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산 자락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피크닉(Piknic)은 특히 젊은 층이 많이 찾는 힙한 공간이다. 갤러리, 카페, 아트숍 등이 70년대 후반에 지어진 벽돌 건물 안에 층층이 자리 잡고 있다. 빈티지한 느낌 가득한 이 공간은 원래 한 제약회사 사옥이었다. 건물 안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면 대리석 바닥과 나무로 만든 난간 손잡이, 군더더기 없는 창문 등에서 정직하고 클래식한 멋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열리고 있는 사진전 《사울 레이터: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은 휴일이면 예약한 사람도 대기했다 들어갈 정도로 인기다.
사울 레이터(1923-2013)는 흑백사진이 대접받던 시대에(이런 시절이 있었고, 지금까지도 이 유산은 어느 정도 남아있다. 문화는 끈질긴 것이다) 컬러 사진의 아름다움을 선구적으로 표현한 작가로, 이번이 한국에서 그의 첫 번째 전시다. 지난해 12월 사진전 개막과 비슷한 즈음에 말년(末年)의 사울 레이터를 인터뷰한 다큐멘터리 영화 《사울 레이터: 인 노 그레이트 허리(In No Great Hurry)》도 개봉했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 2주 전에는 사울 레이터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토드 헤인즈 감독의 걸작 《캐롤》도 재개봉해 현재 상영 중이다.
최근에는 사진전이 과거보다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같은데, 특히 요시고 사진전, 우연히 웨스앤더슨전처럼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좋은 사진전마다 코로나 시대에 걸맞지 않게 문전성시다. 전에는 매그넘 사진전, AP
사진전, 퓰리처상 사진전처럼 주로 보도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사진전처럼 전쟁이나 사회, 대자연을 찍은 전시가 인기를 얻고 사진의 매력을 일깨웠다면, 최근에는 소셜미디어에 공유하기 좋은 인스타그래머블한 사진전들이 인기인 것이다. 그런데 사울 레이터의 사진은 요시고나 웨스앤더슨류(웨스앤더슨이 사진작가는 아니니까) 사진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쨍하게 컬러풀하고 아이스크림처럼 예쁜 사진이 아니라 아마추어가 찍어놓은 사진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희미하고 안개 같은 사진들이 피크닉의 3개층에 걸쳐 전시되고 있다.
둘러보니 전시회를 보기 전의 나 같으면 90%는 갤러리에서 삭제했을 것 같은 사진들이다. 피사체가 너무 작게 나와서, 난간·우산·차양·자동차 등 다른 물체에 가려서, 초점이 잘 안 맞아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찍어서 흐릿해서 등등의 이유로 찍은 뒤 바로 지웠거나, 아예 찍지도 않았을 사진들이다. 그런데 천천히 그리고 찬찬히 사울 레이터의 사진들을 둘러보고 나니, 왜 나는 그동안 찍고자 하는 피사체가 구도상 적절한 지점에 있지 않거나 뚜렷하게 나오지 않았으면 잘못 찍었다고만 생각했는지 자신이 한심해 보일 지경이었다.
흐릿함 속에 흥미진진함이 있었다. 사울 레이터는 피사체의 일부를 가림으로써, 흐릿하게 찍음으로써, 프레임 귀퉁이에 겨우 보일 정도로 작게 찍음으로써, 오히려 피사체를 주목하게 하는 새로운 경지의 소박한 사진을 찍었다. 그는 말했다.
"나에겐 유명한 사람들 사진보다 빗방울 맺힌 유리창이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2008년 SK브로드밴드 광고 음악으로 쓰여 인기를 끌었던 W&Whale의 노래 〈R.P.P 샤인〉 가사 중에는 "
지루하게 선명하기보다는 흐릿해도 흥미롭게"라는 대목이 있다.
건조한 눈빛 쓰디쓴 그대의 혀 항상 말만 앞서고 행동하진 못해
나는 좀처럼 스스로 판단할 수 없어 필요한 건 rocket punch
때론 나 대신 싸워주는 로봇 그건 말도 안 되는 만화 속 이야기
너의 어깨가 부서져라 부딪혀야 해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지 마 rocket punch generation
지루하게 선명하기보다는 흐릿해도 흥미롭게 you have to cha cha cha change yourself
이 가사를 처음 들었을 때도 무릎을 치긴 했지만, '지루하게 선명하기보다는 흐릿해도 흥미롭게'라는 개념이 머릿속을 떠돌 뿐 시각적으로 그려지지는 않았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을 보면서 비로소 깨닫는다. 나는 선명하지만 지루한 사진을 찍고 있고, 사울 레이터는 흐릿하지만 흥미로운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인지 이번 전시는 보면 볼수록 그 흐릿함의 내막과 무엇인가에 가려져있는 피사체의 일부분을 상상으로 메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 결과, 사울 레이터의 사진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다른 사진전보다 더 감상자를 사진 속으로 뛰어들게 한다.
50년 이상 뉴욕의 일상을 무심한 듯 컬러 필름에 담아온 사울 레이터는 80대에 이르러서야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 영화 속 사울 레이터는 명성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투다. 왜 귀찮게 나를 찍느냐, 난 할 얘기 없으니 내버려 두라고 할 정도로. 사울 레이터는 그저 자기가 좋아서 사진을 찍고 거기에 만족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50년대 후반부터 80년대까지 그가 생계를 위해 찍은 『하퍼스 바자』, 『보그』 등 패션지의 사진에서도 톱 모델조차 대상을 감추거나 흐리는 그만의 기법을 완벽하게 피해나갈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울 레이터를 오마주한 영화 《캐롤》이 재개봉한 건 6년 만이다. 2016년 겨울에 처음 개봉했던 《캐롤》은 지난 1월 27일 재개봉하며 2월 11일 현재 일별 박스오피스 22위에 올라있다. 첫 개봉 때부터 지금까지 누적 35만 4천여 명이 관람했다. 예술영화치고는 정말 많은 관객이 봤다. 《캐롤》은 2015년 BBC가 선정한 21세기 100대 영화에 들었고(BBC가 왜 이런 걸 뽑는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2017년 영국영화협회가 30주년을 맞이하여 영화평론가와 감독 등 100명에게 물어 선정한 역대 최고의 LGBT영화 1위에 올랐다. (왕가위의 《해피투게더》가 3위에 머문 것은 유감이다)
영화 내용이야 사울 레이터의 사진과는 상관이 없겠지만, 요즘은 거의 안 쓰는 슈퍼 16mm 필름으로 찍은 거친 입자와 독특한 색감, 뭔가를 앞에 걸고 피사체를 찍은 미장센 등은 《캐롤》의 명성이 사울 레이터에 크게 빚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특히 우중(雨中) 택시 차창에 흐릿하게 어린 여주인공의 표정을 보여주는 씬이 카터 버웰의 오리지널 스코어와 함께 아스라이 기억에 남는다. 때로는 흐릿한 것이 흥미로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