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소 술은 거의 마시지 않는다. 모임에서는 건배라도 해야 하니 주종불문 한잔 정도 슬쩍 입에 대는 정도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니 대낮부터 술이 땡긴다. 술은 인생에 도움이 되는가? 덴마크 영화 <어나더 라운드>(원제 Drunk)는 이 질문에 답(을 해보려고 노력)하는 영화다.
그 노력에 대한 평가로(?) 지난해 미국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과 영국 아카데미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둘은 이름만 다르지 같은 상이다) 덴마크 주간지 『Weekendavisen』이 “올해 단 한편의 영화만을 봐야 한다면 바로 이 영화”라는 리뷰를 했다고 영화홍보 포스터에는 나와 있는데,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다만 이 영화의 엔딩만큼은 그에 상응하는 평가를 하고 싶다. 달리기에 ‘러너스 하이’(runner’s high)가 있다면 음주에는 ‘드링커스 하이’(drinker’s high)가 있을 테고, 바로 이 영화의 엔딩에서 볼 수 있다. 나도 <어나더 라운드> 엔딩 댄스씬의 주인공처럼만 할 수 있다면 소주 한 병을 들고 병나발이라도 불겠다.
영화는 어디선가 많이 보던 풍경에서 시작한다. 남녀 고등학생 여러 무리가 맥주를 박스째 들고 호숫가를 달리는 경주를 한다. 그냥 달리는 게 아니다. 병나발을 불면서 달리고, 멈춰서서 마시고, 토하면서 마시고, 난리도 아니다. 아니, 덴마크에서도 술을 저렇게 마신단 말이야? 의아해할 무렵이 화면이 갑자기 블랙으로 바뀌면서 다음과 같은 자막이 뜬다.
젊음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꿈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꿈의 내용이다.
(키에르케고르)
인생 일장춘몽이니 마시고 사랑하라는 이야기인가.하고 넘겨짚으며 이야기를 따라가본다. 주인공 마틴(매즈 미켈슨. 65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과 그와 친한 동료들은 고등학교 교사다. 학생들은 말을 안 듣고, 나이는 중년에 접어들었고, 매사 의욕은 떨어졌고, 자신감도 없어졌다. 부부관계도 가정 생활도 별로다. 그럼 어떡하지? 그 중 한 사람이 노르웨이 심리학자 핀 스코르데루의 가설을 실험해보자고 제안한다.
그 가설에 따르면 “인간에게 결핍된 0.05%의 혈중알코올농도를 채워서 유지하면 느긋해지고 음악적이 되며, 개방적이고 대담해진다”는 것이다. 이들이 한 레스토랑에서 포도주와 보드카를 들이키며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알쏭달쏭한 이 가설을 증명해보자며 설왕설래하고 있을 때 의미심장한 음악이 흐른다.
잔을 들이켜라. 너를 기다리는 죽음이 칼을 갈며 문 앞에 서있다. 속 태울 필요 없다. 무덤을 열었던 죽음이 한 해 동안 다시 닫아 둘지도 모르니. 모비츠, 너의 폐가 널 무덤으로 끌고 갈 거다.
그래 마시자.(나도 같은 심정이 된다) 음주측정기까지 동원해 수업 사이 쉬는 시간이면 화장실과 창고 등에 숨어서 알코올을 섭취한 뒤 수업에 들어가는 주인공들. 가르칠 의욕도, 자신감도 없어서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면담 요청까지 받던 따분한 역사 교사 매즈 미켈슨은 적당히 취해서 수업에 들어가자 180도 달라진다. 퀴즈로 시작하는 수업은 활력과 웃음이 넘치고(이 역사 퀴즈 정말 기발하고 깊이도 있다. 직접 확인해보시길) 학생들의 반응도 좋다. 그러나 술이 술을 부른다는 말이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인생이 술술 풀려나가자 이들은 혈중알코올농도를 높이기 시작하는데…
<어나더 라운드>는 청춘(심지어 소년)과 중년을 계속 대비시킨다. 청춘은 탕진할 수 있는 자유이고, 무모함이며, 자신감(또는 객기라고도 부른다)이다. 중년은 절제(를 넘어 무료함)이고 ‘안전빵’(을 넘어 안일함)이며, 무기력이다. 그런데 알코올이 들어가자 중년은 청춘으로 돌아간다. 청춘으로 돌아가자 많은 것들이 해결된다. 잠시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데 있다. 술은 진시황이 찾던 불로장생 약이 아니다. (문제는 술을 마시면 술이 불로장생약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감독 빈터베르그는 ‘어나더 라운드’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영화가 청춘들의 시퀀스로 시작한 건 이유가 있다. 젊었을 때는 시간이 잘 간다.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정도다. 거꾸로 주관적인 시간의 흐름은 느리다. 그리고 혈중재미농도가 높다. 중년부터는 시간이 잘 안 간다. 그런데 주관적인 시간의 흐름은 굉장히 빠르다. 그 시간은 대개는 권태라는 공기로 가득 차 있어 혈중권태농도가 계속 올라간다. 그러니 버티고, 인정하고, 긍정하는 수밖에 없다. 이 영화가 청춘과 중년을 한 시퀀스에서 계속 묶어서 보여주는 것은 인생의 찬란함에는 여러가지 빛깔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앞서도 말했지만 마지막 시퀀스에서 매즈 미켈슨의 음주 댄스 장면은 압권이다. 덴마크 그룹 스칼렛 플레져의 ‘왓 어 라이프’(What a Life)라는 음악에 맞춰 매즈 미켈슨이(어린 시절 기계체조를 배우고 무용수도 했다고 한다) 졸업 축제를 벌이는 청춘들 사이로 막춤인 듯 아닌 듯 술 흐르듯 흐르다 바닷가에 몸을 던지는 장면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리메이크한다고 한다. 가만있어봐. 디카프리오는 어느 영화에선가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는 역할로 나왔던 것 같은데.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였든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였든가.
혈중알콜농도 0.05%는 운전대를 잡았을 때는 실험하지 말자. 면허 정지 수준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인용한 그 심리학자는 영화에 소개된 가설에 대해 노르웨이 국영방송에 나와 가짜뉴스라고 말했다.(AFP통신. 2021.4.26.) ‘한두 잔 마시면 인생이 즐겁고 마치 알코올이 결핍된 채 태어난 것처럼 느낄 수 있다’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맞다. 나는 앞으로도 딱 한두 잔만 마실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