 마라도나>입니다. (타이틀이 뜨는 화면에서 '디에고'와 '마라도나'의 폰트 색깔이 다릅니다. 그런데 감독의 의중이 잘 반영이 안 됐는지 한국에서는 <디에고>라는 제목으로 개봉했습니다)
1989년 UEFA컵 우승 후 마라도나는 나폴리를 떠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나폴리 구단주가 놓아주지 않죠.
"하라면 해야죠."
담백하게 내뱉는 그의 덤덤한 얼굴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마라도나는, 그리고 그의 *내면아이 디에고는
당시 신(神)의 위치에서 내려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뭇사람들은 그를 계속 신의 위치에
두고 즐기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디에고가 아닌 마라도나만을 원했던 거지요. 대중도 가끔은 신(神)처럼
행동합니다.
마라도나는 초인적인 능력으로 나폴리에 리그 두 번째 우승을 선사하지만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준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로 뛰면서 얄궂게도 나폴리 홈구장에서 이탈리아 국가대표팀과 맞붙습니다. 이 경기가 아르헨티나의 승리로 끝나자 이탈리아의 미디어와 사법당국, 세무당국 모두가 마라도나에게 등을 돌립니다. 물론 마라도나의 잘못도 있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다들 애써 눈감아주던 것들이었습니다. 마라도나는 하루아침에 악동으로 망가져 갑니다.
1991년 4월 26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디에고 마라도나가 코카인 소지로 체포당하고 있다.
마라도나가 신(神)이 됨으로써, 다시 말해 넘을 수 없는 선을 넘어섬으로써 분노한 신(神)이 그를 파멸로 몰고 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축구선수로서는 신(神)이었으나, 그라운드 밖의 세상에서 홀로 남겨질 때는 인간일 뿐이었습니다.
최근 연예인이나 유명인, 정치인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특정 대상을 향한 너무 큰 기대와 열광, 추앙은 서로에게 압박이 되고, 배신이 되고, 반감이 되고, 왜곡이 돼서 돌아오곤 합니다. 특히 소셜미디어의 범람으로 전에는 유명인과 팬, 지지자 사이를 미디어가 이어줬다면(관계와 사실을 왜곡하기도 했지만요) 지금은 유명인과 팬이 'D2C'(Direct to Consumer) 관계가 되어 훨씬 더 직접적으로 만나게 되면서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측면, 양쪽의 진폭과 극단성은 더 커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둘 사이에 조화롭고 진정성 있는 관계를 유지하기가 쉽지는 않다고 봅니다.
'디에고와 마라도나'에서 보듯이 자기 자신과도 소통이 막히기도 하고 자아가 분열하기도 하는데
나와 남 사이는 결코 팬과 스타, 우상과 지지자라는 관계로 무균질화할 수 있는 게 아닐 겁니다.
영화에서 마라도나의 여동생은 말합니다.
"오빠는 열다섯 살 이후로 자기 인생이 없었어요. 그의 삶은 대단한 동시에 끔찍했죠."
지나친 기대는 대개 결핍 욕구에서 비롯된다고 카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 홍성남 신부는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해지려면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에게도 지나친 기대를 걸지 말아야 한다고요. 심리 치료에서는 자기 보상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데, 많은 사람이 타인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고 우울해하지만 사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가장 가까운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고요.
인간은 마치 식물처럼 사랑을 받지 못하면 시름시름 말라가는 존재지만, 불특정 다수의 과도한 사랑에도,
자기 자신을 향한 과도한 기대에도 시들어 가기 마련입니다. 마라도나가 잘 나갈수록 한편으로는 힘들었을
내면아이 디에고. 천진한 디에고와 악동 마라도나, 그 두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다시 손을 맞잡고
편안하게 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