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ditor M Jul 08. 2022

브로커, 감독과 배우의 이야기

"판단은 판사가 하고 변명은 변호사가 하고 용서는 목사가 하고 형사는 무조건 잡는 거야."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우형사-박중훈 분)

"느낌 오지? 이 XX 잡아야 되는 거. 사람 죽인 놈 잡는 데 이유가 어딨어? 나쁜 놈은 그냥 잡는 거야" ("범죄도시" 마석도-마동석 분)


     한국 형사영화의 클래식 가운데 하나인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박중훈이 내뱉는 대사나, 새로운 클래식으로 등극할 것으로 보이는 "범죄도시2"에서 마동석이 던지는 대사나, 주인공 형사가 직업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대사는 상투적인 데가 있습니다. 이것 저것 생각하지 않고 일단 잡는다는 거지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에 나오는 형사 배두나는 한국 장르영화에서 보던 전형적인 형사와는 다른 스타일의 형사지만(게다가 강력반도 아닙니다) 그도 일단은 현장을 덮쳐 브로커인 송강호와 강동원을 잡는데 최우선 목표를 둡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형사가 꽤 비중 있게 나온다고 해서 "브로커"를 형사물로 분류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장르명은 역시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입니다. 카트린느 드뇌브, 줄리엣 비노쉬같은 외국 배우(일본 입장에서 볼 때는)들이 나왔던 고레에다 감독의 전작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도 결국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쯤이면 이런 생각이 들죠. '프랑스의 대스타들이 나와도 결국 이것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로군.'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브로커" (제공:영화사 집)

한국 영화, 변방에서 중심으로   

고레에다 감독과 칸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송강호, 강동원, 이지은 배우 등 "브로커" 제작진이 칸에서 귀국하자마자 바로 다음 날부터 인터뷰장에 나왔습니다. 개봉이 코앞이라 어쩔 수 없었겠지요. 인터뷰에서 만난 이들은 처음에는 다들 조금씩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이지은 씨는 "칸에서 정신없이 바빠 밥 먹을 시간, 잠 잘 시간도 부족할 정도로 빠듯한 일정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배우나 감독도 대개는 함께 다녔을테니 비슷한 사정이었겠지요.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는데(세상에 제일 쓸데없이 것이 연예인 걱정이라고 했는데…), 사실 매번 비슷한 질문에 비슷한 대답을 하는 것도 고역일 겁니다. 기자들은 기자들대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으니 질문이 핵심으로 들어가기 어렵고, 배우들은 배우들대로 한정된 시간에 오해와 문제의 소지가 없는 답변을 해야 하니 사실 유명 배우와의 공동 인터뷰는 겉돌기 쉬운 시스템에서 이뤄집니다. 그래도 주어진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았습니다. 배우는 역시 배우 인지라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힘을 내서 답해주었습니다. 송강호 배우는 한국에서 가장 칸 경험이 많은 배우입니다. 그에게는 칸에서 한국 영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대해 정.확.하.게. 듣고 싶었습니다.


"제가 칸을 처음 간 게 15년 전인 2007년 "밀양"이라는 작품을 했을 때였습니다. 그때 전도연 씨가 여우주연상을 받았죠. 그때만 해도 한국 영화에 대한 세계 영화계의 시선은 '변방의 나라에서도 이렇게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구나'하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이후 한국 영화가 저력을 차곡차곡 쌓아오다가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기생충" 이후 3년 만에 다시 가본 건데, 이번에는 과장을 조금 섞어 말씀드린다면, 한국 콘텐츠가 정말 세계 문화의 주류가 된 것 같은 뿌듯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인터뷰 중인 배우 송강호

- 어떤 때 그런 걸 가장 많이 느끼셨어요?

= 숙소를 나서면 제가 나서지 못할 정도로 많은 분들이 알아봐 주시고 사진도 찍고 싸인도 받고… 그 자체가 '아, 한국 배우와 감독들에 대한 시선들이 예전의 변방에서 온 나라를 대하는 느낌이 아니고, 할리우드와 같은 주류의 문화 강국에서 왔다. 그리고 그 콘텐츠에 대해 세계가 감탄하고 찬사를 보내고 있다' 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전달을 받죠."


칸이 왜 세계 최고의 영화제일까

송강호 씨는 수염을 길러서 인지 특히 더 피곤해 보였지만 인터뷰가 전개되자 힘을 내는 듯 했고 어떤 순간에는 마치 영화 속에서 툭 튀어나온 것처럼 송강호 특유의 대사 톤과 억양으로 답해 재미있었습니다. (배우 경력이 오래되면 내가 배우인지, 배우가 나인지 헷갈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송강호 배우에게 진짜 묻고 싶은 것 중 하나는 심사 과정이었습니다. 지난해 경쟁 부문 심사위원도 했으니까,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심사 과정을 제가 여기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단호하게 답하면서도 송강호 씨는 덧붙였습니다. "가끔 생각해봅니다. 칸 영화제가 왜 세계 최고의 영화제이고, 저 권위를 이룰 수 있었을까? 그게 심사하는 과정에 다 들어갑니다."


- 만장일치제? 또는 다수결? 어떤 시스템인가요?

=한 표차로 결정되는 경우도 있고 만장일치도 있고요. "기생충"같은 경우는 아주 드물게 영광스럽게도 만장일치로 황금종려상이 주어졌고요."

-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권위 있는 절차를 거쳐 선정된다는 말씀인 거죠?

=칸이 정치적이라는 말씀들 하시는데 상식적으로 정치적이었다면 칸 영화제가 75년 동안 이런 권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칸 영화제의 심사과정에 정치적 고려는 없다는 송강호 씨 얘기가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올해 같은 경우 심사위원장인 프랑스 배우 뱅상 랭동을 포함한 9명의 예술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한다는 것도 말이 안되고요. 하지만 이 심사위원들을 선정한 것도 칸 영화제이고, 전세계에서 몰려든 엄청난 수의 영화 중에 21편 경쟁부문 진출작을 선정한 것도 칸이기 때문에 그 자체에 정치적 또는 정무적 고려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고, 또 칸 나름의 기준과 선호에 따른 고려는 분명히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송강호 씨는 시상식장에서 호명되기 전까지는 무슨 상을 받을지, 아무 상도 못 받을지 전혀 알 수 없다고 전했습니다. 시상식 당일, 심사위원들은 아침 8시쯤 휴대폰을 다 제출했다가 오후 5시 극장에 들어서서야 받을 정도로 보안이 철저하다고 합니다.


"폐막식에 참석하라는 전화가 가장 중요해요. 그게 시상식 당일 12시 반에서 늦어도 12시 45분까지는 오게 돼 있는데 그 시간이 지나면 그냥 다음날 조용히 있다가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굉장히 잔인하죠. 21편 또는 22편 중에 7편 정도가 폐막식 참석하라는 전화를 받는 거죠. 그 전화가 제일 기쁘고 행복한 순간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휴, 아무 상이라도 좋으니까 폐막식만 좀 참석했으면 하면 그런 마음인데, 그게 해결됐을 때는 다 기분 좋아하고 다 축하해주고 이런 분위기가 되죠."


송강호 배우처럼 칸 경험이 많은 배우와 함께 한다면 같이 간 제작진은 정말 마음 든든할 겁니다. 그런데 그를 "브로커"의 주연으로 낙점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도 칸 경력이라면 만만치 않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로 심사위원상을 받은 데 이어 "어느 가족"(2018)으로 칸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까지 받았으니까요. 배우상까지 더한다면 "아무도 모른다"(2004)로 야기라 유야에게 남우주연상을, 이번에 "브로커"로 송강호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겼습니다.


"NHK가 저를 밀착취재 중입니다"

저는 지난 달 초 "브로커" 제작보고회에 갔다가 우연히 NHK 취재팀과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NHK에서 저녁 7시 반에 방송하는 '클로즈업 현대+'라는 시사 프로그램이었는데요, 한국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고레에다 감독은 일본에서도 유명 감독이니까, 그가 한국 영화를 만들었다니까 화제인 모양이구나'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브로커"가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일본에서 이 영화가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인터뷰 중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NHK가 칸 영화제에도 취재를 오고 '브로커'뿐 아니라 저에 대해서도 지금 밀착 취재를 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한국 영화계가 왕성한 이유에 대해서도 심층보도를 하는 차원에서 취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이 나온 한국영화아카데미하든지 영화진흥위원회라든지 한국영화업계 시스템에 대해서도 함께 취재하고 있습니다. 또 시사 요청이 엄청 나서 시사회를 추가할 정도로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고레에다 감독은 TV 다큐멘터리스트 출신입니다. 스스로도 "내가 말하는 영화 언어는 분명 영화를 모국어로 하는 네이티브 창작자의 언어와는 달리 텔레비젼 방언이 밴 '변칙적인' 언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중. 2017, 바다출판사) 고레에다 감독이 TV 영상 문법과 시사 프로그램 제작에 대한 이해가 깊을 터여서 NHK 취재팀 입장에서는 상당히 좋은 인터뷰이를 만났겠다 싶었습니다.


"눈물 흘린 게 아니라 얼굴 닦은 것"

인터뷰에 나선 "브로커" 제작팀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의외로 제일 쌩쌩해 보였습니다. 귀국도 못한 채 외국에서 하는 인터뷰가 주는 약간의 긴장감 때문이었을까요. 그는 한국 언론 전체를 상대로 한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이 애매하면 질문의 취지를 잘 모르겠다며 다시 질문해줄 것을 요청했고, 질문을 받은 뒤에는 일본인답게 때때로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다 하나하나 답을 내놨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레에다 감독도 웃음을 숨기지 않은 대목이 있었으니… 바로 박찬욱 감독이 수상 소감을 밝힐 때 눈물을 보였다는 기사에 대한 답변이었습니다. 저도 기사를 쓰면서 이 장면을 눈 여겨 봤었는데요 - 이 장면을 잡은 현지의 라이브 진행 PD가 맥락을 잘 이해하고 있고 상당 수준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몇 번을 돌려봐도 눈물을 흘렸다고 하기에는 실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눈가는 벌겋게 충혈돼있고 눈물을 닦는 듯한 포즈를 취해서 뭐라고 써야 할지 고민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일단 '감회에 젖었다'는 애매한 표현을 선택했죠.


이 장면에 대해 고레에다 감독은 "피부에 대면 3도가 내려가는 물티슈로 상기된 얼굴을 닦고 있었다"라며 당시 상황을 정리해주면서 겸연쩍은 듯 웃었습니다. 시상식장이 엄청나게 더웠다고 하네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라는 보도가 나간 걸 듣고는, 사실 오해인 채로 그대로 두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했는데요, 마침 제가 수상 소감을 감동적으로 듣고 있는 상황에서 티슈로 닦았기 때문에 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해를 불러 너무 죄송스럽습니다. 그러나 (수상 소감에) 굉장히 감동 받았습니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 유명 감독들

  카트린느 드뇌브와 줄리엣 비노쉬, 에단 호크 등 톱스타들이 나왔던 전작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을 인상깊게 봤던 터라 왜 외국 배우들과 계속 작업하냐고 물었습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순수하게 이분들과 영화를 함께 만들고 싶다고 느끼는 배우들이 프랑스에 있었고 한국에 있었다" 라고 답했습니다. 일본에는 왜 그런 배우들이 없겠습니까. 저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고레에다 감독이 송강호, 강동원 등과 영화를 함께 찍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만났던 것이 벌써 5,6년 전입니다. 이번에 합류한 이지은(아이유)도 "나의 아저씨"를 보고 감명 받아 캐스팅했다고 하고, 배두나 와는 "공기인형"(2010) 이후 두 번 째 작품입니다. 세계화에 따라 영화 제작의 국가적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는데다가, 재능있는 씨네아스트들에게는 아무래도 기회가 더 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니 평소에 많은 작품을 보는 감독들은 어떤 이야기나 장면을 구성할 때 떠올리는 배우의 폭이 넓어졌을 겁니다. '저 배우라면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다른 예술적 도전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고레에다 감독도 기본적으로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보는 감독 같습니다. "나의 아저씨", "이태원 클라쓰" 등 한국 드라마 시리즈까지 보고 한국 배우를 캐스팅할 정도니까요. 외국 톱스타들과도 작업하는 박찬욱, 봉준호 감독 모두 씨네필이고, 평론가를 했을 정도로 영화를 많이 보며 자라 온 시네마 키드입니다. 영화 역사가 100년을 넘어가면서 수많은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의 영화가 만들어졌고 뼛속까지 영화에 젖어 살아온 사람들이 장르를 충분히 이해하고 바둑 고수들이 기보외듯 앞선 명감독들의 영상 문법을 머리 속에 집어넣어 놓고 거기서 하나하나 꺼내거나 비틀면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75회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작 "브로커"가 드디어 한국에서 시사회를 했습니다. "브로커"는 후반 20-30분에 감독의 에너지가 분출하고 몰아치는 영화라고 느꼈습니다. 그게 장점일지 단점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영화 속에서 아기 엄마인 소영(이지은 분)은 자신이 처지를 이렇게 말하죠. '부산의 한 성매매 여성이 자신의 갓난아기의 친부를 살해하고 도망가다 아기가 방해가 되자 베이비 박스에 버리고 도망하다 잡혔다' 이렇게 한 줄 기사로 정리될 이야기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2시간9분동안 어떻게 풀어놓는지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간 극장에서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탕웨이의 '마침내' 박찬욱의 '동시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