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는 있지만, 그것은 이 세계 안에 있다."
- Y.B.예이츠.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
감독과 배우 사이에는 선후배가 없다?
지난 6월 20일 서울 웨스틴 조선호텔 그랜드 볼룸. 영화 "비상선언" 제작보고회가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긴박감 넘치는 오리지널 스코어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등 주연 배우들이 차례로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한재림 감독님하고 '우아한 세계', '관상'에 이어 세 번째 작품을 하게 됐는데, 기본적으로 한재림 감독님에 대한 신뢰감, 새로운 영화에 대한 집요한 탐구, 이런 점들을 늘 존경해 왔고요"
송강호 배우는 한 감독보다 경력은 물론 나이도 8살이나 많은 영화계 선배인데도 깍듯이 감독님, 감독님 붙여가며 예우했습니다. 한재림 감독보다 각각 5살, 2살 많은 이병헌, 전도연 배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어른들의 세계에서 나이를 막론하고 동료를 존중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송강호 씨는 한재림 감독은 물론 함께 출연한 (후배) 배우들에게도 함께 해서 영광이었고 감사하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사실 영화 제작보고회나 기자간담회를 다녀보면 송강호 배우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배우와 감독들이 서로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시합니다.
그런데, 함께 영화를 찍은 동료나 감독이라고 해서 무조건 진심어린 존경을 표시할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출연할 작품을 고를 때 우선은 이야기를 보고, 다음으로는 감독을 보고 결정한다는 이병헌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한재림 감독님하고 처음 호흡을 같이 해봤는데, 전작(前作)들을 보고서 '꼭 한 번쯤 작품을 함께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시나리오도 단숨에 읽힐 정도로 굉장히 긴장감 있고 재미있었습니다."
전도연 씨도 "아, 내가 마음 놓고 연기를 해도 숙희(국토부장관) 캐릭터를 잘 잡아주시겠구나, 믿고 연기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연기하더라도 감독이 촬영과 편집, 연출을 통해서 배우 자신이 제대로 나올 수 있게 만들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믿음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내가 하는 일의 결과는 사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도 달려있지만 파트너에게 큰 부분을 빚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음(知音)이란 말도 있지요. 자신의 연주를 제대로 들어줄 사람이 없자 거문고 줄을 끊어버릴 정도입니다. 내가 100을 하더라도 그걸 온전히 또는 그 이상으로 받아줄 사람이 없다면 결과물은 잘해야 70, 80으로 나옵니다.
일은 상대를 보아가며 하는 것
결국 일은 상대를 보아가며 하게 됩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멍석을 깔라는 말도 있습니다. 영화처럼 수백 명의 스태프들이 협업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회 생활, 직장 생활에서 내가 하는 일은 거의 대부분 파트너가 있는 일들입니다. 상대의 퍼포먼스를 알아야 일을 수월하게 할 수 있습니다. 결과는 내 퍼포먼스뿐 아니라 상대의 퍼포먼스가 좌우합니다. 송강호가 아니라 송강호 할아버지를 모셔도 놓아도 감독이 제대로 연출하지 못한다면 그 영화는 망하는 겁니다. 반대로 내가 연기를 조금 못하더라도 감독이 연출을 잘해서 살려 놓을 수도 있습니다. 영화 제작에서 감독이 쓸 수 있는 칼은 여러 개니까요.
그러니까 배우들도 유명 감독과 작업하고 싶어하는 것이고(남의 덕을 보려고) 감독들도 유명 배우들과 작업하고 싶어합니다(마찬가지 이유죠) 감독과 배우의 관계란 네가 살아야 내가 살고 내가 살아야 너도 산다는 공생 관계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상대도 최선을 다하고, 상대방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나도 최선을 다할 마음이 생깁니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인격자들도 있습니다만.
"더킹"에 이어 "비상선언"에서 한재림 감독과 두 번째로 작업한 배우 김소진 씨는 말합니다.
"감독님이 어떤 고민을 갖고 어떻게 작업하시는지 가까이에서 많이 지켜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 안에서 제가 배우로서 할 수 있는 것들을 계속 소통하고 싶었고 그런 노력 안에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찾아갔으면 하는 그런 바람이 있었어요. 배우가 고민하는 지점들에 대해서 감독과 배우가 아니라 동료로서, 같이 창작하는 창작자로서 많은 소통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너 있어 나 있다
나는 어떤 파트너일까요. 나이와 직책을 떠나 같이 고민할 수 있는 동료이자, 자극을 줄 수 있는 창작자일까요. 꼭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찍어야만 창작자는 아니겠죠. 세상 어떤 일에도 창조의 영역은 있으니까요. 2004년 장안의 화제작이었던 "파리의 연인"의 한 대사가 불현듯 떠오르네요. "내 안에 너 있다."
일은 연애가 아닙니다만, 우리 일의 상당 부분은 협업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내 일이 네 일이고 네 일이 내 일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분쟁들은 성과를 분배하는 시스템에 있어 내 일과 네 일을 엄격히 분리시키는 데서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잘 된 것은 오로지 내가 잘한 덕분이니, 너한테는 떨어질 건덕지 하나 없는 시스템이지요. 내가 잘 되면 너도 좋고 네가 좋으면 나도 좋은 건 영화 제작하는 감독과 배우지간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