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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못소 Jul 20. 2018

그.물.설. 6 플라스틱 컵

에피소드 6: 플라스틱 컵 (매주 토요일 연재)


그.물.설 (그 물건의 진짜 설명서)  

에피소드 6. 테이크아웃 컵  



주말에 출근했지만 처리할 일이 많은 건 아니었다. 빨리 처리하고 집에 가고 싶지만, 이 팀장이 굳건히 앉아있어 먼저 퇴근하기 눈치 보였다. 사물실에는 둘만 있어서, 이 팀장의 타자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일이 없다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바탕화면에 아무 문서 파일이나 열었다. 그리고 화면 아래에 작게 인터넷 창을 켰다. 메인 기사 다 보고, 웹툰도 다 봤을 때쯤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송아 잠깐 통화 가능해? 


진동의 주인은 퇴사 선언한 은성이었다. 전화를 핑계로 사무실 밖에서 숨 돌리고 싶었다. 그런데 사무실에 이 팀장과 나 밖에 없어서, 자리를 비우면 너무 크게 티가 났다. 


-지금? 나 오늘 출근했어ㅠ_ㅠ 끝나고 전화할게! 


친구의 우정은 퇴근하고 다지기로 하고, 현재는 회사 생활이 중요했다. 은성에게 답장을 보내는 사이, 뒤에 그림자가 졌다. 


“이 송씨, 안 바쁘면 같이 커피 마실래요?” 

“네? 네!” 


하필 딴짓하다 딱 걸려서 얼굴이 붉어졌다. 이 팀장은 훈계할 생각이 없는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주말 출근이지만 분홍색 블라우스에 에이치라인 스커트를 입은 그녀는 청아한 구두 소리를 내면서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 



“아이스 아메리카노 2잔이요.” 


커리어우먼의 정석인 이 팀장이 주문하는 모습은 평범한 회사원처럼 보이지 않았다.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능력 있는 여성의 모습이라 같은 여자가 봐도 멋있었다. 


대학교 동기 중에 은성은 이 팀장처럼 멋진 여성이 될 줄 알았다. 자기관리를 잘하고 성공에 욕심도 있어서, 몇 년 뒤에는 이 팀장과 같은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동기 중에 가장 먼저 퇴사를 한다. 


“이 송씨.” 


차가운 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렀다.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주문한 커피가 언제 나왔는지, 이 팀장은 눈 앞에서 플라스틱 컵을 흔들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불러도 몰라요? 주말 출근이라 정신은 집에 놓고 왔나 봐요.” 

“잠깐 친구 생각하느라…” 


이 팀장이 받으라며 흔들고 있는 컵을 잡았다. 볼에 흐르던 물방울의 출처는 컵이었나 보다. 컵 홀더가 없어서 차가운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 송씨 남자 친구 있어요?” 


친구라고 했지 이성인지 동성인지 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팀장은 이미 이성 친구로 확신한 듯, 눈을 빛내며 소녀 같은 얼굴을 했다. 


“저 남자 친구 없어요. 어제 친구들을 만났는데, 한 명이 곧 퇴사한다고 하더라고요.” 


남자가 아닌 동성 친구라는 걸 들은 이 팀장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 잠깐 보인 소녀 얼굴은 사라지고 팀장 얼굴로 돌아왔다. 


“신입 때 퇴사 많이 하죠. 나도 몇 번 했었고. 회사를 처음 들어가면 비교할 대상이 없잖아요? 그래서 다른 회사가 더 좋은 줄 알고 이직했는데, 별로 다른 게 없더라고요. 이 송씨는 어리니까 아직 이해가 안 되겠지만, 회사 몇 군데 돌아다니면 알게 될 거예요.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 말고, 이 송씨 진짜 남자 친구 없어요?” 


이미 없다고 말했는데, 이 팀장은 계속 추궁했다. 이 송은 이 팀장의 오해 푸느라 커피 마실 정신이 없었다. 



*** 



귀가한 이 송의 손에는 빈 플라스틱 컵이 들려있었다. 이 팀장이 사준 커피가 남아서 퇴근길에 마시며 왔더니, 집에 도착과 동시에 빈 플라스틱만 남았다. 




빈 플라스틱 컵을 책상 위에 두고, 그 옆에 종이 하나를 꺼냈다. 사무실에서 심심해서 그린 그림이었다. 사무실에 있을 때는 인격화 되지 않았다. 혹시 집에 가져오면 인격화 될까 싶어서, 작은 기대를 품고 가져왔다. 


아직 눈 앞에서 그림이 인 격화되는 과정을 본 적이 없었다. 24시간 쭉 관찰하고 싶지만, 폭염주의보답게 1보 전진할 때마다 땀이 쭉 나서 당장 샤워가 급했다. 이 송은 가방을 대충 던져두고, 플라스틱 컵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샤워하러 들어갔다. 


이 송이 들어간 사이 [빨래 건조대]는 새로운 그림을 기웃거렸다. [빨래 건조대]는 그림 사이에 대장이었다. 그림이 사고 치지 않도록 관리감독과 동시에 새로운 그림에게 규칙을 알려주는 게 주 일이었다. [빨래 건조대]는 신입이 움직일 때까지 옆에서 기다렸다. 그의 기다림을 눈치챘는지 그림은 꿈틀거리며 일어섰다. 


-안녕, 신입. 나는 [빨래 건조대]야. 

-안녕? 


신입은 [빨래 건조대]에게 건성으로 인사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무언가 찾는 것 같은 거 같았다. [빨래 건조대]는 신입이 찾는 게 뭔지 쉽게 눈치챘다. 갓 태어난 그림은 자기 이름을 가장 궁금해한다. 그래서 [빨래 건조대]는 신입이 찾는 걸 알려줬다. 


-너와 닮은 물건은 쓰레기통에 있어. 

-뭐, 쓰레기통? 


‘쓰레기통’ 단어를 듣자 신입은 충격에 빠졌다. 물건이 쓰레기통에 있다는 건 쓸모없는 물건이라는 의미였다. 신입은 자기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는지, 바로 쓰레기통으로 달려갔다. 



*** 



-흑, 흑… 너무해……훌쩍.  


찝찝한 땀과 열기를 시원한 물로 깔끔하게 씻고 나왔는데, 기분은 이유도 모른 채 상사에게 불려 가 눈치 보는 거와 흡사했다.  


화장실 문을 열자 앞에는 [플라스틱 컵]이 울고 있고, 그 옆에서 [빨래 건조대]가 위로해주고 있다. 이유는 모르지만 죄를 지은 거 같아서 눈동자만 굴리고 있자, [빨래 건조대]가 상황을 설명했다. 


-신입이 자기와 닮은 물건이 쓰레기통에 있어서 충격받았어. 쓰레기통은 쓸모없는 물건을 버리는 곳이잖아. 신입은 자기가 쓸모없는 물건이라는 게 슬픈가 봐. 


[빨래 건조대]를 보던 시선을 쓰레기통으로 옮겼다. 쓰레기통 가장 위에는 플라스틱 컵이 얌전히 놓여있었다. 쓰레기라서 쓰레기통에 버린 건데, 차마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이미 울고 있는 녀석을 또 울리는 말은 목구멍 안 깊숙이 삼켰다. 대신 플라스틱 컵을 쓰레기통에서 꺼냈다. 

“내가 실수로 버린 거야. 그러니까 울지 마, 응?” 


[플라스틱 컵]은 울음을 그치고 내 손 끝을 바라봤다. 


-실수였어? 나는 저번에도 쓰레기통에 버리길래, 원래 쓰레기인 줄 알았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빨래 건조대]가 하자, [플라스틱 컵]은 다시 울려고 했다. 우는 건 정말로 싫어서 빨리 머리를 굴렸다. 

우선 플라스틱 컵을 물에 헹궈 깨끗이 했다. 어차피 쓰레기로 버릴 수 없으니, 깨끗이 씻어 새로운 물건으로 만들어야 했다. 


“원래 쓰레기 아니야. 이것 봐 깨끗이 씻었잖아? 이건 사실… 뭐냐면……” 


뭐라고 둘러댈까 고민 중에 연필이 눈에 들어왔다. 연필꽂이로 쓸까? 아니면 화장품을 넣어두는 용도도 괜찮을 것 같다. 어떻게 쓸지 고민하니, 예상외로 플라스틱 컵을 다르게 활용할 곳이 많았다. 


이왕 상황이 이렇게 된 거, 플라스틱 컵을 정말 필요한 곳에 활용하고 싶었다. 수납통은 집에 많아서, 플라스틱 컵을 수납통으로 쓰지 않아도 되었다. 더 좋은 활용법을 찾는데, [빨래 건조대]가 나를 톡톡 쳤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입모양으로 빨리 말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그리고 슬쩍 [플라스틱 컵]을 가리키는데, 그 녀석은 또 울기 직전이었다.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져 내가 거짓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일단 연필꽂이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빨래 건조대]가 눈에 들어왔다. [빨래 건조대]의 새로운 이름은 풍경을 보여주는 프레임이었다. 그의 새로운 이름을 떠올리다 [플라스틱 컵]에도 딱 좋은 이름이 떠올랐다. 


“화분! 이건 꽃을 심는 화분이야.” 


당장 집에 심을 풀이 없어서, 인터넷으로 화분을 보여줬다. 꽃과 풀을 예쁘게 담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플라스틱 컵]은 우는 얼굴이 아닌 꽃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플라스틱 컵]이 마음에 들어해서 몰래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리고 내일 당장 화분에 심을 식물을 사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물. 설. 여섯 번째 

이름 : 플라스틱 컵

그 물건의 진짜 설명서 : 화분









그림작가 이송련님 인스타 : https://www.instagram.com/song_ryeon/

글 못 쓰는 소설가 브런치 : https://brunch.co.kr/@story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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