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에피소드 : 이 송
그.물.설 (그 물건의 진짜 설명서)
-이대로 좋은데.
새로운 그림 [책상]은 모티브인 책상 쓰임새를 마음에 들어했다. 불만 없이 이름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다른 그림과 인사하러 갔다. [책상] 말고 다른 그림을 더 그렸다.
-흠. 다른 이름 주면 안 돼?
-오 멋진데. 내가 저거라는 거지.
-정말 싫어…….
그림마다 자기 이름에 대한 반응이 달랐다. 누구는 마음에 들어했고, 누구는 싫다며 울음보를 터트렸다.
-이 송, 오늘은 그만 그리면 안 돼? 신입이 많아서 정신이 없어.
그림을 또 그리려고 펜을 들었는데 [빨래 건조대]가 와서 말렸다. 방은 신입에게 규칙을 설명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반복되어 들리고 있었다. 그림들은 시간차로 태어난 신입에게 교육을 시키고, 또 시키고 있었다. 반복하는 교육에 지쳐 [빨래 건조대]가 대표로 그만 그리라고 부탁했다.
“미안. 생각 없이 그려서 그림을 이렇게 많이 그렸는지도 몰랐어.”
그릴 때는 정신을 온전히 그림에 집중해서 주변 소음이 안 들린다. 그런데 집 안 상황을 인지하자, 더 그림 그릴 생각을 못 했다. 집 안 곳곳 대화 소리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평소에는 모두 규칙을 잘 지켜, 이렇게 머리가 아플 정도로 소리 높여 떠들지 않는다. 오늘은 신입이 많아서 아직 규칙 숙지가 안되어 통제불능이었다.
기존 그림은 소음 공해에서 벗어나려고 방안 구석구석 숨어들었다. 나도 몸이 작으면 그림처럼 도망쳤을 텐데. 인간 몸으로 숨을 곳은 화장실이 유일했다. 차라리 카페로 도망갈까 고민하다가 포기하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따라 그림을 왜 이렇게 많이 그렸어.
[빨래 건조대]는 책상에서 내려와 침대로 따라왔다. 바닥은 신입 교육 대장인 [빨래 건조대]의 도움이 필요해 보이지만 본인은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냥. 너네는 태어나면 자기만의 쓰임새를 원하잖아. 그게 신기해서 계속 그리고 있었지.”
-그게 왜 신기해?
“너는 이렇게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당당하게 싫다고 다른 이름 달라고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그런가?
-평생을 싫은 걸로 사는 것보다 한 번 싫다고 말해서 다른 이름 달라고 하는 게 쉽지. 평생 싫은 걸로 억지로 사는 게 훨씬 어렵지 않아?
머리맡에 있던 다이어리 사이에 꽂혀 있던 [포스트잇]이 끼어들었다. 포스트잇이 소모품인 게 싫어서 책갈피가 된 그림이었다.
[빨래 건조대]는 [포스트잇]에 말에 긍정했지만 나는 바로 긍정할 수 없었다.
“싫은 걸 어떻게 알아? 막상 살아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잖아.”
-그래서 먼저 산 물건의 최후를 봤지. 포스트잇은 아무리 오래 버텨도 그 끝은 쓰레기통이었어. 한 달은 행복할 수 있지만, 한 달 하고 하루 뒤에는 쓰레기통인 삶과 책과 같이 한 달 뒤에도 계속 책갈피인 삶 중에 뭐가 더 좋겠어?
‘그럼 나도 후자를 선택했겠지.’
[포스트잇]의 질문에 입 밖으로 대답은 안 했지만, 나 역시 같은 선택을 했을 게 자명했다. 하지만 [포스트잇]의 비유는 너무 극과 극이었다. 누구나 내 미래가 쓰레기통인 걸 안다면, 어떡해서든 미래를 바꾸려고 발버둥 칠 것이다. 나는 극과 극이 아닌 비슷한 미래를 머리 속에 그렸다. 만약 김은성처럼 퇴사하는 것과 회사를 다니는 것.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일까?
회사를 다녀도 이 팀장처럼 커리어우먼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퇴사한다고 더 나은 연봉을 받을지도 확신할 수 없다. 미래를 그릴 수 없는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건 힘들었다.
“그런데 바꾼 이름도 겉보기만 멋있지. 별 다를 게 없을 수도 있잖아?”
-그럼 또 바꾸면 되지.
[포스트잇]에게 한 질문에 [빨래 건조대]가 대꾸했다. 사실 그는 지금도 호시탐탐 다른 이름을 노리고 있었다. 처음 ‘액자 프레임’을 마음에 들어하더니, 다른 더 멋진 물건을 발견하면 다시 바꿔 달라고 우기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귓등으로 흘렸는데, 어쩌면 [빨래 건조대]의 마인드가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했다.
“바꿨는데 또 싫으면?”
-또 바꾸면 되지. 바꾸는 걸 어렵게 생각하지 마. 다 나를 찾아가는 과정인데, 바꾸는 횟수가 뭐가 중요해.
[빨래 건조대]의 말에 답답했던 머리가 개운해졌다. 며칠 머리를 복잡하게 헤집던 문제가 다 사라졌다. 실패할까 봐. 내 선택이 틀렸을까 봐. 그래서 함부로 결론 내리는 걸 주저했다. 틀렸다면 고치면 되고, 실패해도 다시 하면 된다.
‘회사에 갇혀서 시도해보지 못했던 걸, 이제는 해볼 수 있잖아. 그 가능성이 좋은 거 같아.’
김은성이 말한 가능성이 이런 의미였을까. 영원히 해보지 못하는 것과 시도할 수 있는 자유. 김은성이 퇴사하고 표정이 밝았던 건 지금 내가 느낀 감정을 먼저 깨달아서 인지도 모른다. 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김은성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다.
나는 다시 다이어리를 뒤적거렸다. 이 송은 오늘 밤도 다이어리를 손에 든 채 밤은 지새웠다.
***
복잡한 출근길은 근무 시작 전부터 체력을 훅 빨아들이는 녀석이었다. 아침도 못 먹어서 배고픈데 출근길에 체력까지 빼앗겨 사무실에 들어오면, 이미 야근한 사람 모양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두 눈이 생기가 돌았다. 또렷한 눈망울 속에는 어제 잠을 못 잔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오늘 기분 좋은 일 있어?”
“아니요. 그냥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네요.”
스스로도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는데, 주변에서 봐도 티가 났나 보다. 지나가던 김 대리의 질문에 모니터에 비치는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확실히 평소보다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기분 좋게 일을 마치고 퇴근 전에 이 팀장을 찾아갔다. 면담 요청에 이 팀장은 흔쾌히 시간을 내주었다.
면담 내내 이 팀장은 이 송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인생선배로서 솔직하게 조언도 해주었다. 둘의 면담은 길지 않았다. 짧은 면담이 끝나고 사무실의 나서는 이 송의 표정은 출근길과 다르지 않았다. 이 송의 뒤로 그녀를 걱정스럽게 보는 이 팀장의 시선이 있었다. 이 팀장의 표정과 달리 이 송은 하루의 마무리를 기분 좋게 하고 있었다.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모른다. 하지만 주변의 영향이 아닌 스스로 한 선택이라 후회는 없었다.
-마지막 에피소드 끝-
그. 물. 설. 마지막
이름 : 이 송
그 물건의 진짜 설명서 : 이 송
그림작가 이송련님 인스타 : https://www.instagram.com/song_r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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