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5: 두루마리 휴지 (매주 토요일 연재)
그.물.설 (그 물건의 진짜 설명서)
“나 퇴사하려고.”
대학 동창 김은성은 술잔을 비우면서 말했다. 갑자기 대학 친구를 모으길래, 무슨 깜짝 발표가 있을 것 같았다. 대학 때부터 사귀던 남자 친구와 결혼하는 줄 알고 축하 리액션을 장착하고 왔다. 그런데 술 마시는 내내 김은성은 표정이 굳어 있어서, 결혼이 아니라 실연을 당한 것 같아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말도 안 하고 술만 마시다 던진 말이 ‘퇴사’였다.
예상 못 했던 발표다 다들 잠시 멈췄다. 어떻게 리액션해야 할지 아직 갈피를 못 잡았다. 김은성은 우리 중에서 가장 좋은 회사에 취업했다. 말만 하면 아는 회사였다. 그리고 김은성은 사회생활을 잘하는 편이라 회사에 적응 못해서 퇴사할 것 같지는 않았다.
자기 앞가림을 똑 부러지게 하던 친구라 더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한 퇴사일 것 같았다. 그런데 말하는 표정이 밝지 않아서, 섣불리 퇴사 축하한다는 말이 안 나왔다.
“갑자기 퇴사는 왜?”
다들 눈치 보며 말을 못 하고 있자, 김선하가 총대를 매고 물었다.
“내가 생각했던 일이 아니야.”
김은성은 우울하게 고개를 떨궜다. 술집 음악소리에 묻힐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최대한 귀를 세워 소리를 주워 담았다.
“취업하기 전에 선배들이 그러더라고. 네가 생각하는 만큼 창의적인 곳이 아니라고. 내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드는 게 아니라, 클라이언트 요구대로 만들어야 하니까.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직업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지지 않는 거야. 그래도 ‘나랑 마음 맞는 클라이언트가 있겠지’, ‘내 의견을 클라이언트가 귀 기울여 주겠지’ 같은 기대 말이야.
그런데 일하면 할수록 그렇지 않더라고. 내 의견을 피력할수록 불필요한 회의시간만 길어질 뿐, 바뀌는 건 없었어. 일하면서 계속 이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맞나 싶고.
그런 고민 계속하다가, 퇴사해야겠다 싶더라. 이런 뒤숭숭한 마음으로 회사에 있는 것도 민폐인 것 같아서, 우선 퇴사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천천히 찾아보려고.”
그 뒤로 혼자 술을 몇 잔 더 기울이더니, 화장실에 간다고 자리를 비웠다. 김은성의 고백에 분위기가 차분해졌다. 저절로 몸을 흔들게 하는 노래가 크게 들렸지만, 우리 중에 누구 하나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돈 주니까 다니는 거지. 직업을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김선하는 무거운 분위기가 불편한지 혼자 투덜거렸다. 그리고 갈 사람 가고, 2차 갈 사람만 남으라고 했다. 직업에 의의를 두는 김은성과 달리 김선하는 여가 생활에 의의를 두었다. 오늘 저녁에 어디서 재미있게 놀지, 여름휴가 때는 해외여행을 어디로 갈지, 겨울에는 무슨 운동을 할지 365일 놀 궁리로 바빴다.
김선하의 주도 아래 자리는 정리가 되었다. 술집 문을 나서는 김은성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아픈 배를 쥐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뛰었다. 옆에서 보면 빨리 걷는 것보다 느리겠지만, 지금 낼 수 있는 최대 속도로 뛰는 거였다.
무거운 분위기에서 술을 마셔서 그런지 배탈이 났다. 배 속은 꾸르륵 아우성치고 있었다. 중간에 공중 화장실이 없어서, 빨리 집에 가야 했다.
삐비 빅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에 급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속을 비우고 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술집에서 속을 비우고 왔을 텐데. 김은성의 말을 듣고 머리가 복잡해져, 배 상태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속을 비운 만큼 경건해진 마음으로 책상에 앉아 그림 그렸다. 집안 살림을 거의 그린 줄 알았는데, 화장실 용품은 안 그린 게 많았다. 화장실에서 봤던 물건 중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그렸다.
-새로운 녀석이다.
-이 송, 이 녀석 이름은 뭐야?
새로운 친구가 신기한지 다른 그림이 기웃거렸다. [두루마리 휴지]는 자기 몸을 살피더니, 거울 앞에 서서 자기 몸을 관찰했다.
“이건 두루마리 휴지야. 화장실에 있는 휴지 본 적 있지?”
그림은 나 없을 때 방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새로운 그림인 [두루마리 휴지]는 본 적이 없겠지만, 다른 그림은 화장실에 뭐가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돌돌돌 돌아가는 거?
-그거 막 사라지던데. 그럼 얘도 사라져?
다른 그림의 말만 듣고 있던 [두루마리 휴지]는 몸을 움찔 떨었다. 충격은 받은 듯 목소리도 살짝 떨었다.
-내가 사라진다고?
아연하게 바라보는 눈빛에 갑자기 죄책감이 들었다. 막 태어난 아기에게 너는 곧 죽는다고 말한 죄인 같은 심정이었다. 이 죄책감을 빨리 없애기 위해,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모티브로 한 물건인 두루마리 휴지는 소모품이라 쓰면 사라지는 물건이야. 그런데 너는 그림이니까 사라지지 않아.”
-두루마리 휴지는 어디 있어? 한 번 보고 싶어.
이 송은 그림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두루마리 휴지]는 어떻게 사용이 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 보고 싶어 했다. 휴지의 최후는 아름답지 않아서, 설명하기 꺼려졌다. 설명을 망설이자 [두루마리 휴지]가 재촉했다. 하는 수 없이 사용법을 알려주고, 휴지 몇 조각을 변기에 내리는 것까지 보여줬다. 휴지의 최후를 본 [두루마리 휴지]는 동그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슬퍼했다.
-나는 저렇게 죽고 싶지 않아. 두루마리 휴지처럼 살지 않을 거야.
한참을 울더니 다짐한 듯 [두루마리 휴지]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 물건을 하나씩 뜯어보며 다른 그림에게 사용법 설명을 들었다.
-이 송, 옷장 문 좀 열어줘.
앞장서서 물건 설명을 해주던 [빨래 건조대]는 옷장 앞에 서 있었다. 종이 힘으로 열 수 없는 문이라, 이 송이 꼭 열어줘야 했다.
열린 문 안에는 사계절 옷이 걸려있었다. 옷이 많지 않아서 옷장 하나만 있어도 사계절 나기 충분했다.
-왜 여기 물건은 옷장에 있어?
-옷은 소중히 보관해야 하는 거래. 그렇지 이송?
패션에 문외한이라 옷을 소중히 보관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이 송은 [빨래 건조대] 말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다른 사람은 옷을 소중히 보관하니, [빨래 건조대]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도 옷처럼 소중한 게 되고 싶어.
[두루마리 휴지]는 옷장이 마음에 드는지, 안에서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옷장은 좁고, 문을 닫으면 빛이 사라져 답답한 곳이었다. 쾌적한 방과 비교했을 때 결코 더 나은 장소는 아니었다. 그런데 일회용 휴지보다 소중히 사용되는 옷에 꽂혔는지, [두루마리 휴지]는 옷처럼 옷장에 있고 싶어 했다.
태어난 이유가 물에 풀려 사라질 운명인 휴지보다 옷이 되고 싶은 심리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이 송 역시 ‘휴지와 옷 중에 무엇으로 태어날래?’라고 물으면 고민의 여지없이 옷을 택할 것이다.
그래서 이 송은 옷 중에 [두루마리 휴지] 역할을 정해주기로 했다.
“그럼 휴지 말고, 목도리 어때? 목도리는 길게 풀어서 몸을 감싸는 거야. 날씨가 추운 겨울에 하고 다니는 거지.”
겨울 아이템이라 구석에 있던 목도리를 꺼내 보여줬다. 목에 감아 쓰는 걸 보여주고, 휴지 역시 풀어서 목에 감으면 목도리가 된다고 알려줬다.
-그럼 나도 옷처럼 소중해지는 거야?
[두루마리 휴지]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물건이 아니라 옷장에 고이 보관되는 목도리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응. 너는 이제 목도리야. 휴지처럼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옷장에 고이 두는 물건인 거지.”
[두루마리 휴지]는 기쁜 듯, 개어져 있는 목도리 위에 앉았다. 자신도 목도리니까, 옷장 안에서 사고 싶어 했다. 이 송은 어두운 옷장 안에서 사는 게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정말 기뻐하는 [두루마리 휴지] 모습에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오늘도 그림에게 새로운 설명서를 달아주어 뿌듯했다. 이제 잠들려고 하는데, 핸드폰을 램프를 깜박였다. 확인해보니 이 팀장의 문자였다.
[이 송씨. 내일 오전에 회사 출근할 수 있어요?]
내일 주말 오전 출근은 김 대리였다. 김 대리가 급한 일이 생겨 오전 출근이 힘들어진 것 같다.
주말에는 쉬고 싶지만, 신입이 할 수 있는 답은 오직 하나였다.
[네. 출근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주말 출근이라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송은 내일을 기약하며 빨리 잘 준비했다.
그.물.설. 다섯 번째
이름 : 두루마리 휴지
그 물건의 진짜 설명서 : 목도리
그림작가 이송련님 인스타 : https://www.instagram.com/song_r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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