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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itor M Aug 26. 2022

내가 감독이 될 상인가

'헌트'로 보는 이정재


     이 칼럼이 아니더라도 배우 이정재를 만날 수 있는 기사와 TV프로그램, 유튜브 콘텐츠는 아주 많다. 이정재 씨와 정우성 씨가 올여름 시장 ‘빅4’ 영화 중 나머지 세 편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열심히 이번 주 개봉하는 영화 “헌트” 홍보를 뛰고 있기 때문이다. 씨네멘터리는 “헌트”라는 개별 영화보다는 K-콘텐츠의 페르소나로 부상한 이정재 씨의 ‘배우 30년’을 통해 한국 영화의 흐름을 돌아보고 싶었다. 그는 2000년 전후로 시작된 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일원이자 유산이다. 


   스타를 인터뷰하는 것은 썩 내키는 일 만은 아니다. 스타일수록 방패를 많이 두르고 나온다. 이해한다. 이제는 한두 번의 인터뷰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심해서 멋진 질문을 던져도 대개는 한순간의 속내를 포착할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이제 ‘(속내야 어떻든) 멋진 멘트를 따내야지’ 하는 욕심이 많이 줄었기 때문에 긴장감을 조금 덜 수 있었다. 그래도 어떤 질문을 해야 사람들에게 들려줄 만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불특정 다수인 대중의 관심이 이정재의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나는 그저 배우 이정재를 통해서 21세기 한국 영화의 ‘장면들’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인간 이정재’가 느껴지고, 독자들이 무언가 건질 게 있다면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디어 노출이 엄청난 대중 스타에게 인터뷰가 말라 비틀어진 무말랭이처럼 느껴지기 않기를 바랐다.



     이정재 씨는 1994년, 당대의 감독 배창호의 “젋은 남자”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이듬해는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고현정을 지키는 보디가드 백재희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일약 스타가 됐다. “모래시계”는 K-콘텐츠의 특성으로 여겨지는 특유의 짙은 사회성을 담은 드라마의 전범으로 볼 수 있다. 당시로서는 민감한 소재였던 광주민주화운동을 처음으로 다뤘고, 평균 시청률 50%가 넘기며 엄청나게 흥행했다. 한국 영화가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을 정면으로 담을 용기를 내기 시작한 건 아마 이때부터가 아닐까.


   “94년도에 거의 일 년 동안 촬영했는데요, 그때 저는 배우를 막 시작한 20대 초반이라 연기를 어떻게 잘 해야 되는지, 이 생활이 나에게 맞는 건지, 또 오래 할 수 있는 건지, 아주 불안한 상태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모래시계”를 찍으면서 고 김종학 감독님과 쟁쟁하신 선배님들의 프로근성을 보고 조금씩 내가 어떻게 하면 더 프로답게 일을 할 수 있을까를 엄청나게 고민했죠.” 


   이정재 씨는 군 제대후인 1999년 김성수 감독의 “태양은 없다”로 청룡영화상 역대 최연소인 27세에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때 경쟁자가 무려 최민식(쉬리), 최민수(유령), 한석규(텔미썸딩), 박중훈(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었다. “태양은 없다”를 뺀 네 작품 모두 작품상 후보였고, 이명세 감독의 걸작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작품상을 수상한 때였다. “태양은 없다”에서 절친 정우성과 함께 나온 이정재는 때론 철없고 때론 비겁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만은 없는 방황하는 청춘을 실감나게 연기해 청춘스타로 떠올랐다. 지금도 군대와 연예활동의 상관관계는 참 아리송한 주제지만, 이정재 씨에 따르면 당시는 큰 흐름이 바뀌는 시기였다.    


영화 "태양은 없다"의 이정재와 정우성


“그때는 군대를 갔다 오면 다양한 캐릭터를 맡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군대 가기 전까지 청춘 스타 같은 캐릭터를 많이 한다면 군대를 딱 갔다 오는 순간부터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의 삼촌, 누구의 큰 형, 이런 역할을 주로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제 세대부터 그런 벽이 없어지면서 군대를 갔다 왔다고 해서 또는 결혼을 했다고 해서 그 이유로 캐릭터가 결정되지 않는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제가 시대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지난 2013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이정재 씨의 데뷔 20년을 기념해 연 특별상영회 제목은 ‘영원한 젊은 남자: 이정재 특별전’이었다. 내 뇌리에 “모래시계”가 깊이 각인될 탓일까, 지금도 “모래시계”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백재희가 성기훈(오징어게임)과 박평호 차장(헌트)의 모습과 슬쩍 디졸브되며 걸어왔다. 그가 한창 젊었을 때는 못 느꼈는데, 필모그래피를 훑어나가다보면 나이들수록 눈매가 선해 보인다. 특히 “신세계” 엔딩 씬에서의 눈웃음은 많은 여성팬들의 마음을 흔들었다고 한다. 마주 앉아 얘기할 때도 사람 좋아 보이는 그 눈웃음이 어디 가지 않았다.



    “살짝 자랑을 하자면 제가 미워 보이는 역할을 교묘하게 덜 미워 보이게 연기하는 장점이 있어서, 좀 비열한 역을 하거나 악당 캐릭터를 연기할 때도 그 나름의 이유와 명분을 연기로 잘 표현해서 관객들에게 전달하면 그냥 나쁜 사람으로만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약간의 자신감이 있거든요.”  


   대형 상업영화의 경우 보통 개봉 한 달 전 쯤에는 제작보고회를 열고 개봉 1~2주 전에는 시사회 및 기자간담회를 개최한다. 시사회 직전에 짧게 진행되는 ‘보도국 인터뷰’까지 포함하면 감독과 주연 배우들을 개봉 직전 서너 번씩 공동으로 만나 영화와 관련해 질문하고 대답을 듣는다. 대개는 어디서든 들을 수 있는 비슷 비슷한 얘기로 흐르기 십상이지만 그런 얘기라도 서너 차례에 걸쳐 찬찬히 듣다 보면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감이 온다. 이정재 씨는 선입견보다 훨씬 꼼꼼하고 완벽주의자 성향이 다분하며 겸손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너무 신중해서 조금은 심심했달까. 내가 이정재 씨를 제대로 본 것이라면 나는 이정재 씨의 그런 성향이 바로 감독 이정재의 “헌트”가 만만치 않은 영화로 뽑아진 이유라고 믿는다. 물론 그는 특급 배우이고 나는 그의 연기에 속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지켜 본 연기에는 그 사람의 캐릭터가 묻어나게 마련이다. “헌트”에 나왔던 동료배우들의 얘기다.


“(이정재 감독이) “헌트” 촬영 기간이 뒤로 갈수록 말라가고 살이 빠지고 옷이 헐렁해지고…지친 모습으로 숙소에 들어가는 뒷모습을 볼 때는 동료로서 측은하기도 했지만 본인이 선택한 책임의 무게를 꿋꿋하게 잘 짊어지고 가는구나 싶어서 든든하기도 했습니다” (정우성, 기자간담회)


“촬영 중에 워낙 꼼꼼하게 다 챙기시는 건 뭐 다른 감독님들도 그렇겠지만, 믹싱 같은 후반작업 할 때도 마지막까지 끝까지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전혜진, 기자간담회) 


     “태양은 없다”가 개봉한 해인 1999년 여름에는 박광수 감독의 야심찬 기획 “이재수의 난”도 극장에 걸렸다. 이정재 씨가 타이틀 롤을 맡았다. 박광수 감독은 “칠수와 만수”, “그들도 우리처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등 굵직한 사회파 영화를 찍은 80년대 대표 감독 중 한 명. 당시로서는 큰 제작비인 32억원을 들인 박광수 감독의 대작에 원톱 주연으로 캐스팅될 정도였으니 당시 이정재 씨는 인기뿐 아니라 연기력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해야 할까. “이재수의 난”이 큰 실패를 하는 바람에 박광수 감독은 충무로에서 영향력을 잃어갔고, 이정재 씨도 이후 약 10년 동안 흥행과 작품성 양면에서 이렇다 할 대표작을 남기지 못하며 침체기를 보내게 된다. 나무위키에서는 이정재 씨의 이 시기를 ‘청룡영화상의 저주인 양 거의 10년 간 암흑기가 지속된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것이 꽤 객관적인 평가일 수도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주 큰 성공을 한 이후에는 그만한 작품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연기 생활하는데 있어서는 꽤 큰 도움이 됐던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하는데요, 그때 굉장히 다양한 캐릭터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많이 했었거든요." 


  매우 긍정적인 자세이고 맞는 얘기다. 다만 당시에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인지, 돌아보니 그렇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누구에게나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젊었을 때. 뭐든 때가 있다. “지금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는 관객들이 전혀 없지만 당시에는 일 년에 한 작품씩 하면 다작 배우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닐 때였거든요. 그래서 시나리오 들어오는 것 안에서 1, 2년에 한 편씩 하면서 연기 레슨도 받고 취미 생활과 운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지금 저의 성공이 너무나도 감사하지만 그때를 잠깐 생각해보면 너무 일만 열심히 하는 것보다는 잠깐씩 여행도 다니고 책도 보고 하면서 내가 앞으로 어떤 연기를 더 해야 될지 그런 고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은 개인적인 여유가 너무 없을 정도로 일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은데…”


     2010년, 63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던 임상수 감독의 “하녀”에 출연하면서 이정재 씨의 배우 인생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이른바 원톱 또는 투톱 주연이었던 그가 한걸음 뒤로 물러선 비중의 배역들을 맡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하녀 때부터 예전만 못한 비중의 캐릭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 같은데요, 그때 막 멀티캐스팅이 한국에서도 이루어지면서 많은 배우들이 모여서 작업을 하고 관객들은 그 많은 배우들을 한꺼번에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영화들이 활성화될 때였습니다. 그래서 하녀 이후로 “도둑들(2012)”, “신세계”(2013), “관상(2013)”, “암살(2015)” 이렇게 주르륵 하게 됐죠.”



     최동훈 감독과 이정재 배우의 첫 천만 영화이기도 한 “도둑들”은 할리우드에서 먼저 시작했던 멀티캐스팅을 한국에서도 적용해 크게 히트해 이후로 멀티캐스팅 붐을 일으킨 영화다. 김윤석, 김혜수, 이정재, 전지현 등 원톱을 해도 충분한 특급 배우들이 한꺼번에 나오고 김수현, 김해숙, 오달수 같은 중견 또는 신인 배우는 물론 임달화, 이신제 같은 외국의 유명 배우들도 주연급에 이름을 올렸다. 이 영화는 도둑들이 서로의 뒤통수를 치면서 배신과 배신이 꼬리를 무는 영화이긴 하지만 이정재 씨가 맡았던 뽀빠이 역은 특히 비열한 캐릭터에 속한다. 이후 출연했던 “암살”에서도 이정재 씨는 독립운동가를 배신하는 변절자 염석진 역을 맡았다. 


   “‘암살’은 처음에는 저도 거절했어요. 내가 도둑놈도 하고 뭣도 하고 다 할 수 있지만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다. 내 정서도 그렇고 대한민국 국민의 정서 상 그런 캐릭터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다. 그래서 못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시나리오를 한번 더 보면서 딱 한 대사가 계속 머리에 남았습니다. ‘왜 조국을 배신했냐’는 전지현 씨의 질문에 ‘몰랐으니까. 해방될지 몰랐으니까’라고 답하는 대사가 있거든요. 그 대사에서 딱 제 마음이 걸리더라구요… ‘아, 이것은 의미있는 캐릭터로 나에게 남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게 됐습니다.”


   아가씨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지고지순한 순정남 백재희에서 도둑 뽀빠이로의 변신은 그렇다쳐도 친일파 염석진으로의 ‘변절’은 그로서도 쉬운 선택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톱스타가 이 정도까지의 배역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이런 선택과 경험이 결국 “오징어게임”의 성기훈으로 연결되는 밑바탕이 되지는 않았을까 싶다.


   “생활 연기라는 게 굉장히 생활스럽게 잘 하면 좋지만, 또 생활 연기를 해야 된다 라는 강박 때문에 연기가 오버스럽거나 영화의 재미적인 부분에 못 미치거나 그럴 때가 있거든요.  ‘오징어게임’의 성기훈이라는 캐릭터는 워낙에 낙천적인 데다가 부모님하고 같이 사는 나이먹은 캥거루족이기도 하고, 거의 믿지 못할 판타지가 가득한 게임장 안에 들어가서 상대방과 함께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는 인물이어서 제가 지금까지 연기했던 어떤 캐릭터보다 어렵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 이후는 아시는대로다. “오징어게임”은 넷플릭스 최대의 히트작이 됐고, 이정재 씨는 단숨에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인간적인 면도 있지만, 어수룩하고 찌질하고 한심하기까지한 배역으로. 이정재 씨가 멋지고 그럴듯한 역만 고집하고 있었다면 과연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갑자기 고 하일성 씨가 생각난다. “인생 몰라요~”


   이정재 씨는 비영어권 작품으로 에미상 주연상 후보에 오른 사상 첫 배우가 됐다. 이미 올해 초 미국에서 크리틱스 초이스 남우주연상과 배우조합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배우조합상을 받을 때 이정재 씨는 무대에 나와 수상 소감을 말하면서 자켓 속 주머니에서 메모를 꺼내 읽으려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수상 경험이 많은 그에게도 그만큼 긴장되는 순간이었나보다.

미국 배우조합상 시상식에서 메모를 도로 집어넣으며 수상 소감을 말하는 이정재 씨 (SBS뉴스 화면캡쳐)


“거기에는 부모님을 비롯해서 감사해야 하는 수많은 이름들과 한국영화팬들에 대한 감사 내용이 담겨있었어요. 하지만 못 읽겠더라고요. 막 떨리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벅차서… 저는 사실 노미네이트된 것만으로도 굉장히 큰 수확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이름이 나올 줄을 정말 꿈에도 생각을 못 했거든요. 그래서 너무 놀라서 진짜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 몇마디만 하고 나올 수 밖에 없는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오징어게임”과 “헌트”로 칸과 할리우드에서 많은 외국의 쇼비즈니스 관계자들과 만난 이정재 씨에게 그들이 도대체 어떤 점에서 K-콘텐츠에 주목하느냐고 물었다. “첫째는 다양성에 대해서 주목을 하는 것 같고요, 둘째로는 굉장히 적은 예산을 가지고도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는 점에 대해서 꽤 크게 놀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벌써 한 이년 전부터 국내에서 영화를 잘 만드는 사람들, 영화를 완성도 있게 만들 수 있는 회사들을 다 만나고 다니고 있더라구요. 미국 할리우드와 함께 합작 작품을 벌써 기획하고 있는 데들도 있고요. 물량 면에서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한국영화인들의 기술력은 세계 어떤 기술력과 비교해도 아이디어 면에서는 훨씬 더 뛰어나기 때문에 한국 콘텐츠가 글로벌 스탠다드를 넘어선 작품으로서 평가를 받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정재 씨에게 인생의 분기점이 된 작품 3개만 꼽아 달라고 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데뷔작이니까 무조건 배창호 감독님의 ‘젊은 남자’가 분기점일 수 밖에 없을 것 같고요, 그 다음은 ‘태양은 없다’죠. 사실 그 작품 전까지는 연기에 대해서 재미도 크게 못 느끼고 어렵기만 하고 현장이 너무 어려웠어요. 솔직히요. 그런데 김성수 감독님을 만나고 정우성 씨를 만나면서 영화를 하나씩 하나씩 재미있게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영화 만드는 재미를 처음 느끼게 됐던 작품이 바로 ‘태양은 없다’입니다.”


    “태양은 없다”는 뮤직비디오 같은 구석이 있는 스타일리시한 영화다. 뒤늦게 봤는데 지금 봐도 크게 촌스럽지 않다. 오히려 이정재, 정우성의 이십대 초반 풋풋한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다. 이정재 씨가 이미 이때부터 밉지 않은 허풍선이 역할을 맡기도 했다는 사실을 보면서 깨닫고 질문 설계를 잘못했나 아차 싶기도 했다. “하녀”전까지는 계속 멋진 역할만 한 걸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보니 “태양은 없다”에서 이정재 씨가 맡은 홍기는 돈만 생기면 경마장에 가고 빌린 돈 갚지 않고 도망 다니다 신체포기각서 쓸 지경에 이른다는 점에서 “오징어게임”의 기훈과 아주 닮았다. 


  “세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영화는 ‘헌트’죠. 물론 ‘오징어게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둔 한국 콘텐츠는 없다고 주변에서 말씀들 하시고, 개인적으로도 세계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다 알아봐 주시는 건 사실상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하지만 ‘헌트’는 제가 각본에서부터 연출까지 하나씩 하나씩 다 한 작품이라 애착이 많이 가고요.”


영화 "헌트"의 한 장면 (제공:사나이픽쳐스)


     격동의 80년대를 배경으로 광주민주화운동과 안기부의 간첩조작 사건, 이웅평의 미그기 귀순, 아웅산 테러 등 정치·역사적으로 굵직한 사실(史實)들을 다룬 첩보액션영화 “헌트”는 이정재 씨의 감독 데뷔작이다. “태양은 없다” 이후 23년 만에 정우성 씨와 함께 주연까지 맡았을 뿐더러 각본과 제작까지 1인 4역을 했다. 안기부 해외팀 차장 역의 이정재 씨와 국내팀 차장 역을 맡은 정우성 씨의 중후한 연기도 볼만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데뷔 감독이 이 정도로 흡인력있게 영화를 끌고 간다는 점에서 살짝 놀라웠다. 사람 다시 보게 됐달까. 한국 영화의 제작 여건과 시스템이 개선돼 과거에 비해 감독 의존도가 낮아졌다고는 하지만 결국 영화의 선장은 감독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차원에서 독자 여러분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실지 몹시 궁금하다)


   “‘헌트’ 시나리오를 쓰면서 내가 왜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 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고요. 포기해야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영화는 어차피 관객과의 대화인 건데 나는 연기만 하면 되지 내가 뭐라고 왜 굳이 어려운 시대를 배경으로 어렵게 시나리오를 쓰려고 하지 라는 생각도 했어요.”


 - “이 도전을 통해서 얻고 싶으셨던 것과 실제로 얻으신 건 무엇인가요?”


 “제가 20대 때 처음 영화계에 입문했을 때만 해도 제작은 제작만 하는 사람, 연출은 연출만 하는 사람, 연기는 연기만 하는 사람으로 명확하게 구분돼 있었고, 연출자가 제작을 하거나 연기자가 연출하는 것에도 굉장히 좋지 않은 말들이 많이 있었어요. 한 가지만 잘하지 뭘 그렇게 이것도 저것도 다 잘 못하면서 하려고 하느냐 라는 말들이 굉장히 많았었거든요. 해외에서는 90년대만 하더라도 연기자가 연출도 하고 제작을 할 때도 있고 시나리오를 쓸 때도 있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그런 해외 뉴스를 볼 때마다 왜 우리나라는 연기자나 감독, 제작자가 다른 분야에서는 활동하지 못할까 하는 의문은 항상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2000년도가 지나가면서부터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들이 조금씩 가능하게 되는 분위기로 바뀌더라고요. 2010년대 들어서는 더 활발하게 연출자가 제작을 하거나 연기자가 연출을 하는 일이 있었고요. 하지만 연기자가 연출을 하는 작품에 있어서 큰 성공을 거둔 건 없었거든요, 흥행에서든 작품성에서든. 제가 30년 동안 배우 일을 해오면서 저나 제 동료 중 누군가 한 명은 성공하는 케이스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5월 칸 영화제 방문 기간에 이정재 씨가 대상포진에 걸렸었다는 얘기를 이정재 씨 주변 인사로부터 전해 들었다. 해사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언론 인터뷰에 응하던 모습을 본 것 같은데, 통증이 심하다는 대상포진을 앓는 와중에도 숨가쁜 일정을 소화한 것이다. “헌트” 홍보사인 영화인의 신유경 대표는 홍보용 스틸 컷 한 장 고르는 과정에서 이정재 씨가 사진 수백 장 하나하나에서 손동작의 차이를 구별하면서 다른 컷을 주문하더라고 전했다. 그의 성격과 노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가 벼락스타로 출발한 건 맞지만, 그것 만으로 30년을 버티긴 불가능하다. 


  이정재 씨는 각본을 쓰고 연출과 제작도 하는 조지 클루니나 맷 데이먼같은 성공적인 배우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시사회에서 “헌트”를 보고 나서는 그게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흥행이야 신만이 알고 관객이 실현하는 것이고, 공은 사실상 이정재 씨에게 넘어가 있다. 그가 하려고만 한다면 이번에 안되더라도 언젠가는 한국의 첫 성공 사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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