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1982)”의 ‘비행의 테마’를 들으면 자전거가 숲을 날아오르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죠스(1975)”의 메인 테마가 흘러나오면 상어 등 지느러미가 바다를 조용히 휘저으며 다가오는 오싹한 장면이 생각나고, “시네마천국(1988)” ‘사랑의 테마’는 세월의 무상함에 콧날이 시큰하게 만들죠., “록키(1976)”의 메인테마는 또 어떤가요. 먼동이 틀 무렵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계단을 뛰어오르는 록키 발보아의 모습이 떠오르며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되죠.
때로 청각은 시각보다 기억력이 뛰어납니다. 훌륭한 영화 음악은 우리 마음 속에서 조건반사를 일으키죠. 전설적인 영화음악가 엔니오 모리꼬네(시네마천국), 존 윌리엄스나(E.T., 죠스) 빌 콘티(록키, 49회~80회 아카데미 시상식 중 16차례 음악감독 역임)의 오리지널 스코어 외에도 우리는 많은 영화 음악들을 기억합니다. 특히 비디오와 오디오가 딱 들어맞으면 무적(無敵)이죠. 관객은 무조건 넘어오게 돼 있습니다. 그게 바로 저스틴이 영화음악을 하는 이유입니다.
“영화 음악은 곡을 쓰는 사람들한테는 최고의 플랫폼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오케스트라를 위해서 쓴 곡을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우리 시대 최고의 매체(medium)가 아닌가 싶어요. 혼자 앉아서 교향곡을 쓰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얻고 협업하면서 분명한 목표를 향해서 매진하는 게 제 스타일입니다.”
저스틴 허위츠. 85년생, 존 윌리엄스의 영화 음악을 좋아한다는 그는 이미 30대 초반에 아카데미 음악상과 주제가상을 수상한 전도유망한 영화음악가입니다. 맞습니다. “라라랜드(2016)”의 음악을 그가 맡았었죠. 그렇죠, “탑건:매버릭”의 ‘루스터’ 마일즈 텔러의 출세작 “위플래쉬(2014)”의 음악도 저스틴이 담당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Not quite my tempo!”
“그 때가 아마 2014년이었을 거예요. 감독인 데미언 셔젤과 함께 뉴욕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위플래쉬’가 한국에서 흥행 1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blow our minds) 미국에서도 호평을 받긴 했지만 독립영화라 수익은 별로였거든요. 그래서 굉장히 흥미를 느꼈고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습니다.”
저스틴이 살짝 헷갈린 것 같은데 사실 “위플래쉬”가 한국에서 개봉한 건 미국 개봉 이듬해인 2015년 3월입니다. “위플래쉬”는 그달 3주차에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고 최종 관객수는 164만 명, 음악을 주제로 한 외국 독립영화로서는 대단한 성공이었습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세 번째 방한한 저스틴 허위츠 씨를 만났습니다. 영화제에서 열릴 콘서트를 위해 오케스트라와 연습을 마친 직후였습니다. 새벽에 서울에 도착해 당일 연습, 그리고 다음날인 인터뷰 당일도 7시간 연습, 다소 피곤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건실한 미국 청년’이라는 캐릭터가 있다면 바로 이 사람이었습니다. 피아노로 곡을 쓰다 말고 막 뛰어온 듯한 부스스한 머리, 아무 장식없는 베이직한 검은 색 티셔츠, 귀 기울여 질문을 듣다가 내어 놓는 신중하고도 성실한 답변(태도까지), “라라랜드”로 각광을 받은데 이어 지금은 브래드 피트와 마고 로비 주연의 영화 “바빌론”의 음악을 만들고 있는 유명 영화음악가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털털하고 음악 밖에 모르는 청년처럼 보였습니다.(나이보다 어려보이는 서양인은 처음 봤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 음악은 존 윌리엄스의 “E.T.”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영화를 좋아하셔서 음악을 많이 듣고 자랐는데요, 특히 존 윌리엄스가 만들었던 “E.T.:”, “쥬라기공원”, “인디아나존스”, “스타워즈” 같은 곡들이 마음에 남아서 제가 이 길을 가게 된 것 같아요. 그런 음악들을 통해서 음악의 힘(Power of Music)을 알게 됐지요.”
- 존 윌리엄스 음악 중에서도 딱 한 곡만 꼽는다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아무래도 'E.T.'의 주제곡이라고 해야 할 것 같네요.
이렇게 말하고는 저스틴은 뜻밖에 “스타워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most impressive) 음악을 꼽자면 스타워즈 주제곡인데요. 이 음악은 200년 뒤에 지구가 존재하고 인류가 살아남아 있다면 그때도 사람들이 들을 것 같은 말 그대로 클래식이죠.
그런데 반전이 있었습니다.. 저스틴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믿으실지 모르겠는데 사실 저는 스타워즈를 아직 한 번도 보지 않았어요.”
스타워즈를 한번도 안본 미국인 영화음악감독이라니. 하긴 영화를 보지 않아도 영화 음악을 들을 수는 있으니까요.
“제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곡이 제 최애곡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음악 자체로 볼 때는 너무나 위대하고 대단한 음악이죠. 하지만 개인적인 최애는 역시 이티입니다.”
- 영화에서 음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흠, 너무 포괄적인 질문! 하지만 이렇게 묻고 싶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영화 음악이 하는 역할은 다양하죠.”
저스틴은 크게 두가지를 꼽았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느끼고 있는 감정을 증폭시켜 주기도 하고, 스크린에서 보이지 않는 다른 어떤 것들을 의도적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굉장히 행복해 보이는 장면이지만 슬픈 음악을 깔아서 뭔가 슬픈 앞날을 예견한다든가 보이는 장면 아래에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죠."
“‘라라랜드’에서도 많이 사용된 기법이기도 한데요, ‘라라랜드’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아주 좋을 때도 그 테마곡은 좀 슬픔 음악이 깔리잖아요.(‘미아&세바스찬’ 테마를 들어보시길) 아직 못 보신 분들에겐 스포일러가 되겠지만(설마!) 둘이 결국 이어지지 않은 슬픈 결말을 음악을 통해 암시하고 있죠.”
그리고 저스틴은 덧붙였습니다.
“저는 잘 하지 않지만 훌륭한 영화 음악가 중에는 영화 음악을 아이러니로 멋지게 사용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거라면 유명한 사례가 있지요. 배리 레빈슨 감독의 “굿모닝 베트남(1987)”에서 음악 감독 알렉스 노스(1986년 아카데미 공로상)는 평화로운 베트남 농촌에 미군 헬기가 날고 잠시 후 숲이 불바다가 되는 장면에 루이 암스트롱의 ‘왓 어 원더풀 월드’(What a Wonderful World)를 깔았습니다.
같은 결의 아이러니는 아니지만,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32회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지옥의 묵시록(1979)”에서도 미군 헬기 편대의 병사들이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져대며 평화로운 베트남 마을을 폭격할 때 깔리는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騎行)’이 화면을 압도합니다. (참고로 “지옥의 묵시록”은 칸 황금종려상 수장작 중 역대 글로벌 흥행 4위작입니다. 1위 영화는? 바로 “기생충”입니다)
“오징어게임” 음악 인상적, “기생충”에는 한 표 행사
저스틴이 한국 작품 중 “오징어게임”과 “기생충”의 음악을 인상 깊게 들었다는 기사가 있길래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오징어게임” 음악은 예상을 깨는 요소가 있잖아요. 굉장히 우아하고 클래시컬한 음악이 나오는가 하면 어린이를 연상시키는 밝은 음악이 나오는데 실제로 보여주는 것은 이것보다 더 어두울 수 없는 다크한 내용의 시리즈였고요, 그런 반전이 좋았습니다."
여기까지 얘기한 저스틴은 “기생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대답을 끝냈습니다. 하나를 물어도 서너 개를 답하던 사람이라 의아해서 “기생충”에 대해서는 특별히 할 말이 없냐고 다시 떠보았더니 아까 스타워즈 때의 멋쩍은 미소를 짓더니 말했습니다.
“사실 ‘기생충’의 음악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웃음) 하지만 저요, 아카데미에서 ‘기생충’에 한 표 던졌어요. (저스틴은 아카데미 회원으로 투표권이 있습니다) 그해 가장 좋았던 영화였어요(My favorite movie of the year).” 저스틴의 난데없는 ‘기생충에 아카데미 한 표’ 커밍아웃이 살짝 우습기도, 귀엽기도 했습니다.
콜라보레이션은 저스틴-데미언처럼
저스틴 허위츠를 인터뷰한다니까 영화 좋아하는 한 후배가 물어봐 달라고 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영화 음악 작업할 때 제작의 어느 단계에서 일감을 받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건 협업할 때 아주 중요하고 민감할 수 있는 이슈 가운데 하나입니다. 상대방을 프로로 인정한다면, 프로다운 결과물을 내고 싶다면 다양한 크리에이티브 영역이 가능한한 사전 제작단계에서부터 참여하는 게 좋겠죠. 영화로 치면 연출, 촬영(조명), 미술, 음악, VFX, SFX 등 주요 제작 파트가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협의도 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보통은 영화가 다 만들어진 상태에서 마지막에 음악 감독이 들어와서 곡 작업을 하는데요, 그렇게 개봉하기 두 달 전에 음악 작업을 해야 했다면 지금까지 제가 썼던 음악들을 만들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데미언과는 영화를 준비하기 수년 전부터 계속 대화를 하면서 어떤 음악과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지 얘기해요.”
저스틴 허위츠는 “위플래쉬”, “라라랜드”, “퍼스트맨” 등 지금까지 모든 영화를 데미언 셔젤 감독과 함께 만들었습니다. 그와는 오랜 친구이자 대학 때 룸메이트이기도 합니다. 지음(知音)이지요.
“저와 데미언의 작업실이 나란히 있기 때문에 편집을 하고 곡을 쓰는 과정에서 계속 영화와 음악, 음악과 영화를 왔다 갔다 하면서 맞춰 보기 때문에 나중에 편집 때문에 곡을 잘라야 하거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감독이 편집을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음악을 온전하게 살려주지요. 그만큼 음악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존중하는 감독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데미언 감독과만 작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학교에서 배웠다
저스틴의 음악 인생은 어렸을 때 피아노를 치면서 시작됐습니다.
“부모님이 항상 피아노 연습하라고 얘기 하셨지만 저는 연주 실력이 뛰어나지도, 열정이 있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던 저스틴은 10살 생일에 작곡과 녹음이 가능한 장비를 선물받으면서 달라졌습니다. 부모님이 시키지 않아도, 잠도 안자면서 몇시간이고 집중할 정도로 작곡이 재미있었던 거지요. 어렸을 적에 자신의 재능과 적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인 것 같습니다 저스틴은 대학(하버드)에서 음악 이론을 전공하며 작곡을 공부했습니다.
“대학 가기 전에도 곡을 썼지만 곡을 쓰는 문법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대학에 가서 공부하면서 베토벤이 왜 그렇게 곡을 썼고, 비치보이스가 왜 그렇게 곡을 만들었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됐습니다. 지금도 18살, 대학교 입학했을 때 배웠던 이론들과 지식들을 활용하면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역시 배움이라는 것은 내가 그것을 배워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을 때 얻어지는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파고 들다보면 기본으로 돌아가게 되고, 기본기가 갖춰지면 어느 현장에서나 실무적인 지식과 배움을 구할 수 있지요.
“지금 현재 작업하고 있는 영화 ‘바빌론’은 지금 4개월 째 믹싱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믹싱에 대한 기술적인 건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서 현장에서 배워가고 있는데요, 배울 때마다 점점 더 깊이 알게 되니까 하고 싶은 것들이 더 많아지고 그래서 도저히 작업을 끝낼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마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관계자들과 싸움도 많이 해 가면서요 (웃음)”
타고난 모범생 같은 저스틴이지만 그의 플레이리스트는 뜻밖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굉장히 심오한 취향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도 하는데 사실 저는 운전하면서 당시에 가장 유행하는 팝 음악을 듣습니다. ‘탑 40’ 이런 거 듣고요. 그런 곡들이 귀에 쏙쏙 들어오고 멜로디도 전염성이 있고 프로덕션도 잘 돼 있어요. 인기 있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요.”
사람이 죽을 때 최후까지 열려있는 감각은 청각이라고 합니다. 의사도 누군가의 임종 때 가족들에게 “미동도 없이 눈 감고 있는 환자라도 다 듣고 계시니까 귀에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시라”고 말합니다.
음악은 오래 마음 속 그곳에 남습니다. 카페에 앉아 있어도, 이어폰을 끼고 거리를 걸을 때도, 영화 음악은 우리를 영화 속 그곳으로 데려갑니다.
“영화 음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목표는 기억에 남는 음악을 쓰는 겁니다. 영화의 세트나 로케이션이 수년이 지나도 기억에 남기도 하는데, 제 음악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작업을 합니다. 쉬운 작업은 아니죠. 영화 음악이 영화 속에서 기능적인 역할 뿐 아니라,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그 음악을 들었을 때 그 당시의 기억으로 나를 바로 데려가 줄 수 있는 그런 음악을 만드는 것이 영화 음악가로서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