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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벙돈벙 Mar 28. 202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28 - 인생의 발자취

2023년 3월 1일 수요일

바뀐 밤낮은 여전히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남들이 자는 시간에는 깨어있고 남들이 활동하는 시간에는 침대에 누워있는 생활을 지속하고 있다. 엉망으로 바뀌어 버린 패턴은 되돌리기 힘들었다. 심지어 내일은 채용박람회를 가기로 했는데 혹시 모르니 이력서도 미리 준비를 해야 했다. 퇴사를 하고 국민취업제도의 도움을 받았었는데 벌써 6개월이 되어 3월은 마지막 구직수당이 나오는 달이 되었다. 구직촉진수당을 받으려면 한 달에 두 번씩 취업활동을 해야 하는데 이번 달은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서 고용센터에 방문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기업이든 상관없이 반드시 한번 정도는 입사지원을 해야 한다. 어차피 이 상황에 일을 못할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자기소개서는 작성해야 된다.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억지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심지어 박람회에는 내가 원하는 직종도 없어서 이력서를 쓸 의욕이 생기지도 않았지만 취업활동의 일환으로 억지로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내가 했던 것을 돌아봤다. 이력서에 채워지는 자격증과 활동, 경력을 보니 내 나름대로 쉬지 않고 달려왔다는 게 보였다. 그런데도 내가 열심히 살았다고 스스로를 인정해 주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실 완전하게 만족하지는 못하지만 부족한 점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법은 배우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실패하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빨리 털어내며 일어난다. 남들은 그런 나를 보고 회복 탄력성이 좋다고도 말한다. 내가 생각해도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짧고 굵게 심연까지 깊게 좌절했다가 다시  빠져나오는 시간이 얼마 안 걸리는 것 같긴 하다.

 

 방 안에 홀로 앉아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리를 해보았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왔지만 남들처럼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대신 학원을 다니면서 자격증을 취득했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까지는 야간자율학습을 했지만 2학기부터는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합법적으로 빠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어느 누구보다 분명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치열하고 혹독하게 배웠다. 방학이면 학원에 오전 10시에 가서 오후 9시까지 자격증 준비를 했다. 결국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국가자격증 2개를 가지고 있게 되었다. 대학교에 가서도 1학년 때까지는 고등학생처럼 수업이 끝나면 학원으로 달려갔다. 민간자격증에서 국가자격증으로 바뀌는 첫 해였기에 남들이 대학생활을 즐길 때 나는 자격증을 따러 다녔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총 4개의 국가자격증을 얻게 되었다.


 또한 내가 다니던 대학교는 교직이수가 가능하였는데 우리 과에서는 5명을 선발했다. 처음에는 선발인원이 너무 적어서 기대가 없었다.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열망도 없었다. 그러다 첫 성적이 나왔는데 생각보다 잘 봤다. 믿져야 본전이라고 어차피 해도 안 해도 나쁠 게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미래를 생각했을 때 내가 무엇을 하게 될지 모르니 교직 수업을 신청했다. 시작을 했으니 앞만 보고 달렸다. 그렇게 나는 교직에 선발이 되어 대학교 졸업을 할 때는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고 학교에서 빨리 탈출하고 싶은 욕심에 조기졸업도 했다. 동기들보다 6개월 빠르게 세상 밖으로 나온 나는 그 길로 임용고시를 준비했다. 안 하던 공부를 하려니 효율적으로 공부하는 방법을 잘 몰랐고 하루종일 집 밖을 나가지 않아 좀이 쑤셨다. 그때는 불안감이 최고치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라서 그런지 감정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것 같다. 국가고시를 만만하게 보고 반년 만에 붙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보란 듯이 참패했다.


 임용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운이 좋게도 교생실습을 했던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그 제안에 나는 고등학교에서 1년간 기간제 교사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초년생이었던 나에게 직장생활도 처음인데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했다. 아직 누구를 가르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경험을 더 쌓기 위해 그 길로 서울에 곧장 상경했다. 하지만 나의 부푼 기대가 두 동강 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 첫 직장부터 만만치 않았다. 조현병 상사에 어느 시대에 머물러 있는지 의심이 되는 임금 그리고 사라진 점심시간 이 모든 게 나를 미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2020년대에 이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믿거나 말거나지만 놀랍게도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나도 알고 싶지 않았지만 직접 겪게 되었다.


 더 다니다간 도저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어딜 가든 최소 1년은 해야 한다라는 내 신념은 무너진 지 오래였다. 그렇게 서울에서의 첫 직장을 5개월 만에 퇴사를 하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다음 날 곧바로 이직한 직장으로 출근을 했다. 서울에서의 첫 직장보다 더 최악인 곳은 앞으로도 만나기 어려울 듯싶다. 그런 의미에서 두 번째 직장은 무난하게 1년을 버텼다. 그런데 일을 하면서 번아웃이 찾아왔다. 매출에 혈안이 된 사장이 운영하는 직장에서 직원은 단지 대체 가능한 소모품에 불가하다. 마음에 안 들면 갈아 끼우면 되는 그런 하찮은 존재하고 여긴다. 직장을 다니면서 고통스러웠다. 내 발에 맞지 않는 구두를 신어서 뒤꿈치가 까진 것처럼 아팠다. 나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숨이 막혔다. 직장을 다니면서 한 동안은 우울감에 시달렸다.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을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나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이제 와서 다른 분야에 도전을 한다는 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한 순간에 길을 잃어버린 낙오자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퇴근을 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면 눈물이 났다. 어두워진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어떻게든 이 현실을 벗어나고 싶고 미래가 불안해서 닥치는 대로 무언가를 시도했다. 일단 대학원을 고려해 보며 학점은행제로 심리학을 들었다. 9시에 퇴근을 하고 강의를 듣는데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 조제관리사 자격증도 준비하고 이모티콘도 그리고 글도 썼다. 말 그대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무리하게 이것저것 시도를 했다. 그 결과 나의 초조함은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는 꼴이 되었다. 자격증 시험 불합격, 이모티콘 미승인, 작가 신청 미승인. 그냥 내 인생이 실패 투성이었다. 무언가를 다시 시도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시 도전한 것 마저 실패를 해버리면 그때는 나 자신이 정말 한심해서 못 견딜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직장에서는 부정 승진이 일어났다. 그래도 1년만 견디자는 심정으로 꿋꿋하게 다녔다. 그런데 나보다 늦게 들어온 직원을 먼저 승진시켜 놓고 2달도 안 돼서 그 직원과 함께 공동 팀장을 맡아주었으면 한단다. 이유는 단순했다. 승진시켰던 직원이 혼자서는 팀장역할을 못하겠다며 내가 옆에서 도와주면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단다. 적응할 때까지만이라도 옆에서 도와주라는 말에 정이 떨어질 때로 떨어져 버린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팀장을 맡던지 아니면 그만두던지 결정을 하라고 해서 미리 짜인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2개월만 더 근무를 하고 퇴사하기로 했다. 원장님은 내 자리를 대신할 신입을 미리 뽑아놓고 7월 달까지만 하고 나가라는 무언의 압박을 주었다. 1년이 넘지 않았지만 퇴직금으로 30만 원을 챙겨줄 테니 나가줬으면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얘기한 대로 9월까지 하고 퇴사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2개월 동안 원장님의 어떠한 차별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버텼다. 그나마 내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동료들과는 사이가 좋았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내가 최초로 원장님이 쫓아내지 못한 직원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렇게 1년 무사히 넘긴 나는 9월에 퇴사를 하고 한 동안은 인생에 회의감이 들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게 맞는지 자신이 없었다. 가족들은 걱정했다. 내 친구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잡아가는데 나는 잘 다니던 직장을 또 때려치웠으니 말이다.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 내 앞날에 대한 불안함을 드러내는 건 알겠지만 그게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마치 내가 가는 길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옆에서 누가 뭐래도 사실은 자기 미래는 내가 제일 걱정하고  불안해하는데 말이다.


 마냥 어린 시절에는 내가 성인이 되면 멋지고 훌륭한 커리어 우먼이 되어 있을 거라 상상했다. 누구보다 멋진 어른이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여전히 이직에 이직을 거쳐 아직도 자리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10대 때는 나의 20대가 빛날 줄 알았다. 그런데 빛은 무슨 어두컴컴하다 못해 시궁창이다. 앞으로도 내가 잘 될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30대에는 찬란할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이고 희망적이었다 절망적인 생각을 반복했다. 그래도 잘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다독였다. 삶이 힘들어질 때마다 내가 마음속으로 되새기는 말이 있다.


'얼마나 큰 행운을 주시려고 지금 이렇게 힘들게 하나요?'

'신은 인간에게 견딜 수 있는 고통만 준다는 데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거 아닌가요? 일단 버텨보기는 할 건데 이번 일은 액땜하는 걸로 칠게요.'


 이렇게 하면 부정적인 생각으로 한 없이 가라앉고 있던 감정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간다. 이게 나를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믿음이자 다짐이었다. 그런데 그 다짐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나를 괴롭혔다. 나에게 시련은 계속 주어졌다. 그놈의 행복은 나에게 언제 오는지 궁금해서라도 참아냈다. 지금까지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을 했지만 행복하지는 않았다. 분명 서울에 오는 것도 내가 원하는 일이었고, 전공을 직업으로 가지는 것도 내가 원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하기 싫은 일들도 억지로 해내며 미래에는 행복할 거라는 믿음 하나로 현실을 버텨냈다. 그 결과가 번아웃이었다. 내가 고통을 참아낸 결과는 행복이 아니라 절망이었다. 나는 현실을 즐기지 못하고 항상 미래의 행복만 바라보다 현재의 행복을 놓쳤다. 이대로 가다간 앞으로도 나에게 행복은 커녕 스스로 늘 불행하다고만 여길 것 같았다.


 예전에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해야만 마음이 편했다. 가만히 있으면 불안했으며 도태된다는 생각에 항상 조급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의 게으름을 자책했다. 미래에는 분명 지금보다 행복할 거라는 희망 하나로 매 순간을 버텨냈는데 틀렸다. 정말 큰 문제는 가만히 있는 것도 방황하는 시간도 아니었다. 미래의 불안을 미리 떠안고 허덕이면서 파랑새와 같은 행복을 다른 곳에서 찾고 있는 나였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앞으로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과 다르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지 않기로 다짐했다. 부정적인 생각을 내려두고 마음이 편해지도록 노력했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휴식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지금까지 미래만 쫒으며 달려온 나를 위한 보상이었다. 몇 년 동안 생각만 했던 운동을 배우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공부 말고 내가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공부를 했다.


 휴식을 가지면서 나의 내면을 알아차리는 일에 열중하다 보니 다시 시작할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한 달만 쉬려고 했던 나의 계획과는 다르게 5개월을 쉬었다. 슬슬 오래 쉬다 보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월 달에는 취업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학원을 다니면서 실무감각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했다. 그런데 막상 취업이 다가온다는 생각에 또다시 두려움이 몰려왔다. 혹시나 나의 선택 또 틀릴까 봐 걱정되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봐 자신감이 사라졌다. 의욕과 불안감은 동시에 생겨났다. 무엇이 최선의 선택일지 알 수가 없어서 고민이 생겼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을 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게 두려웠고 그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는 게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이겨내자고 다짐했다.


 그러고 있는 와중에 나의 취업고민을 비웃듯이 동생문제가 터져버린 것이다. 정말 그 덕분에 취업 걱정이 싹 달아났다. 작은 걱정거리는 큰 걱정거리로 덮혀졌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니 이렇게 까지 파란만장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회복기를 거쳐 이제야 다시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출발 직전에 퇴장 명령을 받은 기분이다. 복잡한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했다. 그래 조금 더 쉬라고 그러나 보다. 여기서 몇 개월 더 쉰다고 해서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모든 게 중단된다고 해서 내 인생이 망하지는 않는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인생이 망할 정도로 큰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도 백수인데 여기서 더 밑바닥이라 해봤자 똑같은 백수다. 재정 상태는 조금 더 안 좋아지겠지만 말이다. 자소서를 쓰다 보니 내 인생의 여정을 들여다보게 되면서 스스로에 대한 인정을 해주었다. 지금껏 돌이켜보니 강인하게 잘 살아온 것 같다. 때론 무너지고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잘 버텨냈다. 그 악착같은 성격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는 동생이 의식을 완전하게 찾아서 일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내 자리에서 견뎌낼 거다. 그 순간을 위해서라도 나는 오늘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나는 어떤 역경도 잘 헤쳐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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