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나는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어요"
부제목을 보고 오해했으면 미안하다. 이것은 남자의 이야기다. 아니다, 여자의 이야기다. 아니다. 그냥, 어느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의 이름은 모어. MORE. 털 난 물고기 毛魚다. 그는 드랙아티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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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부서 사람은 아닙니다만…" 라든가, 또는 "저는 그 일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라고 굳이 밝힌 뒤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왠지 구차스런 일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 사족이 없어도 내 의견이 명제로서 성립한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저도 구차함을 무릅써 보려고 합니다. 저는 트랜스젠더와 관련해 어느 쪽도 아닙니다(정확히 말해서, 어느 쪽이라고 말할 수준이 못됩니다). 그저 '세상에는 나와는 다른 사람이 있고 그 사실과 존재가 나에게 불편과 위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난 오케이' 딱 그 정도 수준입니다.
인생은 쇼, 내 이름은 '모어'
그리하여 저는, 우리는, 이 영화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어." 주인공 모어는 드랙퀸이고(여성의 젠더 특성을 공연하는 남성. 영화와 뮤지컬로 유명한 "헤드윅", 천만영화 "왕의 남자"에서 이준기가 연기했던 '공길', 천 카이거의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패왕별희"에서 장국영이 맡았던 '두지'역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발레리나이며, 뮤지컬 배우이고, 최근 에세이집을 펴낸 저자입니다. 1978년 전남 무안에서 남성으로 태어난 모어(모지민)는 어려서부터 '끼순이'였습니다. 국민체조를 발레처럼 해서 중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지민아, 너는 발레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깬 교사셨네요) 목포예고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발레를 전공했습니다. 하지만 두 갈래 젠더 구분을 당연히 여기는 사회에서 유년기부터 당한 따돌림과 폭력은 미래의 예술가들이 모인 한예종에서도 이어졌고, 군대에 가서 커밍아웃한 뒤에는 '정신질환자'로 격리되기에 이릅니다. (영화를 보면 그는 아주 멀쩡합니다) 하지만 모어는 자신의 '끼'(정체성이란 말 대신에 사용합니다)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2000년 이태원 클럽 '트랜스'에서 드랙쇼를 시작한 모어는 이후로 20여 년 동안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쇼를 펼칩니다. 드랙쇼지만, 그의 섬세하면서도 강인한 근육은 남성과 여성의 경계에서 드라마틱하게 아름답습니다. 40대 중반에 이르는 동안 모어는 드랙쇼, 뮤지컬, 광고, 연극 등 다양한 장르에서 끼를 발산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외로웠을 것이고 지금도 외로울 겁니다. 그에게 버팀목은 혈연으로 만난 가족과 인연으로 만난 남편이었습니다. 평생 농부였던 연로한 모어의 아버지는 영화 내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벽안의 서양인 남편을 데려와도 말이 없습니다. 솔직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아들이 발레리나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어려운 형편에 빚까지 내서 백만 원 짜리 발레복을 사줬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제는 쇠약해진 아버지가 말없이 스크린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관객은 모어의 유년기와 청년기, 그리고 중년까지의 세월을 부자간 침묵의 공기를 통해 읽어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모어"는 독립예술영화입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하지만 일본 내 혐한시위에 맞서는 시민 조직을 그린 전작 "카운터스"(2017)에서 보여줬듯이 이일하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는 극영화 못지않은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본디 다큐멘터리의 힘은 축적된 시간에서 나옵니다. 다큐멘터리에 아카이브 사진이나 영상이 많이 등장하는 건 그 때문입니다. 과거 사진이나 영상으로 퇴적된 시간은 진실의 가능성을 농후하게 잉태합니다. 사실(fact)은 시간의 풍화로 외려 또렷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제작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거꾸로 이것은 다큐멘터리 제작의 제약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창작에 의한, 다시 말해 허구적 상상력에 기초한 극 영화는 프리 프로덕션 기간을 빼면 크랭크인에서 크랭크업까지 수십 회차 안팎의 촬영으로 마무리되지만 다큐멘터리 영화는 일반적으로 그 정도 기간과 촬영 회차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특히 인물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는 짧게는 수 년, 때로는 수십 년의 제작 기간을 넘어가기 예사입니다. 정현종 시인은 일찍이 '방문객'이란 시에서 노래했죠.
"사람이 온다는 건 /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그는 / 그의 과거와 / 현재와 /
그리고 /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헤드윅'을 만나다
"모어"도 수년의 제작 기간이 소요됐지만, 소수자인 모어의 과거 기록이 많이 남아있을 리가 없겠죠. 감독은 통상적인 휴먼 다큐멘터리 제작 방식을 뼈대로 하되 모어의 특기를 살려 뮤지컬과 뮤직비디오 형식의 상징적인 장면들로 시퀀스의 상당 부분을 채워 나갑니다. 전국의 산과 들, 바다 그리고 도시와 시골 곳곳에서 촬영한 이미지 컷과 모어가 등장하는 상징적인 연출 장면들은 상당히 영화적입니다. 행운도 뒤따랐습니다. 영화 "헤드윅"을 쓰고, 연출하고, 주연한 전설적인 드랙퀸 스타, 존 카메룬 미첼을 영화에 출연시킨 겁니다. 2018년 한국에 공연왔던 그를 "프레임 안에 모어와 같이 잡힌 한 장면이라도 건져보자'고 감독과 모어가 무작정 찾아갔는데, 모어를 본 존 카메룬 미첼이 촬영을 허락하는 것은 물론 모어가 뉴욕으로 공연을 갔을 때 자신의 집에서 만나 함께 대화를 나누고 촬영도 할 수 있게 해줬습니다. 뉴욕의 집에서 존 카메룬 미첼이 모어에게 해준 말이 잊히지 않습니다.
"지루하고, 완고하고, 불행한 사람에서 벗어나 네 자신이 되는 것은 때론 이기적으로 보이기도 하겠지. 창의성과 상상력은 음식같은 거야. 꼭 필요해. 아니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창의력과 상상력을 감히 음식에 비유하다니요. 창의성과 상상력이, 그저 있으면 좋은 게 아니라 밥과 같은 거라니요. 미첼이 말하는 창의성과 상상력은 비즈니스와 엔터테인먼트 상품 만드는 데 필요한 그런 것만은 아닐 겁니다. 인간에겐 누구나 창의성과 상상력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세상은 밥만 먹여줬지, 창의성과 상상력은 빼앗는 방향으로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맨날 창의성을 부르짖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창의성 없고 상상력이 부족한지를 보여주지요.
영화 "모어"는 다큐멘터리 하면 떠오르는 경직된 형식에서 벗어나 즐겁고 유쾌하게 볼 수 있는, 창의성이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또 지난해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음반상과 최우수 포크 음반상을 수상한 이랑의 노래들이 적재적소에서 흘러나옵니다. '너의 리듬'(2015), '좋은 소식 나쁜 소식(2016)', '가족을 찾아서(2016)' 같은 곡들이죠. 영화를 보며 가사를 잘 음미해보시길 바랍니다. 민해경의 '서기 2000년(1982)', 한영애의 '조율(1992)', 이상은의 '담다디(1988)' 등 80년대 가요 명곡들도 곳곳에 포진해 귀를 즐겁게 합니다. 이 음악들에 맞춰 춤을 추거나 연기하는 모어의 모습은 무척 잘 어울려서 이 곡들이 마치 영화를 위해 작사작곡된 오리지널 스코어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모어"를 '퀴어영화'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성장담'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붙일 필요도요.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모든 게 다 진실이라고 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모어의 말대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제가 솔직하다고 말씀을 하는데, 저는 그렇지 못했는데 '솔직하다'라고 말씀을 하니 자문을 했죠. 정말 내가 솔직하게 말을 했는가? (영화에) 담았는가? 상처받은 사람들은 위험하고, 그들은 생존하는 법을 압니다. 그래서 저의 상처가 있고 제가 생존하는 법을 이 영화에서 볼 수가 있고, 그 상처와 생존을 향한 '필사력'을 관객분들이 다 하나하나 느끼고 어떤 순간은 즐거워하고 어떤 순간에는 슬퍼하고 그렇게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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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딱 그랬다. 어떤 순간에는 즐거웠고 어떤 순간에는 슬펐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깨달았다. 나의 시야가 적어도 손톱만큼은 넓어졌다는 걸. "모어"는 23일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