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설. 8 이 송

마지막 에피소드 : 이 송

by 글못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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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설 (그 물건의 진짜 설명서)

에피소드 8. 이 송





-이대로 좋은데.


새로운 그림 [책상]은 모티브인 책상 쓰임새를 마음에 들어했다. 불만 없이 이름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다른 그림과 인사하러 갔다. [책상] 말고 다른 그림을 더 그렸다.


-흠. 다른 이름 주면 안 돼?

-오 멋진데. 내가 저거라는 거지.

-정말 싫어…….


그림마다 자기 이름에 대한 반응이 달랐다. 누구는 마음에 들어했고, 누구는 싫다며 울음보를 터트렸다.


-이 송, 오늘은 그만 그리면 안 돼? 신입이 많아서 정신이 없어.


그림을 또 그리려고 펜을 들었는데 [빨래 건조대]가 와서 말렸다. 방은 신입에게 규칙을 설명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반복되어 들리고 있었다. 그림들은 시간차로 태어난 신입에게 교육을 시키고, 또 시키고 있었다. 반복하는 교육에 지쳐 [빨래 건조대]가 대표로 그만 그리라고 부탁했다.


“미안. 생각 없이 그려서 그림을 이렇게 많이 그렸는지도 몰랐어.”


그릴 때는 정신을 온전히 그림에 집중해서 주변 소음이 안 들린다. 그런데 집 안 상황을 인지하자, 더 그림 그릴 생각을 못 했다. 집 안 곳곳 대화 소리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평소에는 모두 규칙을 잘 지켜, 이렇게 머리가 아플 정도로 소리 높여 떠들지 않는다. 오늘은 신입이 많아서 아직 규칙 숙지가 안되어 통제불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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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그림은 소음 공해에서 벗어나려고 방안 구석구석 숨어들었다. 나도 몸이 작으면 그림처럼 도망쳤을 텐데. 인간 몸으로 숨을 곳은 화장실이 유일했다. 차라리 카페로 도망갈까 고민하다가 포기하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따라 그림을 왜 이렇게 많이 그렸어.


[빨래 건조대]는 책상에서 내려와 침대로 따라왔다. 바닥은 신입 교육 대장인 [빨래 건조대]의 도움이 필요해 보이지만 본인은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냥. 너네는 태어나면 자기만의 쓰임새를 원하잖아. 그게 신기해서 계속 그리고 있었지.”

-그게 왜 신기해?

“너는 이렇게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당당하게 싫다고 다른 이름 달라고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그런가?

-평생을 싫은 걸로 사는 것보다 한 번 싫다고 말해서 다른 이름 달라고 하는 게 쉽지. 평생 싫은 걸로 억지로 사는 게 훨씬 어렵지 않아?


머리맡에 있던 다이어리 사이에 꽂혀 있던 [포스트잇]이 끼어들었다. 포스트잇이 소모품인 게 싫어서 책갈피가 된 그림이었다.

[빨래 건조대]는 [포스트잇]에 말에 긍정했지만 나는 바로 긍정할 수 없었다.


“싫은 걸 어떻게 알아? 막상 살아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잖아.”

-그래서 먼저 산 물건의 최후를 봤지. 포스트잇은 아무리 오래 버텨도 그 끝은 쓰레기통이었어. 한 달은 행복할 수 있지만, 한 달 하고 하루 뒤에는 쓰레기통인 삶과 책과 같이 한 달 뒤에도 계속 책갈피인 삶 중에 뭐가 더 좋겠어?

‘그럼 나도 후자를 선택했겠지.’


[포스트잇]의 질문에 입 밖으로 대답은 안 했지만, 나 역시 같은 선택을 했을 게 자명했다. 하지만 [포스트잇]의 비유는 너무 극과 극이었다. 누구나 내 미래가 쓰레기통인 걸 안다면, 어떡해서든 미래를 바꾸려고 발버둥 칠 것이다. 나는 극과 극이 아닌 비슷한 미래를 머리 속에 그렸다. 만약 김은성처럼 퇴사하는 것과 회사를 다니는 것.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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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다녀도 이 팀장처럼 커리어우먼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퇴사한다고 더 나은 연봉을 받을지도 확신할 수 없다. 미래를 그릴 수 없는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건 힘들었다.


“그런데 바꾼 이름도 겉보기만 멋있지. 별 다를 게 없을 수도 있잖아?”

-그럼 또 바꾸면 되지.


[포스트잇]에게 한 질문에 [빨래 건조대]가 대꾸했다. 사실 그는 지금도 호시탐탐 다른 이름을 노리고 있었다. 처음 ‘액자 프레임’을 마음에 들어하더니, 다른 더 멋진 물건을 발견하면 다시 바꿔 달라고 우기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귓등으로 흘렸는데, 어쩌면 [빨래 건조대]의 마인드가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했다.


“바꿨는데 또 싫으면?”

-또 바꾸면 되지. 바꾸는 걸 어렵게 생각하지 마. 다 나를 찾아가는 과정인데, 바꾸는 횟수가 뭐가 중요해.


[빨래 건조대]의 말에 답답했던 머리가 개운해졌다. 며칠 머리를 복잡하게 헤집던 문제가 다 사라졌다. 실패할까 봐. 내 선택이 틀렸을까 봐. 그래서 함부로 결론 내리는 걸 주저했다. 틀렸다면 고치면 되고, 실패해도 다시 하면 된다.


‘회사에 갇혀서 시도해보지 못했던 걸, 이제는 해볼 수 있잖아. 그 가능성이 좋은 거 같아.’


김은성이 말한 가능성이 이런 의미였을까. 영원히 해보지 못하는 것과 시도할 수 있는 자유. 김은성이 퇴사하고 표정이 밝았던 건 지금 내가 느낀 감정을 먼저 깨달아서 인지도 모른다. 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김은성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다.


나는 다시 다이어리를 뒤적거렸다. 이 송은 오늘 밤도 다이어리를 손에 든 채 밤은 지새웠다.


***


복잡한 출근길은 근무 시작 전부터 체력을 훅 빨아들이는 녀석이었다. 아침도 못 먹어서 배고픈데 출근길에 체력까지 빼앗겨 사무실에 들어오면, 이미 야근한 사람 모양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두 눈이 생기가 돌았다. 또렷한 눈망울 속에는 어제 잠을 못 잔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오늘 기분 좋은 일 있어?”

“아니요. 그냥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네요.”


스스로도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는데, 주변에서 봐도 티가 났나 보다. 지나가던 김 대리의 질문에 모니터에 비치는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확실히 평소보다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기분 좋게 일을 마치고 퇴근 전에 이 팀장을 찾아갔다. 면담 요청에 이 팀장은 흔쾌히 시간을 내주었다.

면담 내내 이 팀장은 이 송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인생선배로서 솔직하게 조언도 해주었다. 둘의 면담은 길지 않았다. 짧은 면담이 끝나고 사무실의 나서는 이 송의 표정은 출근길과 다르지 않았다. 이 송의 뒤로 그녀를 걱정스럽게 보는 이 팀장의 시선이 있었다. 이 팀장의 표정과 달리 이 송은 하루의 마무리를 기분 좋게 하고 있었다.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모른다. 하지만 주변의 영향이 아닌 스스로 한 선택이라 후회는 없었다.


-마지막 에피소드 끝-






그. 물. 설. 마지막

이름 : 이 송

그 물건의 진짜 설명서 : 이 송









그림작가 이송련님 인스타 : https://www.instagram.com/song_ryeon/

글 못 쓰는 소설가 브런치 : https://brunch.co.kr/@story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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