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오후 3시,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점 20관. 영화 시작을 앞두고 380여 석의 상영관은 관객으로 가득 찼다. 특히 앞줄은 젊은 여성관객들의 차지였다. 사회자가 외쳤다. “추.앙.의 마음을 담은 큰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구씨’ 손석구를 필두로 최귀화, 박지환, 그리고 마동석이 등장했다. 마이크를 잡은 마동석이 말했다. “범죄도시2에서 염미정 역할을 맡은 배우 마동석입니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마동석의 이런 유머는 범죄도시 프랜차이즈의 핵심 요소 중 하나다. “범죄도시” 1편의 마지막 화장실 격투씬에서는 악당 장첸이 형사 마석도에게 “혼자냐?”고 묻는다. 마석도는 능청스럽게 답한다. “응, 나 싱글이야.” 2편의 마지막 버스 격투씬에서도 악당 강해상과 마석도가 주고 받는 대사가 1편을 뛰어넘는 마동석식 유머의 진수를 보여준다.
4일은 “범죄도시2”가 누적관객 830만 명을 넘어서는 날이었다. 언론 인터뷰에 잘 나서지 않는 마동석과 주조연 배우들은 하루 종일 서울 시내 곳곳의 극장에서 무대인사를 돌았다. 그리고 딱 일주일 뒤인 바로 어제 “범죄도시2”는 1000만 영화 반열에 올랐다. 코로나 대유행 이후 첫 번째 1000만 영화이자, 역대 20번째 천만 한국영화이다.
‘코로나 이후에도 천만영화가 나올 수 있을까?’ 당장은 어렵고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영화계 내에서조차 이제는 천만영화의 시대로 다시 돌아가기는 어려우니 다른 활로를 찾아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았다. “오징어게임” 등 스트리밍 서비스의 약진과 사회적 거리두기로 관객의 영화 ‘관람’ 습관이 집안 ‘시청’ 습관으로 바뀌었을 거란 분석에 바탕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2주 후 개봉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도 초반 기세는 등등했지만 관객 580만에 머무르고 있다. 그런데 마동석 ‘빅펀치’(마동석이 만든 제작사 이름이기도 하다)가 천만 영화의 벽을 한방에 무너뜨렸다.
'아트박스 사장'에서 형사 '마석도'까지
마동석의 첫 번째 천만영화는 “부산행”(2016)이지만 그가 내 머릿속에 각인된 건 “베테랑(2015)”에서였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트박스 사장으로 잠깐 등장했을 뿐인데, 대번에 존재감을 드러낸 그야말로 씬스틸러였다. 카메오로 출연한 “베테랑”은 빼고 마동석은 지금까지 모두 4편의 천만 영화에 출연했다. “부산행”(2016), “신과 함께-죄와 벌”(2017), “신과 함께-인과 연”(2018), 그리고 “범죄도시2”이다. 이른바 ‘원톱 주연’으로는 “범죄도시2”가 처음이다. “범죄도시2”가 과연 몇 만 관객까지 동원할지는 알 수 없다.(상영관 쪽에 달려있다) 6월에만 “브로커”, ”마녀2”, “헤어질 결심” 등 한국 영화와 “탑건: 매버릭”, “버즈 라이트 이어” 등 외화 화제작들이 줄줄이 몰려있기 때문이다. 역대 한국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약 1760만 명이 들었던 “명량”(2014)이다.
한국 천만영화의 역사는 2003년 강우석 감독 ⋅ 설경구 주연의 “실미도”에서 시작한다. “관객이 1000만 명이 들었다구? 그게 가능한 얘기야?” 그때만 해도 1000만이란 숫자는 체감이 잘 안되는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국민 5명 중 1명 꼴로 봤다니, 솔직히 지금도 잘 실감나지 않는 수치이기는 하다) 그런데 한번 둑이 무너지자 이듬해인 2004년부터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 이준익의 감독의 “왕의 남자”(2005),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 등 3년 연속으로 천만영화가 나왔다. 이후 5년 동안은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2009) 한 편만 천만영화를 기록했다가 2012년 “도둑들”과 “광해-왕이 된 남자”가 동시에 천만영화에 도달한 이후 2013년 “7번방의 선물”, “변호인” 2014년 “명량”과 “국제시장” 2015년 “암살”, “베테랑” 등 4년 연속으로 매해 2편씩의 천만 한국 영화가 나왔다. 그 어렵다는 천만영화를 두 번이나 기록한 감독들도 있는데, 봉준호(“괴물” 2006, “기생충” 2019), 최동훈(“도둑들” 2012, “암살” 2015), 윤제균(“해운대” 2009, “국제시장” 2014), 김용화(“신과 함께-죄와 벌” 2017, “신과 함께-인과 연” 2018)가 바로 그들이다. 이중에서도 봉준호 감독은 예술성과 대중성 모두를 잡는다는 측면에서 그야말로 탁월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천만영화'의 배경
천만영화가 나온 배경에는 복합상영관(멀티플렉스)의 도입이라는 산업적 배경이 있다. 복합상영관은 1998년 ‘CGV 강변11’가 개관하면서 출발한다. 이후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이 합류하면서 복합상영관은 한국 영화 시장을 거의 장악했다. 2021년 현재 전국 극장 542개 중 81%인 440개 극장이 멀티플렉스이고, 전국 3254개 스크린 중 94%인 3060개를 멀티플렉스가 보유하고 있다. 전체 극장 매출액 대비 멀티플렉스 매출 점유율은 95.3%에 이른다. 한꺼번에 엄청난 스크린에서 틀어 수익을 올리고 한 달 정도 지나면 손 털고 나가는 것이 천만영화의 배경 중 하나다. 제대로 된 관객 수 통계를 구할 수 있는 2005년 이후부터 좀 더 들여다보자. 2009년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이 1,154개의 스크린을 차지하기 전까지는 흥행 영화도 평균 541개의 스크린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트랜스포머” 이후 이른바 ‘와이드 릴리즈’ 현상은 심화됐다. 2013년 “7번 방의 선물”과 “변호인”(두 편 다 대기업 계열사가 아닌 NEW에서 배급) 2편만 빼면 2012년 이후 천만영화는 개봉 시 1000개 이상의 스크린을 확보한 영화에서만 나오고 있다. (500개 미만의 스크린으로 천만 영화에 등극한 영화는 2005년 개봉한 “왕의 남자”가 유일) 그런데 2017년 CJ가 투자배급한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는 스크린 독과점 논란을 크게 일으켰다. 전국 2575개 스크린 가운데 2027개 스크린에서 “군함도”를 상영했던 것이다. 개봉일에 한 영화의 스크린 수가 2000개를 넘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어떨까. “범죄도시2”는 개봉일에 2200여 개의 스크린으로 시작해 개봉 5일 째에는 2496개를 찍었다. 2주차에는 매일 2300개 이상의 스크린을 확보했고, 3주차에도 1300개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관객 천만 명을 돌파한 어제도 1500개 이상의 스크린에서 “범죄도시2”를 상영했다. 하지만 코로나 여파로 불과 두어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극장가가 ‘업(業)의 존폐’를 걱정해야 했던 상황까지 갔던 터라 아직까지 큰 독과점 논란은 벌어지지 않고 있다. 산업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독과점의 폐해는 크다. 문화산업에서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지금은 오랜 병마에서 깨어난 환자처럼 회복이 필요한 시간이라 극장업계를 이해하는 시선이 지배적이지만, 어느 시점이 지나서도 상영관 싹쓸이가 계속되면 중소 규모 영화와 독립예술영화계의 반발을 부를 것이다. 우선은 지금처럼 관객들의 발길이 극장가로 계속 이어져 한국영화계 전체가 선순환 구조를 회복할지가 관심사이긴 하다. (제발 ‘보복관람’이란 말 좀 쓰지 말자. 보복은 다 알다시피 이런데 쓰는 말이 아니다)
사실 마동석은 그냥 강력반 형사가 아니라 슈퍼히어로에 가깝다. 관객들은 마석도가 크게 당할까봐 걱정하지 않는다. 그가 어떻게 악당을 통쾌하게 두들겨 패고 한방의 위력을 과시하느냐를 보러 간다. 영화는 꿈의 공장이고, 사람들은 마동석같은 ‘주먹대장’ 슈퍼히어로를 원한다. 관객들에게만 영화가 꿈의 공장은 아니다. 사행산업에 가까운 쇼비즈니스에 뛰어든 제작자와 투자자들에게도 영화는 어지간히 투자해 엄청 버는 꿈의 공장이다. 마동석은 이번 영화에서 제작을 겸했다. 영화가 스크린에서 내려오면 투자 수익을 나눠 가진다는 얘기다. 관객 입장료 수입 중 극장에 떼어 주고 남은 수익은 보통 투자사와 제작사가 6대 4의 비율로 나눠 갖는다. “범죄도시2”의 매출은 1000억 원이 넘었다. (영화진흥위원회 통계 기준) “범죄도시2”는 코로나 발생으로 업계가 위축됐을 시점인 2020년 4월 크랭크인 했다. 마동석은 “범죄도시2”를 만들기 전에도 이렇게 말했을까? “괜찮아. 형은 다 알 수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