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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벙돈벙 May 22. 202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83 - 예기치 못한 사고

2023년 4월 25일 화요일


 오늘은 할머니와 목욕탕을 가기로 한 날이다. 며칠 전부터 계속 목욕탕을 가자고 해서 한 번은 가야 할 것 같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오전에 병원을 갔다가 오후에 집에 온다고 했었는데 할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나를 찾아왔다.


 새벽에 겨우 잠이 들어서인디 쉽사리 깨어나기가 어렵다. 오후에 온다고 해놓고 왜 지금 온 거냐고 하니 할머니는 신경 쓰지 말라면서 더 자도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뭘 그리 분주하게 준비를 하는지 거실에서 소리를 내며 마치 내가 들으라는 듯이 손님이 왔는데 나와보지도 않는다며 혼잣말을 했다. 결국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거실로 나갔다.


그러면서 바리바리 싸들고 온 짐을 풀어헤치며 식혜랑 음료수를 먹으라고 했다. 지금은 막 일어나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고 하니 건강에 대한 잔소리 폭격이 시작되었다. 목욕탕에 가져가서 먹겠다고 하니 할머니는 그제야 내 귀를 때리던 잔소리를 거두었다. 왠지 아침부터 들들 볶이는 기분이라서 너무 피곤했다.


 바깥의 날씨는 흐리고 비는 추적추적 내렸다. 할머니랑 둘이서 목욕탕을 가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아마 마지막으로 갔던 게 작년이었던 것 같다. 작년에 왔을 때도 느꼈지만 목욕탕은 몇 십 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바뀐 게 있다면 이제는 더 이상 찜질방을 운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예전에도 찜질방은 장사가 잘 될까 싶은 의문이 들긴 했으나 막상 폐쇄한 것을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안 좋았다.


 내가 나이가 든 만큼 목욕탕도 오랜 세월을 피하지 못하고 여기저기가 많이 낡아 있었다. 탕 안에서 한결같은 공간을 보고 있자니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온 것 같았다. 나만 빼고 세상이 멈춰버린 기분이 들었다. 초등학생 때는 항상 주말 저녁마다 가족끼리 목욕탕을 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목욕탕 안에서 마시는 음료수는 왠지 모르게 더 달게 느껴졌고 목욕을 마치고 나서는 서로 때가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자랑을 하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소소한 행복이었다. 그러다 함께였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어느 순간 돌아보니 그 시간은 다시 오지 않았다.


 초등학생이었던 내 기억 속에 있는 할머니는 살집이 있고 피부가 탱탱했었는데 지금 보니 나보다 더 야위었다. 탱탱했던 피부는 어느새 나이의 물결이 생겼고 다리는 근육이 다 빠져서 앙상한 나뭇가지 같았다. 할머니 눈에 비친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그리고 곧 여든을 앞둔 할머니는 나에게 있어서 여전히 정정했던 60대로 보였다. 하지만 목욕탕에서 그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서글퍼졌다. 내가 큰 만큼 할머니는 작아져 있었다. 할머니는 매번 나를 보며 자신은 지는 꽃이고, 나는 피어나고 있는 꽃이라고 했는데 그런 내 눈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꽃으로 보였다.


 또 하나 동네 목욕탕의 묘미는 아는 사람을 마주친다는 것이다. 마당발인 할머니와 목욕탕을 들리면 항상 아는 지인을 만나 손녀라고 소개를 해서 민망하게 인사를 나눠야 했다. 어쩌다 보니 오늘도 아는 사람을 만나서 탕 안에서 동네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물론 그 사람들과 나는 초면이다. 개운하게 목욕을 끝내고 머리를 말리고 있으니 매점 아주머니가 바나나 우유를 건넸다. 어리둥절한 채로 받고 옆을 보니 탕 안에서 마주친 아주머니가 사주신 거였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하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예전에도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에게 음료수를 사줬던 게 기억이 났다. 나는 동네 사람들의 따뜻한 정을 받으며 컸던 아이였는데 지금의 나는 그들처럼 따뜻한 어른이 되지는 못한 것 같다.


 목욕을 하고 나서 시장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가서 콩나물 국밥을 먹었다. 할머니와 함께 하다 보면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옛날에는 할머니와 자주 갔던 장소들이 나에게는 이제  몇 년 만에 들릴까 말까 하는 장소로 변한 걸 보니 많은 생각이 스쳤다.  모두들 떠나버린 이 동네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추억을 안고 우리와 함께 했던 장소를 지키고 있었다. 분명 시간이 지났으니 모두 변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들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이대로 집을 가기는 아쉬워서 바람이라도 쐬러 가자고 했다. 내가 아니면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모시고 드라이브를  일이 없었다. 서울에 올라가기 전에는 차가 있어서 수시로 드라이브를 다녔었는데 내가 서울로  뒤부터는 그럴 일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 날씨가 좋지는 않았지만 병원에 들어가기 전에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할머니집에 가서 짐을 내려놓고 할아버지를 꼬드겼다. 비가 오는데 어디를 가냐 말을 하면서도 나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외출 준비를 하셨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취향을 고려하여 트로트로 선곡을 하고 간절곶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손자가 병원에 있는데 우리끼리 놀러 다니는 게 맞는지 죄책감이 올라온다고 했다. 나는 그동안 간병을 했으니 이 정도의 자격은 된다며 그런 내가 가자고 한 거니 괜찮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내 말에 코웃음을 치면서도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번 가보자고 말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카페에 도착해서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두 테이블 밖에 없었고 주변은 고요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아이스를 시켰더니 비 오는 날에 무슨 차가운 걸 마시냐며 할아버지가 한 마디를 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음료수를 다 마셨더니 할머니는 자신의 것까지 더 마시라며 나에게 건넸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며 괜찮다고 거절을 했지만 할머니의 권유는 계속되었다. 그래서 재빠르게 화제를 돌리며 어제 먹었던 칼국수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할머니가 요즘 입맛이 없다며 밥은 안 당기고 칼국수정도는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며 말했다. 밥 먹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밥을 먹냐고 말하니 이제는 저녁이라서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밥을 먹고 온 지 3시간도 채 안 됐는데 벌써부터 저녁 이야기가 나와서 머리가 어질 했다. 카페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시간을 보니 4시가 조금 넘었다. 할머니는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저녁으로 간단하게 칼국수를 먹고 들어가자고 해서 결국은 어제 먹었던 것과 같은 메뉴를 오늘 또 먹을 수밖에 없었다. 얼큰한 게 먹고 싶다고 해서 동네에 있는 칼국수를 검색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가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챙겨드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소스를 만들고 반찬을 가져오고 샤브샤브와 칼국수를 끓이고 볶음밤을 볶았다. 제일 젊은 내가 모든 것을 다해야 했지만 불만은 없었다. 다만 할머니를 과도한 사랑은 옆에 있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먹고 있는데도 계속 많이 먹으라며 말하고 그만 먹고 싶을 때도 더 먹으라며 음식을 건넨다. 내가 알아서 먹겠다고 말을 하면 알겠다고 하면서도 1분도 안 돼서 다른 음식 먹어보라며 제안을 했다. 가뜩이나 챙겨야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옆에서 너무 말을 많이 해서 기가 빨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저녁을 먹다가 할머니의 잔소리 폭격에 지쳐버렸다.


 심지어 운전을 하고 있을 때도 말을 시켜서 정신이 없었다. 갑자기 정육점에 가자고 하는 바람에 어디냐고 물었더니 큰길로 쭉 가다 보면 있다고만 대답을 해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결국은 길을 잘못 들어섰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안 되면 그냥 가자는 말을 했지만 분명 내일이라도 버스를 타고 다시 나올게 뻔해서 정육점으로 향했다. 계속되는 할머니의 이야기에 지쳐서 빨리 집에 모셔다 드리고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겨버렸다. 하천 옆 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술 취한 사람이 차도로 넘어오는 게 아닌가. 나는 직진을 하고 있는데 오른쪽에서 걷던 사람은 왼쪽으로 점점 가까워졌고 설마 하는 마음으로 클락션을 울리며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결국엔 교통사고가 났다. 그 순간 아차 싶었다. 잠시 타는 거라서 자동차 보험을 안 들어놓았다. 브레이크를 밟는 동시에 황당하게도 타이어가 새끼발가락을 살짝 찧었다. 아저씨는 가만히 서있다가 자신의 발을 보더니 비명을 지르며 도로에 드러누웠다.


 갑자기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일인가 싶었다.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을 하는데 크게 다친 건 아니었다. 상태를 보니 술을 거하게 드신 듯했다. 일단 촬영을 하고 나서 경찰을 불렀다. 몇 분 후에 경찰들이 와서 사건경위를 조사하고 음주측정을 했다. 이내 119가 와서 이것저것 상태를 확인하니 크게 다치진 않았다면서 걸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저씨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나는 블랙박스 영상을 넘겨주고 추후에 확인을 하고 연락을 주겠다며 일단락되었다.


 뒷좌석에 타고 계시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앉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녁까지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작스러운 사고가 발생했으니 얼마나 놀랐겠나 싶었다. 할머니는 괜히 자기가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해서 이런 일이 생긴  같다며 미안해했다. 사고는 내가 쳤는데 할머니가  자책을   길로   나였고 오늘 놀러 가자고  것도 나라면서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사람이 운이 나쁘면 이렇게도 나빠진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더니 치료비가 많이 나오면 자기가 대신 내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다.    


 오늘의 사고로 집에 와서도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일단 블랙박스 영상을 옮기고 계속 돌려봤다. 한문철 블랙박스를 찾아보니 나와 비슷한 듯 다른 상황이 있었다. 결론은 운전자 과실이 70%였다. 영상을 보니 이와 같은 경우에도 내 과실이 70%가 될 것 같았고 보험이 안 들어져 있었기에 얼마가 나갈지 걱정스러웠다. 엄마한테 사고 소식을 전하고 넋이 나가 있었다.


 병원에서 나온 겨우   사이에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유를 만끽하며 행복하게 있었는데 며칠 만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하필 이런 일까지 생긴 건지 절망스러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사고 때문에 내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하기엔 억울했다. 어떻게 얻은 휴가인데 걱정만 하다가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가족들도 상대방이 크게 다친  아니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마음 편히 있으라고 주었다. 오늘  때문에 남아있는 약속들에 지장을 주고 싶지는 않아서 무던하게 넘기기 위해 노력했다. 세상이  이렇게 나를 혹독하게 키우는지 모르겠다. 잠시 나와서 마음 편히 쉬는 것도 허락을  하겠나 보다.  


 

 


 


    

 


 


  


 


 


 목욕탕, 국밥, 간절곶, 칼국수, 차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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