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22 - 불행의 낭떠러지

by 덤벙돈벙

2023년 2월 23일 목요일


오늘은 아침부터 비몽사몽 하다. 2시에 기사 시험이 있어서 밤을 새웠다. 공부한 기간을 따지면 일주일도 채 되지 않는다. 정신없는 상황에서 시험준비는 다음에 할까 고민을 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조바심에 원서 접수를 하였다. 심지어 책에 있는 기출문제도 다 풀어보지 못한 채로 시험장에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내가 주구장창 풀고 있는 문제는 기사가 아니라 산업기사 문제라는 것을 말이다. 내용은 같겠지만 난이도가 다르다고 들었는데 망했다. 수험표도 준비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대책이 없다.


시험장으로 가는 길에 수험표를 출력하려 했는데 전에 갔었던 인쇄소가 부동산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건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2군데를 더 들렸지만 개인 프린트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 어차피 예전에도 시험 치러 갔을 때 수험표는 확인 안 했다. 이번에도 신분증만 있으면 될 거라고 생각하며 시험장으로 갔다. 시험은 CBT방식이라 다른 준비물은 필요 없었다. 대기실에 가보니 나이도 성별도 다양한 사람들이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도 미처 보지 못했던 과목을 급하게 공부했다. 물론 준비를 짧게 해서 기대는 없다. 불합격일 것 같은 예감이었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양심도 없이 합격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시간이 가까워지니 감독관이 들어와 휴대폰 전원을 끄고 컴퓨터실로 이동하라고 안내했다. 시험 칠 자리를 확인하니 자리 번호는 2번이었고 맨 앞이었다. 내 옆 자리에 위치한 모니터를 슬쩍 보니 정보처리기사라고 적혀있었다. 보아하니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다른 과목을 치는 것이었다. 생년월일을 보니 나랑 동갑이었는데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길래 시험을 치러 오지 않았는지 호기심이 생겨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내가 남 걱정을 할 때가 아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시험 안내를 듣고 긴장하지 않은 척하며 마우스를 잡았다. 모니터에 뜬 시험문제를 봤는데 젠장 1번부터 글러먹었다. 모르는 문제였다. 망했다는 생각에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빨리 치고 나가고 싶었는데 모르는 문제가 꽤 많이 나왔다. 마지막까지 정답을 알 수 없었던 문제가 10개 이상이었다.

100문제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풀고 제출을 하면 합격여부가 바로 나온다. 과목당 40점 이상, 평균 60점. 한 과목이라도 과락이 나오면 불합격이다. 문제를 다 풀고 제출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봤는데 내 눈앞에 보이는 빨간색 글자 ‘불합격’이었다. 과목 과락은 면했지만 4점 차이로 떨어졌다. 씁쓸한 마음으로 짐을 챙겨 시험장을 나왔다. 2 문제만 맞혔어도 합격이었다는 사실에 조금만 더 문제의 답을 고민해 볼 걸 그랬나 싶으면서 그냥 나와버린 나를 탓하며 후회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너무도 무겁게 느껴졌다.


착잡한 마음에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풀이 죽은 목소리로 불합격 소식을 알렸다. 친구는 아깝다면서 짧게 준비를 했는데 그 정도면 잘한 거라며 위로를 했다. 자기는 시험 준비하다가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아서 카페 알바를 시작한다고 했다. 친구의 말을 듣고 나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하니 나에게 무슨 소리냐면서 그 와중에 시험도 치고 충분히 잘하고 있다며 토닥여 주었다. 그런데 나는 이미 가족, 연애, 취업에 3 연타로 공격을 받아서 멘털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다. 우스갯소리로 이 말을 하니 친구는 그런 시기가 있다면서 자기가 봐도 지금은 마치 세상이 나를 밀어버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나를 어느 낭떠러지까지 떠밀어야 만족하냐며 앞으로 얼마나 좋은 일이 있으려고 그러겠냐라고 농담을 하면서 위안을 삼았다. 그런 내가 위태로워 보였는지 친구는 힘찬 목소리라 “파이팅”이라고 외치라고 말했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파이팅이라고 하니 다시 하라고 했다. 내 기분을 풀어주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마지막까지 서로를 응원하며 전화를 끊었다. 힘내야지라는 마음을 먹긴 했지만 갑자기 울적해지면서 눈물이 왈칵 흘러나왔다. 머리에는 수만 가지의 비관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왜 이럴까, 불행은 왜 한꺼번에 찾아오는가를 생각하며 걸었다. 무엇을 하더라도 결과가 내 마음 같지 않다. 자신감이 바닥을 쳤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떨어지면 다시 시도하면 되고 힘든 관계는 끊어내고 새로운 시작을 하면 된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잘 안 된다. 그 조그마한 타격들이 모여 나를 주저 않게 만들었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것들이 두렵게만 느껴졌다. 집으로 가는 내내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했다. 근데 나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다. 꿋꿋하게 이겨낼 거다. 그런 다짐을 하는데도 왜 이렇게 의욕이 떨어지는지 순간적으로 모든 걸 놓고 싶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달려오는 자동차에 부딪히면 많이 아플까 얼마나 다칠까 생각했다. 잠을 못 자서 그런지 판단력이 점점 흐려졌다. 오늘 엄마를 마중 나가기 전에 우선 집에 가면 잠부터 자야겠다.


4시쯤 잤는데 일어나 보니 창 밖은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누워서 눈만 뜨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이러고 있는 나의 모든 상황이 원망스러우면서 잘 헤쳐나가지 못하고 있는 내가 너무 한심했다. 불 꺼진 방에서 홀로 앉아 큰 소리로 울었다. 엄마는 생각하면 스트레스받는다며 신경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말이 나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 엄마와 나는 서로를 아슬아슬하게 보고 있다. 나는 엄마가 잘못될까 봐, 엄마는 내가 잘못될까 봐. 원래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내 선택이니 스스로 책임을 지라고 하거나 무심하게 다음에 치면 되지라고 말했을 텐데. 엄마는 그렇게 책임감을 가지게끔 나를 강하게 키웠다. 그런데 요즘 들어 내가 불안해 보였는지 하기 싫은 건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고 슬픔은 각자의 몫으로만 숨겨왔는데 최근 들어서 많은 걸 들키게 된다. 그래도 새롭게 알게 된 것도 많다. 애써 괜찮은 척하지 않고 나약한 모습을 보여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나와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