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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못소 Jul 28. 2018

그.물.설. 7 포스트잇

에피소드7 : 포스트잇 (매주 토요일 연재)



그. 물. 설 (그 물건의 진짜 설명서)  

에피소드 7. 포스트잇 




몇 분 안 걸었는데 찜질방에 있는 것처럼 땀이 났다. 방금 전에 화장한 얼굴은 기름으로 번들거렸다. 빨리 카페에 들어가서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기름종이로 세수하고 싶었다. 지하철 역에서 10분 거리인 카페에 도착하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를 반겼다. 커피를 주문하려고 줄을 서는데, 홀 안에서 번쩍 든 손이 보였다. 무더운 날 외출하게 만든 김은성이었다. 김은성은 내 커피도 주문했는지, 두 개 커피를 들고 나를 보고 있었다. 커피 기다리던 줄에서 벗어나 자리로 갔다. 술집에서 만났던 우울한 김은성이 아닌 밝아진 김은성이 반갑게 인사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맞지? 미리 주문했어.” 

“응, 고마워.” 


커피를 홀짝이며 먹던 평소와 달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 들이켰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으로 겉 피부는 살만 했지만, 속은 여전히 뜨거웠다. 불을 끄는 소화기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 마시니 속부터 시원한 기운이 퍼졌다. 겉과 속이 시원하니 살 것 같다.  


“야, 천천히 마셔. 이게 무슨 숭늉인 줄 알아.” 

“긴급 상황이야. 잠깐 걷는데 사막 한 복판을 걷는 줄 알았어. 너는 왜 이렇게 더운 날 부른 거야?” 


저번 주에 주말 출근이라 못 만났더니, 이번 주에 또 연락이 왔다. 날씨를 생각하면 나오기 싫었지만, 두 번이나 거절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나왔다. 김은성은 같은 하늘 있으면서 더위를 모르는 사람 같았다. 파운데이션 아래 피부가 붉어진 걸 보면 더운 것 같긴 한데, 표정은 지상낙원에 있는 사람처럼 편해 보였다. 


“그냥 퇴사하니까 심심하네. 그래서 친구 순회 돌고 있어.” 


같이 술 먹은 게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김은성은 벌써 퇴사 처리가 끝났나 보다. 위로의 말을 해줘야 하는 상황 같지만, 편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위로가 아닌 다른 말이 적당할 것 같다. 


“얼굴이 활짝 폈네. 퇴사 잘 했어.” 


김은성도 자기 변화를 알고 있는지 미소 지었다. 나라면 퇴사하고 불안할 것 같은데, 김은성은 불안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해 보여 회사가 정말 안 맞았던 걸 느낄 수 있었다.  


“좋은 회사 나와서 백수 된 게 좋아?” 


비꼬는 건 아니었다. 그냥 정말 좋아 보여서 순수한 호기심에 물었다. 


“그러게. 나도 그게 신기해. 회사 다닐 때는 꼬박꼬박 월급 들어와도 우울했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회사에 갇혀서 시도해보지 못했던 걸, 이제는 해볼 수 있잖아. 그 가능성이 좋은 거 같아.” 


그 뒤로 김은성이 말하고 나는 듣는 쪽이었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김은성의 표정이 밝아서 듣는 내내 나까지 기분이 좋았다.  



** 



-싫어.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건 그림의 투정이었다. 대부분이 원래 용도를 싫어해서, 처음보다 짜증이 나지는 않았다. 

투정 부리는 [포스트잇]은 자신이 소모품인 걸 싫어했다. 다른 그림도 비슷한 이유로 소모품인 걸 거부했지. [포스트잇]은 여린 감성의 소유자는 아닌지, 쓰레기통에 버려진 포스트잇을 보고 울지 않았다. 단지 싫다고 말할 뿐이다. 

“그래. 싫겠지.” 


[포스트잇]의 새로운 사용방법을 찾으려고 책상을 스캔했다. 서랍 속 물건을 뒤적거리다 다이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다이어리는 포스트잇이 껴져 있었다. 지금은 책으로 공부하지 않지만, 과거 노트 필기를 많이 할 때 포스트잇을 책갈피처럼 썼었다. [포스트잇]에게 책갈피를 보여주기 전에, 다이어리를 펼쳤다. 대학교 때 틈틈이 썼던 다이어리였다. 내용은 친구와 다툰 내용, 남자 친구 이야기, 고민이 쓰여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 전시회가 있어서 친구랑 갔다 왔다’ 

‘나도 저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 

‘죽기 전에는 할 수 있겠지?’ 


그림 관련 학과가 아니면서 그림에 관심은 많았다. 그래서 가끔 전시회를 찾아다녔다. 다이어리를 넘길수록 취업 고민이 가득했다. 서류 탈락이 반복되니 초조했다. 나중에는 어떤 회사라도 들어가고 싶어서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서류를 넣었다. 그래서 들어오게 된 회사가 지금 회사다. 


-이것도 포스트잇 아니야? 


[포스트잇]은 다이어리 중간에 꽂힌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포스트잇]은 신기한 듯 책갈피 용도로 쓰인 포스트잇을 구경했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포스트잇은 한 번 보고 고개를 돌리더니, 책갈피는 마음에 드는지 계속 기웃거렸다. 


책상 위에 있는 [포스트잇] 말고 다른 그림은 바닥이나 침대 위에서 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원래 자기 용도가 아닌 자기가 원하는 용도를 다시 선택했다.  


“너는 포스트잇이야. 메모를 남기는 종이란 말이야. 원래 그렇게 태어난 건데, 그게 싫어?” 

-원래 그렇게 태어났다고? 


[포스트잇]은 어이가 없는지 나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나는 포스트잇을 따라 그렸다. 그러니까 [포스트잇]은 포스트잇이다. 하지만 [포스트잇]은 해괴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나를 봤다. 


-나는 그렇게 태어난 적이 없어. 단지 네가 ‘너는 이런 용도로 태어났어’라고 말한 거지. 쓰레기통에 들어가기 싫으니까, 나는 이 녀석처럼 살 거야.  


더 말할 생각이 없는지 [포스트잇]은 바닥으로 내려가 새로운 자기 사용법을 자랑했다. 처음 사용법을 들었을 때는 구겨진 종이 얼굴이더니, 지금은 방금 인쇄소에서 나온 빳빳한 종이 얼굴이었다. 


극적인 표정 변화는 김은성을 떠올리게 했다. 김은성도 회사 다닐 때는 세상 근심을 혼자 다 가진 얼굴이었다. 퇴사하고 그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 


[포스트잇]이 중간에 방해해 읽다 만 다이어리를 들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따라 과거의 나가 그리웠다.  




이 송은 잠들 때까지 다이어리를 손에 놓지 않았다. 






그. 물. 설. 일곱 번째 

이름 : 포스트잇 

그 물건의 진짜 설명서 : 책갈피









그림작가 이송련님 인스타 : https://www.instagram.com/song_r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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