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여 년 밖에 안된 작품이 '무가지보'(無價之寶)라 불릴 만큼 이름 높은 국보가 세한도 말고 또 있을까? 국보 180호인 (문화재청은 앞으로는 국보에 호수를 붙이지 않기로 했다) 완당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가 근 15년 만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어 꼭 한번 직접 보고 싶어 벼르다 주말에 '방역 관람'했다.
세한도 특별전 '한겨울 지나 봄 오듯' 포스터 세한도가 별로 크지 않은 작품임을 알기에 5000원의 입장료를 받으면서 전시를 어떻게 짜임새 있게 꾸밀 수 있을까 우려스러웠지만 세한도와 불이선란도 사실상 추사의 단 두 작품만 가지고도 나름 포만감을 느낄 수 있는 추사 전시였다.
'한겨울 지나 봄 오듯'이라 명명한 전시회 제목과 포스터, (이번 전시를 위해 따로 제작한 듯한) 제목 폰트도 마음에 쏙 들었다. 최근 전시의 흐름을 보면 진품이 없더라도 첨단 디스플레이를 활용한 복제품으로 풍성한 비주얼을 꾸려내는 모습이 눈에 띈다. 지난해 '안녕 인사동'에서 열렸던 르네 마그리트 특별전이 바로 그랬다. 물론 이번 국립중앙박물관에 모습을 드러낸 세한도는 진품이다.
컴컴하니 주의하라는 안내를 받으며 전시장에 들어섰다. 추사가 유배가서 세한도를 그린 제주의 자연을 주제로 한 흑백 동영상 작품 '세한의 시간'을 감상하며 마음을 모노톤으로 가라앉힌 뒤 차례를 기다려 세한도에 다다랐다. '내가 보는 이것이 바로 그 세한도 진품인가' 하며 꿈인가 생신가 그 아취를 느껴보려고 애써봐도 제주에서 서울을 거쳐 중국까지 다녀왔고 심지어 일본에도 건너갔다 온 그 작품 맞나 싶어 여전히 미몽 속을 걷는 듯하다. 그림 자체는 명성에 비해 무척 작고 소박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시대를 넘어 바이럴되는 이 작품의 생명력은 무엇일까, 그림 옆의 긴 발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당이 세한도를 그렸던 연유와 만난다. 발문 해석을 보니 김정희 선생으로부터 세한도를 받아 이 그림의 최초 소유주가 된 추사의 제자 이상적은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 가 있을 동안에도 당시 선진국이었던 중국의 최신 서적들을 어렵게 구해 스승에게 배송했다고 한다. 이른바 끈 떨어진 스승에게도 제자로서 인간관계의 도를 다한 것이다.
이런 이상적에게 그림을 그려주며 추사는 공자를 인용해 세한도 발문에 쓴다.
"공자께서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서야 시든다는 걸 알게 된다' (子曰 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也)고 하셨네. 송백은 본디 사철 푸르러 세한 이전에도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송백인데 성인께서는 특별히 세한 이후를 칭찬하셨네. 자네는 내게 (유배) 전이라고 더해준 것이 없고 (유배) 후라고 덜 해준 것도 없네" ...(후략)
아 그랬구나...추사가 세한도를 그린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구나. 나는 스승 유배 전이나 후, 앞이나 뒤에서 달라진 것이 없었다는 이상적의 이상적(理想的) 인간 경지에 찬탄한다. 더한 것도 없고 덜한 것도 없는, 상황과 처지에 관계없는 스승과 제자의 웅숭깊은 품행이 세한도의 문향(文香)과 묵향(墨香)을 끝없이 퍼트려왔으리라. 사회 생활을 어느 정도 해본 사람이면 마음은 있어도 이러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얼마 전 한 신문에 실린 좀 독특한 부고 칼럼(?)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한겨레 신문 '가신 이의 발자취'란 코너에 실린 '분당 장내과 장청순 원장님을 기리며'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56년 동안 성남 지역에서 진료해오다 코로나에 감염된 줄 모르고 내원한 환자에게 감염돼 입원치료 중 숨진 87세 장청순 의사에 대한 동네 주민의 추모글이었다.
딸에 의하면 병원과 집이 붙어있던 곳에 살 때는 "새벽 한 시에도 환자가 문을 두드리면 병원 문을 열었다"는 장 원장은 낡고 오래된 병원이라 환자가 많지 않았지만 오전 9시면 어김없이 정갈한 모습으로 환자를 맞았고 '빈틈 없이 진료하고 잉여 없이 처방했다'고 한다. 5년 단골이었던 글쓴이는 이렇게 회고했다.
'꼭 필요한 말만 했고 과한 친절도 없었다'.
세상사가 번잡스러워지면서 영혼은 딴데 있는데 목소리만 친절한 0과 1같은 문구의 뻔한 친절을 못 견뎌하는 비뚤어진 내 마음은 딱 장 원장님 같은 태도가 부럽다. 또 이상적 선생 같은 태도를 지니고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잘 나간다고 잘 하지도, 못 나간다고 못하지도 않고, 쌀쌀맞지 않지만 과한 친절이나 과한 겸양도 없이 그저 제 생겨먹은 그 모습대로 흔들리지 말고 살아보자고... 나이를 먹을수록, 아니 나이를 먹어도 인간관계는 어렵다.
추사는 세한도의 발문 앞머리에는 완당이라는 인장을 찍고 마지막에는 '장무상망' 네 글자 인장을 찍는다. 인장이란 자신의 호나 이름만을 새겨 찍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 추사는 다양한 짧은 문장을 담은 인장을 사랑했다. 네 글자 그 단순화한 표의 문자가 풍기는 말뜻의 아름다움이란. '장무상망'(長毋相忘) "우리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게나" 17년의 나이 차와, 처지와, 시공간을 뛰어넘어 지금까지 살아남은 두 사람의 우정과 예술작품의 생명력이 벌써부터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이번에 세한도를 국가에 기증한 손창근 선생에게 감사드린다.
(※ 김정희 선생은 호가 1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 글에서는 대표적인 호인 추사와 완당을 그때그때 섞어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