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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벙돈벙 May 23. 202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84 - 한 끗 차이의 생각

2023년 4월 26일 수요일


 아침에 일어나기도 전에 어디론가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눈을 뜨고 전화를 받아보니 경찰서였다. 블랙박스 영상과 사고 부근의 CCTV를 확인해 본 결과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어서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아야 된다고 말했다. 현재 사정을 설명하고 주말에 간병을 들어가게 되면 조사를 받으러 가기가 힘들 것 같다고 말하니 상대방과 합의만 잘 된다면 조사를 받으러 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번호를 알려줄 테니 피해자와 전화를 한번 해보겠냐고 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경찰관과 전화를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상대방 측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일단 죄송하다고 말한 뒤에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했다. 병원을 가서 검사를 받아보니 타박상 정도였고 병원 측에서는 혹시 모르니 입원을 하라며 제안을 했지만 크게 다친 게 아니라서 입원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의 잘못도 있으니 그냥 보험처리로 끝내자고 하였다. 혹여나 사기꾼이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선량하신 분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나였다. 자동차 일일보험을 들지 않았고 엄마가 가입한 보험사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아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보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일단 보험사와 이야기를 하고 다시 연락을 줘도 괜찮겠냐고 물으니 그러라고 했다. 기다려준다고 하니 다행이었지만 뭐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다.


 일단 자동차 사고 접수를 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보험사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나마 다행인  대략적으로 계산해 보았을  최대 170  정도가 나갈 것으로 예상되었다.  정도면 보험처리가  된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감당할  있는 금액이라는 생각에 한숨을 돌렸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갑갑했다. 잠시 외출을 한다고 하더라도 보험을 들었어야 했는데 설마  사이에 사고가 나겠냐는 안일한 생각이  상황을 만들었다. 세상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건 누가 봐도 부주의한  탓이었다.


 차라리 병원에서 나오지를 말았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2주 동안 세상 밖으로 나올 기회가 주어졌는데 순탄치 않은 걸 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불과 일주일 아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날아다닐 듯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상황이 너무나도 급격하게 바뀌면서 나를 궁지로 몰아세웠다.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하니 소파에 누워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이대로 사라지길 바랐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니 보험사에서 연락이 와서 자동차 보험이 가입되지 않은 걸 확인하고는 다른 담당자를 연결해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기다렸지만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 며칠 내로 보험사에게 다시 연락이 오겠거니 생각하며 나갈 준비를 했다. 지금은 혼자 집에 있으면 어제의 자동차 사고 때문에 우울해질 것 같았다. 어쩌면 오늘 약속이 있었던 게 천만다행이었을 수도 있다. 생각보다 무탈하게 해결될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마음과 찝찝함이 교차되긴 했지만 말이다. 머릿속으론 괜찮다고 되뇌면서도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라 괜찮지가 않았다. 오늘은 정말 술을 마셔야 할 것만 같은 날이었다.


  


 버스를 타고 부산까지 가서 지하철로 갈아탔다. 오늘은 거제도 여행을 함께 했던 친구 중 3명만이 모였다. 한 명은 퇴근을 하고 합류한다고 해서 두 명에서 먼저 만나 태종대로 향했다. 가는 내내 사고 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연애, 결혼 이야기까지 오고 갔다. 친한 친구 중에서는 아직 결혼을 한 친구가 없지만 우리 또래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하고 있으니 갑자기 조급해지는 것 같다며 친구가 말했다. 그 말에 결혼을 하기 전에 연애부터 먼저 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니 이번 연도에는 반드시 연애를 할 거라며 의지를 불태웠다. 몇 년 동안 귀에 딱지 앉게 들었던 소리라 친구의 말이 신뢰가 가지는 않았다. 벌써 결혼을 고민하는 나이가 되고 있다니 시간이 빠르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버스는 태종대에 도착을 했다.


 안 좋은 일이 있긴 했지만 그 일과 별개로 나는 지금을 즐기기로 했다. 나는 앞으로 남 눈치를 보면서 살지 않을 거라고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는 내 말을 듣더니 황당해하면서 원래부터 남의 눈치를 본 적이 없으면서 거기서 더 안 보면 어떡하냐며 놀려댔다. 그 말에 내가 언제 그랬냐고 말하니 고등학생 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서 자기는 아직도 그때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며 말을 이어나갔다.


 고등학교 야자시간에 내가 잠을 자고 있다가 쉬는 시간에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가방을 싸며 노래방에 가자고 하는 모습을 보고 뭐 저런 애가 다 있나 싶었다고 했다. 설마 진짜 나갈 거라고 생각을 안 했는데 누가 끼리끼리 아니랄까 봐 나를 포함한 친구 몇 명이 가방을 싸고 몰래 나갈 준비를 하는 걸 보고 자기 같은 쫄보는 그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었다며 말했다.


 나도 그때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야자시간에 잠을 자다가 쉬는 시간에 시끄러워져서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1교시가 더 남았다는 게 지루해서 나 혼자라도 노래방을 가야겠다며 가방을 쌌다. 같이 갈 사람은 가자며 이야기했더니 몇 명은 걸릴까 봐 걱정을 했고 몇 명은 좋은 생각이라며 나를 따라 짐을 싸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와중에 옆 자리에 있던 남자애와 눈이 마주쳤는데 우리가 신기한 듯 그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서 다른 건물로 살금살금 도망을 갔다. 정문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중앙계단에서 다른 학생들이 선생님한테 걸려서 혼나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조금 돌아가긴 하지만 쓰레기장을 거치고 급식실 뒤쪽으로 둘러 가는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몰래 숨어서 정문을 빠져나가는데 그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성공했다는 기쁨에 서둘러 노래방으로 가서 미친 듯이 신나게 춤을 추며 놀다가 교복치마가 찢어지는 대참사가 일어나서 몇 년이 지나도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어버렸다.


그때 내가 공부를 하고 있던 친구들을 꼬드겨서 노래방을 가자고 했을 때 솔직하게 자기도 나가고 싶긴 했지만 간이 쫄려서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학창 시절 내가 유일하게 해 봤던 일탈이긴 하다. 웃긴 건 그 당시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 야자를 빼고 노래방을 갈 거라고 했더니 흔쾌히 넘어갔다. 무슨 수업을 듣고 어떤 공부를 했냐 보다는 친구들과 함께 놀았던 것들이 더 기억에 남는 것 같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친구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세상 눈치를 많이 보는 타입이 아니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그렇게 한참 수다를 떨며 예약한 곳으로 찾아가는데 식당이 전혀 없을 것 같은 길이 나왔다. 지도를 보며 따라가는데 공사장 들판 사이를 가로질러 가라고 안내를 했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아리송해하면서 직진을 하고 있으니 곧이어 우리 눈앞에 바다가 펼쳐졌다.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던 곳에 조개구이 식당 간판이 즐비한 것을 보고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도착을 해서 친구에게 어디냐고 전화를 했는데 도로가 막히는지 30분 뒤에 도착할 것 같다고 말했다. 어디서 시간을 때워야 할지 난감했는데 다행히 친절한 사장님의 배려로 식당 안에서 친구를 기다릴 수 있었다. 나중에 일행이 오면 불이랑 음식을 갖다 주겠다며 먼저 셀프바를 이용하고 있어도 된다고 안내해 주었다.


 셀프바에 번데기가 있는 걸 보고 조개구이가 나오기도 전에 먼저 술부터 들이켰다. 단백질 덩어리인 번데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고 있으니 친구가 도착했다. 사장님은 친구가 오는 시간에 딱 맞춰서 조개구이를 가지고 오셨다. 그 친절함에 다시 한번 더 감동을 받았다. 음식이 나온 걸 보니 오늘의 선택이 만족스러웠다. 몇 년 만에 바닷가에서 조개구이를 먹고 있으니 오늘 아침에 느꼈던 우울감이 무엇이었나 싶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역시 사람은 단순하게 사는 게 제일 마음 편한 것 같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평온한 저녁을 보내고 대리 기사님을 불러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내내 수다가 끊임이 없었고 기사님은 신난 우리들을 보며 노래까지 틀어라고 했다. 마치 저녁 야경을 구경하며 드라이브하는 기분이었다. 아침에 했던 걱정들이 무색하리만치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좋은 시간을 보낸 덕분에 내가 만든 지옥 속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다. 어쩌면 사는 게 천국과 지옥이라고 느끼는 건 한 끗 차이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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