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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벙돈벙 Mar 25. 202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25 - 고마운 존재

2023년 2월 26일 월요일


불행 속 즐거움


 나에겐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나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들이 있다. 고등학생 때 처음 만난 건 아니고 지역이 좁다 보니 초, 중, 고등학교를 같이 나와 얼굴이 익숙하긴 했지만 친하지는 않았던 그런 관계라고 보면 된다. 물론 18살이었던 그 당시에도 지금까지 연락하며 지낼 거라는 생각은 못했었지만 말이다. 함께 어울려 다니는 무리의 인원이 많았고 아무래도 사람이 많다 보면 분열이 일어나기 마련이니깐 스쳐 지나갈 인연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당연히 그 해에만 친하게 지내고 끝일 거라 생각했는데 우리의 인연은 생각보다 더 질겼다. 내년이면 알고 지낸 지가 벌써 10년이란 시간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수원역에서 엄마를 배웅하고 집에 잠시 들러서 짐만 내려놓고 한남역으로 갔다. 집을 들렸다 가느라 늦게 도착할 것 같다 하니 친구들은 카페에 가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서둘러서 지하철을 타는데 경의 중앙선의 배차 간격이 나의 급한 발걸음을 막아섰다. 집에서 경의 중안선 까지는 얼마 안 걸렸는데 여기서 20분을 기다려야 한다니 약속 장소에 빨리 가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승강장에 앉아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앞에 위치한 아파트가 눈에 들어왔다. 내 눈앞에는 218동이라고 적힌 건물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아파트 틈 사이로는 햇빛이 들어왔다. 나는 의미 따위는 없어 보이는 아파트 동 숫자에 의미를 부여했다. 218. 2월 18일 동생 생일이랑 숫자가 같다. 남들 눈에는 특별할 것 없는 이 숫자가 나한테는 왜 슬픔과 희망으로 보이는 걸까. 아파트를 비추고 있는 저 햇살처럼 우리에게도 따뜻한 봄날은 있을 거라 믿었다. 일주일 안으로 자가호흡이 돌아오겠지. 나는 내 동생이 해낼 수 있다는 걸 안다. 주책맞게 울 뻔했다. 때마침 열차가 와서 다행이었다.


  한남역에 도착하니 역 앞에서 만나자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원래는 4명이 모이기로 했는데 한 명은 일이 생겨서 나오지 못했다. 한남에는 뼈찜을 먹으러 왔는데 정작 먹으러 가자고 했던 당사자만 빠졌다. 셋이서 걸어가며 뼈찜과 함께 대낮부터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술을 마셔보자고 했다. 좁은 틈을 지나니 식당이 나왔다. 입구만 봤을 때는 협소할 줄 알았는데 식당 내부는 테이블수가 생각했던 것 보더 더 많았고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시계는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주변 테이블을 둘러보니 술을 먹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우리는 슬쩍 눈치를 보며 소주와, 맥주를 시켰다. 음식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소맥부터 들이키고 있으니 얼마 안 돼서 아귀찜처럼 생긴 뼈찜이 등장했다.


 친구들은 내가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묵묵히 기다려주며 재촉하지 않았다. 여정이는 그전에 이미 만나서 자세한 상황을 알고 있고, 민영이는 대략적인 것만 알고 있어서 그 둘의 사이의 적정 지점을 찾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담담하게 동생의 상태와 현재 가족들의 상황에 대해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는 남들 앞에서 눈물이 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혼자 있을 땐 툭하면 나던 눈물이 어쩜 그렇게 메마른 것처럼 다른 사람 앞에서는 한 방울도 나올 기미가 안 보이는지 알 수가 없다. 내 이야기를 듣고 민영이는 오열을 했다. 그 덕에 글썽이던 여정이의 눈물은 쏙 들어가고 나 또한 가뜩이나 메말렀던 눈이 더 건조해졌다. 여정이는 그 모습을 보고 당황스러워하며 말했다. 내가 같이 울어주고 싶은데 차마 낮이라서 못 울겠다며 얼굴이 눈물범벅으로 된 민영이게 그만 울라고 말했다.


 젊어 보이는 여자 셋이 대낮부터 뼈찜과 술을 마시는 게 이상하진 않지만 웃기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대성통곡까지 남들의 궁금증을 자극시키긴 충분했다. 남들의 시선이 약간 신경 쓰이긴 했지만 뭐 어쩌랴. 사연이 있을 수도 있지. 동생은 내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자주 참석했다. 자기 친구들까지 데리고 와서 우리 집에서 거한 파티가 벌어졌을 때도 있다. 그렇게 자주 만나면서 내 친구들과도 단순한 친구 동생으로만 알고 지내는 서먹한 관계는 아니었다. 심지어 내 동생과 친구들의 동생들도 동갑이라 서로가 다 아는 사이다. 특히 민영이는 내 동생이 중학생 때 과외를 해준 적이 있고 성인이 되어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 말고 동네 친구처럼 지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보다도 동생의 소식을 듣고 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나 다음으로 내 친구 중에선 동생을 가장 잘 알기에 무조건 건강하게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미안하다며 울었다. 자기들도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보다는 엄마를 더 걱정했는데 나부터 걱정을 했어야 한다고 했다. 그게 뭐가 미안한 일이냐며 나도 그 당시에는 나보단 엄마가 제일 걱정이었다고 하니 그래도 따지면 자기들은 엄마 친구가 아니라 내 친구들이니 나를 먼저 걱정했어야 했다며 그걸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했다. 한 없이 강하고 잘 이겨낼 것 같아서 걱정을 안 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버티는 모습이 속상하다고 했다. 친구인데 제일 먼저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만으로도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생각에  큰 위로가 되었다. 이런 친구들이 내 곁에 있는 거 보니 아무래도 나름대로 인생을 나쁘지 않게 잘 살았나 보다.


 한바탕의 술자리가 끝나고 식당에서 나와서는 세빛섬까지 하염없이 걸었다. 오랜만에 한강에서 산책을 하는 것 같다. 민영이는 식당에서 혼자 달리다 거나하게 취해버렸다. 여정이 입에서 정신 차려라는 소리가 몇 번이나 나온지도 모르겠다. 반쯤 미쳐버린 이 상황이 재밌었다. 친구들과 같이 있던 순간만큼은 그동안 나를 에워싸던 먹구름조차 걷게 만들었다. 언제는 한강 보면서 맥주를 마시자던 사람은 눈이 반쯤 풀려 맥주 대신 음료수를 마시고 여정이와 나는 맥주를 마시며 한강의 찬 바람을 만끽하였다. 그런데 더 있다가는 얼어 죽을 것 같아서 한 30분 정도 앉아 있다가  택시를 불러 여정이의 집으로 향했다.


 갈비를 먹으며 2차를 하자고 했던 민영이는 택시를 타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고 집에 도착해서는 아주 시원하게 게워낸 후 다시 잠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커피와 크로플이 도착해서 민영이를 다시 깨웠다. 그랬더니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먹다가 10분만 잠깐 자겠다고 해놓고 2시간을 넘게 잤다. 민영이가 잠든 사이 여정이랑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정이도 한 때 스스로 힘든 줄 모르고 있었다가 어느 날 침대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고 했다. 어둡고 텅 빈 방 안에 홀로 있던 어느 날 자기한테 어떠한 공기의 저항도 느껴지지 않으면서 마치 자신과 세상이 동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다들 그런 날이 있는 것 같다며 잘하고 있으니 의심하지 말라고 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며 나는 본인에게 엄격한 것 같다면서 그것도 엄연한 자기 학대라고 하였다. 그 말에 동의했지만 웃긴 건 그렇게 말하는 여정이도 나랑 비슷했다. 예전에는 그 말을 내가 여정이한테 했었다.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내 친구들은 나랑 성격은 다르지만 성향이 다 비슷했다. 항상 남한테는 관대하게 하면서 자신한테는 더없이 엄격하고 모질었다. 그렇기에 그 말이 나를 잠깐이나마 숨 쉬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평상시에 혼자 있기 그러면 언제든지 자기 집으로 와도 된다고 했다.


 민영이는 우리가 한참 수다를 떨고 있을 때도 미동 하나 없었다가 자고 나니 숙취에서 벗어났는지 남들이 잠들 때쯤 제정신이 되었다. 친구들끼리는 했던 이야기는 항상 다시 해도 늘 재밌고 새롭다. 별 것 아닌 것도 웃기다. 벌써 12시가 넘어서 자려고 누웠다. 그리고 친구들끼리 만나면 연애이야기도 빠질 수가 없다. 남자친구와의 연락 문제를 떠올리니 생각이 많아졌다. 혼잣말 같지 않은 혼잣말로 허공에 대고 이야기했다.


“왜 이렇게 속이 갑갑하냐.”

나의 큰 혼잣말에 들려오는 민영이의 대답은 이거였다.

“똥 쌌잖아.”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상황이 황당해서 서로 미친 듯이 웃으며 이야기했다.

“아니 그게 아니잖아. 애가 공부하더니 어떻게 더 일차원적이 됐지. 요즘 힘드냐?”

“아, 그거 아니었냐? 난 또 속이라고 해서 그거인 줄. 나 요즘 왜 이렇게 문해력이 딸리냐.”


 친구들과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이 환기가 되었다. 어쩌면 각박한 세상을 잘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유쾌하게 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할 지도 모르겠다. 지금이 내게 가장 필요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나의 어려움을 실컷 공감해 주다가  별 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게 도와주는 것 말이다. 친구라는 존재가 그렇다. 어쩌면 가족보다 나를 더 잘 알고 내가 아는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정확하게 볼 때도 있다. 셋이서 추억 삼매경에 빠져 불 끄고 누워서도 한참을 수다를 떨다가 새벽이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나 힘든 날이 있다. 아무 말 안 하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하고 누구에게 말하자니 혹여나 부정적인 감정으로 부담을 줄까 봐 걱정한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 각자의 삶이 힘든데 괜히 내 투정으로 더 힘들게 하는 것 아닌지 나의 부정적인 감정에 주변인들까지 동요되는 건 아닌지 미안했다. 상대방에게 피해를 줄까 봐 사람들을 만나는 게 더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싫었다. 그런데 나는 참 운이 좋다. 내가 어떤 모습을 보이더라도 항상 내 곁을 지키며 함께 해주는 친구들이 있다. 나의 슬픔까지 기꺼이 가져가주며 함께 울어주는 친구들이 많다. 요즘은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며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어떤 모습을 하던 항상 옆에 있어주는 친구들이 너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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